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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113화 (113/225)

[113화]

콰아아!

땅을 뚫고 솟아오른 것은 역시 촉수였다.

그러나 다른 놈들과 달리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였으며 끝에는 톱니를 닮은 날카로운 이빨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윽!”

나름 피한다고 했는데, 완벽하지 못했다.

공격당한 부분은 옆구리.

살짝 생채기만 났을 줄 알았는데, 살점이 한 뭉텅이는 덜어져 나가 있었다.

놀랍게도 촉수의 공격은 시현이 두르고 있는 외피를 무시한 채 몸에 상처를 남겼다.

“이게……!”

지독한 고통에 분개한 시현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권능과 축복이 잔뜩 담긴 핏빛 칼날조차 눈을 크게 떠야 겨우 보일 법한 작은 상처를 남겼을 뿐이다.

화륵.

촉수의 입 안에서 화염이 맺혔다.

새까만 밤하늘, 그 너머에 있는 우주처럼 깊은 흑색의 불꽃을 본 순간, 시현의 생존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시현은 거의 반사적으로 일방통행을 사용했다.

키아아악!

날카로운 외침을 타고 불꽃이 쏘아졌다.

동시에 투명한 막이 생겨나 검은 불꽃을 집어삼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만물을 집어삼키는 일방통행이라면, 검은 불꽃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빠직.

“와…… 저게 깨지기도 하는구나.”

시현은 일방통행이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경이롭기는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현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일방통행이 완전히 깨지고 나자, 등 뒤로 지독한 열기가 느껴졌다.

불길로부터 꽤나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훈제구이가 되겠다 싶을 만큼 강렬한 열기였다.

시현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탁.

드디어 시현의 발이 거대한 그것의 턱에 닿았다.

말도 안 되게 거대한 아기의 머리통에 올라선 순간, 무표정하던 그것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필멸자……. 너구나. 네가 그것을 이어받았구나.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강한 분노와 원한이 느껴졌다.

시현은 단숨에 그것의 머리 위까지 도달했다.

강한 분노를 담은 여덟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에도 아랑곳 않고 시현은 핏빛 칼날을 내던진 채 은색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외쳤다.

“뒤져, 새끼야!”

있는 힘껏 내리꽂은 은색의 검이 그것의 미간을 관통했다.

검신에 새겨진 금색의 문자들이 오색의 빛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여덟 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도 잠시.

이내 그것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미쳐 날뛰던 촉수들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시현이 들고 있는 은검을 빼앗으려 발광하던 생존자들도 실 끊어진 인형처럼 하나둘 쓰러졌다.

검은 불길을 토해 내던,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던 촉수는 검은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본체라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쏟아진 오색의 빛은 그것의 본체를 땅 밑으로 밀어넣었다.

이 치욕을…… 기억하겠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원망을 담은 한마디에 시현은 코웃음으로 돌려주었다.

“그러든가. 네가 깨어날 때면, 난 이미 한참 전에 늙어 죽고 없겠지만.”

조롱과 함께 시현은 은검을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은검이 한 뼘 정도 더 파고든 순간, 그것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남아 있는 것은 아직 채 흩어지지 않은 사이한 기운과 땅에 박혀 있는 은색의 검뿐이었다.

아름다운 검신에 빼곡하던 금색의 문자 또한 사라져 있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모든 힘을 소실한 것이다.

“앞으로 처리해야 할 외신이 한둘이 아닌데, 겨우 일회용이라니…….”

무려 4억이라는 거금을 치른 것치고는 가성비가 너무 떨어진다.

승리를 했음에도 급격히 우울해진 시현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걸까.

그의 눈앞에 푸른색의 메시지가 다수 나타났다.

<위대한 존재를 봉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구원자로서 의무를 다한 당신에게 합당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구원자로서의 격이 상승합니다. 이제 당신은 이자프의 사도입니다.>

<아르하의 축복이 보다 강해집니다. 최대 3개의 권능을 동시에 모방할 수 있습니다.>

“어? 이게 뭐야?”

시현은 당황했다.

