[114화]
외신을 숭배하던 생존자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그들 중 진심으로 외신을 섬기던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정신지배의 무고한 희생자였다.
그들을 지배하던 외신은 완전히 봉인되었다.
그러나 외신이 죽은 것은 아니었기에 정신지배는 풀리지 않았다.
외신이 봉인되는 순간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기는 했지만, 깨어난 생존자들은 외신의 마지막 명령을 따르기 위해 시현과 한소현에게 이를 드러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시현은 그들을 죽여 없애 후환을 제거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이 장소에는 지금의 난감한 상황을 해결해 줄 인물이 있었다.
“진우혁. 정화의 권능을 가진 구원자. 맞죠?”
시현의 말에 20대 초반의 남성은 눈을 부라렸다.
좁은 어깨와 깡마른 몸.
두꺼운 뿔테 안경에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외모까지.
주도환의 Re write에 나오던 묘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외형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마저 튀어나올 정도였다.
“죽인다. 죽여서 그분께 재물로 바치리라. 온몸의 피와 내장을 뽑아내 대지를 장식할 것이다.”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며 시현을 향해 온갖 저주의 말을 토해 냈다.
상황만 보면 정신이 오염된 다른 생존자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시현은 알고 있었다.
정화의 능력을 가진 진우혁은 정신오염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을.
“되도 않는 연기는 집어치우시죠. 어색해서 손발이 오그라들라고 그러니까. 연기에 영 소질이 없으시네.”
“나는 그분의 충실한 종. 네놈의 살과 뼈를…….”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거 같은데, 몇 대 정도 맞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려나? 조금 많이 아플 겁니다.”
“제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헤헤헤.”
결국 주먹 앞에 진우혁은 굴복했다.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비굴하게 웃는 모습이 마치 간신배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뮤턴트의 협박과 강요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진우혁의 필사적인 처세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일어나세요. 그쪽이 뮤턴트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쪽을 이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그저 협력을 요청 드리고자 할 뿐이죠.”
시현은 배후에 제압되어 있는 생존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신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우혁과 달리, 여기 모인 생존자들은 심각할 정도로 정신이 오염되어 있다.
그런 생존자들을 이대로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노릇.
때문에 시현은 이들의 정화를 요청한 것이다.
이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던 정화 능력이 어느 정도로 효과를 보이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욕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우혁은 망설였다.
“그게…… 저…… 꼭 해야 하나요?”
“진우혁 씨가 하지 않으면 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이 오염된 사람들을 풀어놓으면 반드시 희생자가 발생할 테니까요.”
“네…… 그렇겠죠.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진우혁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자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 하는 모습이었다.
뭔가가 있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정화 능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게…… 아니요. 어차피 말씀드려도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울상을 지었다.
망설이던 시현은 진우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뭔가 메시지가 뜨면 수락하세요.”
“네? 그게 무슨…… 어어어?”
진우혁은 예고도 없이 나타난 청색의 메시지에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그 역시 구원자였기에 머뭇거리면서도 시현의 말에 따라 수락 버튼을 눌렀다.
<허가 완료. 델 사가의 권능 ― 정화를 모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단죄의 모방을 해제합니다.>
단죄는 강하지만, 밝은 장소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등 사용에 여러 제약이 따르는 권능이다.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생각도 없었기에 시현은 단죄를 제거하고 정화를 모방했다.
그리고 정신이 오염된 생존자들에게 권능을 사용했다.
“정화.”
권능이 사용되자, 생존자들의 머리 위로 새하얀 빛의 가루가 눈처럼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빛의 가루에 닿은 생존자들은 오염이 씻겨 나간 것인지 날뛰던 것을 멈췄다.
그 순간.
깨질 듯한 두통이 엄습해 왔다.
“크허억!”
그것은 정신력이 완전히 고갈되었을 때와 몹시 비슷한 현상이었다.
아직 시현의 정신력이 한참 남아 있음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고통뿐만이 아니었다.
스멀스멀 어두운 기운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설마 정화의 권능은 대상의 오염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화하는 건가?’
진우혁의 말이 맞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오염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는 건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느낌이었다.
자신이 아니게 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에 구토감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마저 생겨났다.
만약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에 자해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감각은 5분 이상 지속되었다.
“허억…… 망할…… 진짜 더럽네.”
가까스로 끔찍한 감각에서 해방된 시현은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손발이 떨리는 게 적어도 꼬박 하루는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제 권능을 가져간 건지 모르겠지만…… 괜찮으세요?”
진우혁이 시현의 등을 토닥였다.
자신을 대신해 이런 고통을 겪은 시현을 향한 고마움과 염려, 동시에 자신은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작은 기쁨.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이런 감각을 계속해서 느껴야 한다면 정화의 권능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갑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게 제 살을 깎아먹어야 한다면 선뜻 나서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어지간히 정신력이 강하지 않은 이상 지금과 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어느 순간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막 사용하기에는 패널티가 너무 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워.’
정화의 권능은 사용하기에 따라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렇다.
시현의 눈앞에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생존자들.
원래라면 후환을 위해서라도 죄악감을 무시한 채 전부 죽였을 것이다.
물론 시현이 모방한 정화의 권능을 저장해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아르하의 권능 한 칸을 전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정화로 채워 넣는 것도 아까웠고, 무엇보다 시현은 명실상부 호텔의 최대 전력이다.
정화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도중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우혁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진우혁 씨, 당신이 우리 세력에 와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싫다고 하면요? 죽일 겁니까?”
“딱히 아무 짓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신.”
진우혁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오기 전에 시현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만한 대우는 해 드리겠습니다. 뮤턴트가 그러던 것처럼 강제적으로 권능을 사용하게 하지도 않을게요. 악마에게 감염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생존자들, 그들을 위해 권능을 사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우혁.
그는 겁이 많고 비겁하며 힘 앞에 쉽게 굴복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우혁이 악인인 것은 아니다.
때문에 시현은 진우혁의 감정에 호소했고, 그건 제법 잘 먹혀들었다.
“끄응…… 하긴 어차피 갈 곳도 없고…… 어딜 가도 착취당할 게 빤한데…… 그렇다면 차라리…….”
한참을 고민하던 진우혁은 겨우 대답을 내놓았다.
“알겠습니다. 그……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윤시현입니다.”
“시현 씨, 앞으로 리더라 부르도록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진우혁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로써 시현은 정화 능력자를 손에 넣었다.
* * *
옛것은 옛것인 채로.
말도 안 되게 비싼 값을 지불한 덕에 더 이상 검은 수해의 외신은 더 이상 인류의 위협이 아니게 되었다.
예언가 김영운이 본 미래를 성공적으로 뒤틀어 놓은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 한소현은 등대를 이끌고 고향인 부산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시현은 정은수와 함께 한소현, 김영운을 배웅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받은 게 있었기에 김영운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에 한소현은 손사래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시청을 도운 건 어디까지나 우리 목적을 달성하는 겸 도와준 거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마. 정 마음에 걸린다면 나중에 갚아도 되고.”
“이번에 받은 건 반드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악수를 하는 등 정은수와 작별 인사를 나눈 한소현이 시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미소를 만들었다.
“수고 많았어.”
그렇지 않아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미모를 가진 그녀의 미소였다.
마치 그녀의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네. 한소현 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보다 랭킹 3위까지 뛰어올랐던데…… 남은 건 이한울이랑 나뿐이네?”
그녀는 도발하듯 랭킹 이야기를 꺼냈다.
시현은 그저 웃기만 할 뿐, 굳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언젠가 반드시 그녀를 뛰어넘으리라는 각오를 굳이 말로 꺼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면 가 볼게.”
그걸로 두 사람의 작별 인사는 끝이었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거나 하는, 그런 오글거리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참가자이기 때문에.
예언가인 김영운 이상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싫어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소현이 이끄는 등대를 떠나보낸 시현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자신 역시 떠날 준비를 했다.