보상이라 해도 기껏해야 축복이 담긴 장비 몇 개 던져 주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뭐가 되건 자신이 이번에 소모한 금액만큼의 가치는 없을 거라 멋대로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가 가진 두 개의 낙인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강한 열기를 토해 내고 있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르하의 권능을 통해 모방할 수 있는 권능이 세 개로 늘어난 것은 뛸 듯이 기쁜 일이었다.

덕분에 앞으로의 전술 폭이 한층 다양해졌다.

그러나 진짜 주목해야 할 보상은 따로 있었다.

사도.

다른 구원자들과 달리 낙인을 받는 순간 아무 조건 없이 각성할 수 있는 존재.

그뿐이랴.

다른 동일 레벨의 구원자보다 권능을 더 강하게 다룰 수 있기에 사도는 신에게 축복받는 존재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이미 구원자로 각성한 이가 사도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은 전례가 없었다.

“기존보다 권능의 위력이 조금 강화되는 정도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무려 외신을 봉인한 자를 위한 보상이 그 정도일 리가 없지 않냐’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자프의 각인. 4차 해금 완료.>

<이자프의 축복을 받아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됩니다.>

<악한 성향을 지닌 자에게 처형의 권능이 3차 피해를 입힙니다. 악한 성향을 지닌 자의 외피에 처형의 권능이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아르하의 각인. 3차 해금 완료.>

<아르하의 축복을 받아 신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권능을 사용할 때의 패널티가 감소하며 총 세 개의 권능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강제적으로 구원자의 레벨이 상승했다.

시현은 어디까지나 외신을 봉인한 것인지 토벌한 게 아니다.

당연히 경험치는 얻지 못했으며, 그에 따라 레벨 업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남아 있는 경험치의 양을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레벨이 올랐다.

이제 겨우 2레벨 구원자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

3레벨일 때만 해도 많은 구원자와 참가자들로부터 경외 어린 시선을 받았다.

3레벨만 해도 그 정도였는데, 4레벨이라면?

넘치는 힘은 시현에게 전에 없던 충족감과 희열을 느끼게 해 줬다.

당장이라도 새로 얻은 힘을 사용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좋은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윤시현의 Re write가 보다 많은 조회수를 얻어 순위가 상승했습니다.>

빌런에 의해 봉인이 깨진 외신, 그리고 그것을 재차 봉인한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업적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모든 참가자의 Re write가 강제적으로 베드엔딩을 맞이해야 했을 수도 있는 상황.

그걸 막아 낸 시현의 Re write에 많은 조회수가 몰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현은 랭킹을 확인했다.

3위.

이제 시현의 위에 있는 것은 랭킹 2위 이한울과 1위 한소현뿐이다.

“윤시현.”

들려오는 한소현의 목소리가 들떠 있던 시현의 기분을 조금은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그것이 봉인되어 사라진 후, 정신을 잃은 사람들에게 후속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제압하기 위해 상당히 힘을 줘서 때렸는지 부상을 입은 자도 몇몇 존재했다.

그리고 한소현의 곁에는 낯선 얼굴의 남자가 있었다.

“여기 생존자들 사이에 숨어 있더라. 처분은 너한테 맡길게.”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시현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천리안의 사용자이자, 이한울이 신뢰하는 참가자.

유종환이었다.

“드디어 만났네. 이 순간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시현은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벅차오르는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와 별개로 손은 이미 핏빛 칼날의 손잡이를 강하게 말아 쥐고 있었다.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유종환이 겨우 입을 열었다.

“……협상.”

“뭐?”

“협상하자.”

유종환은 웃으며 평화를 요구하는 손을 내밀었다.

어지간히 긴장하고 있는지 유종환의 이마에서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 놓인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내가 패배했어. 깔끔하게 인정하고 항복할게. 더 이상 저항하지 않겠어.”

“포로가 되겠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그렇다면 어떤 처우를 받더라도 불만은 없겠네. 다행이야.”

시현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단검 하나를 주워 들었다.

누가 사용하던 것인지 몰라도 굉장히 낡고 녹이 슬어 볼품없어 보이는 단검이었다.

굳이 허리춤의 핏빛 칼날이 아니라 이가 다 빠진 단검을 주워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유종환을 곱게 보내주지는 않겠다는 각오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유종환이 아니었다.