이나연과 강소하가 타고 온 차의 짐칸에 필요한 물자를 채워 넣고 인원들을 태웠다.
“드디어 집에 돌아가는구나…….”
강소하가 가장 먼저 뒷좌석에 앉고, 그 옆에 진우혁이 앉았다.
이나연은 운전대를 잡았다.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을 텐데. 적어도 가는 길만큼은 편히 쉬어요.”
“고맙다.”
이나연의 배려에 감사를 표한 시현은 조수석에 몸을 뉘였다.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으로 인해 호텔을 너무 오래 비워 뒀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왕!”
두부의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서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쌍둥이가 보였다.
혹시 시현이 약속을 잊었을까 봐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창문을 내린 시현은 웃으며 두 사람을 불렀다.
“뭐 하고 있어? 나랑 같이 서울로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와아!”
그제야 쌍둥이는 환하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모든 인원이 떠날 준비를 마치고, 이나연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정은수가 조금은 외로운 표정을 지은 채 다가왔다.
“시현 씨에게는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감이 잡히지를 않네요.”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인천연합의 건재함이야말로 제가 바라는 것이었으니까요.”
“만약 인천연합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시청은 물론이고, 아마 다른 세력들도 두 발 벗고 시현 씨를 돕기 위해 나설 겁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정은수는 시현의 손을 한참이나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이나연이 눈치껏 소리치고 나서야 정은수는 시현의 손을 놓아줬다.
일행을 태운 차가 출발하고.
차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정은수를 포함해 시청의 인원들은 손을 흔들었다.
* * *
오랜만에 복귀한 호텔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떠날 때와 비교해 그리 변한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호텔의 생존자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텔 주변에 자리한 바리케이드의 수도 많아졌고, 형태나 배치도 더욱 효율적이고 견고해졌다.
처음에는 마냥 어설프기만 하던 경비도 이제는 나름대로 체계를 갖췄으며 곳곳에 배치된 기계장치들에서 천수민의 노력이 엿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현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호텔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거의 투명함에 가까운 푸른색의 막이었다.
호텔의 정면에는 굉장히 아름답게 생긴 아담한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수호나무를 성공적으로 길렀나 보네.”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래도 확률이 마냥 높지 않은 일이었다.
실패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호나무 담당인 민서라는 보란 듯이 해낸 것이다.
시현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수호나무에 다가갔다.
나무의 그늘 아래에는 작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으며, 그곳에는 민서라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민서라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는 듯싶었으나 이내 민서라는 반갑게 웃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뵙는 거 같네요. 난 또 서울에서 따로 살림을 차린 줄 알았지.”
농담까지 던지는 걸로 보아 마음의 상처도 어느 정도 치유된 모양이었다.
시현의 복귀 소식은 순식간에 호텔 전체로 퍼져 나갔다.
휴식을 취하던 많은 이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시현을 반겼고, 조용하던 호텔은 이내 시끌벅적해졌다.
“오! 리더다. 리더가 복귀했다!”
“너무 소식이 없기에 서울에서 객사한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네?”
“왜 이제 와! 왜 이제 오냐고요!”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생존자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현의 귀환을 기뻐했다.
예상치 못한 격한 환대에 시현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뭐야. 왜들 이래? 우리 이런 사이 아니었잖아요.”
사실 시현이 세력원들로부터 존경은 받을지언정, 친근함을 느끼게 하는 리더는 아니었다.
감염된 생존자들의 목을 치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인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시현의 선택을 이해한다 해서 감정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온몸을 피로 적시며 한때 친구이자 가족이며 동료이던 사람들을 베어 내는 시현의 모습은 생존자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고, 그 결과 두려움을 샀다.
시간이 흐르며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많이 희석되었다지만, 시현이 자리를 비운 시간이 많아 마냥 편한 관계까지는 발전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의 격한 환대는 시현에게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이러한 시현의 의문은 마중을 나온 신호석의 발언에 의해 해결되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