그의 손과 입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불만은 없지. 하지만 윤시현, 내가 누군지 잘 생각해 봐. 나는 천리안의 권능을 가진 구원자이자, 참가자야. 내가 있으면 네 세력의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될걸?”

“…….”

필사적인 유종환의 반응에도 시현은 침묵했다.

그것을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판단한 유종환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더욱 애썼다.

“사실 교단이 단시간에 그 정도로 많은 인재를 영입하고 덩치를 부풀릴 수 있던 것도 내 권능의 영향이 커. 무력 이상으로 중요한 게 정보잖아. 내 권능은 정보를 수집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고.”

“…….”

“깔보는 건 아니지만, 네 세력이 많이 작은 건 사실이잖아? 설마 호텔의 위치가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호텔의 위치는 교단에서도 진즉 파악하고 있었어. 다만, 보다 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뒤로 미뤘을 뿐이지. 그러니까 교단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단기간에 세력을 부풀려야 하고, 거기에 내가 가진 천리안만큼 안성맞춤인 권능은 없을 거야.”

“…….”

“그뿐만이 아니야. 나는 아포칼립스 초기부터 이한울과 함께 행동했고 함께 교단을 키웠어. 교단에 대해서는 이한울만큼이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딱히 고문이나 포섭 같은 귀찮은 행위 없이도 나는 얼마든 정보를 제공할 의향이 있고. 그러니까…… 어때?”

거기까지 말한 유종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시현을 올려다봤다.

그 미소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 엿보였다.

가만히 유종환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시현이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천리안과 교단의 정보, 확실히 탐나기는 해.”

“그, 그렇지?”

시현의 긍정적인 반응에 유종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굳이 너를 살려 둘 이유가 있나?”

“뭐? 그야 당연히…….”

“네가 가진 정보야 너를 죽이고 유종환의 Re write를 읽으면 얻을 수 있잖아. 네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텐데, 굳이 너를 살려 둘 필요는 없지.”

“그건…… 분명 네 말이 맞기는 하지만, 권능은! 나를 죽이면 천리안은 그대로 사장되는 거야. 교단이 일을 마치기 전에 호텔을 성장시켜서 그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

유종환은 필사적이었다.

만약 여기서 시현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은 끝이라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유종환은 모르고 있었다.

그의 쓸모 가치가 어느 정도이건 시현에게 그를 살려 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천리안을 가진 너라면 내가 어떤 권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을 거 아니야.”

“아르하의 권능…….”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에 레벨이 올라서 공석 하나가 생겼거든. 거기에 천리안을 새겨 넣으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유종환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보통의 생존자라면 어떻게든 모시려 들 텐데, 아르하의 권능이라는, 타인의 권능을 모방하는 사기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는 시현에게는 그게 통하지를 않았다.

초조해진 유종환은 타깃을 바꿨다.

시현에서 그의 옆에 있는 한소현으로.

랭킹 1위이자 부산에서 제일가는 세력의 리더인데다가 시현을 도와 엄청난 활약을 한 그녀의 발언이라면, 제아무리 시현이라도 무시하지 못할 거라고 계산한 것이다.

“그래, 아르하의 권능을 가진 윤시현이라면 내가 가진 권능은 필요하지 않겠지. 하지만 한소현, 너는 어때? 내 권능이 있으면 등대를 부산 최고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세력으로 키울 수 있다고!”

유종환은 자신의 가치를 믿었다.

윤시현이라는 아주 특이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계산은 철저하게 틀렸다.

“왜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 너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

“등대에도 있어. 천리안.”

“…….”

그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와도 같았으리라.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두 사람의 발언에 넋이 나간 유종환은 멍하니 땅만 내려다보았다.

“자, 이제 더 할 말은 없는 거지?”

시현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손을 떨던 유종환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동자에 깃든 각오를 확인한 시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막다른 길에 몰린 유종환은 숨겨 둔 단검을 기습적으로 뽑아 들며 시현의 목덜미를 노렸다.

시현은 피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도, 결국 쥐일 뿐이다.

단검은 시현의 목덜미에 닿았고.

“끄아아악!”

유종환은 손목을 감싸 쥐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4레벨 구원자의 외피를 겁도 없이 공격한 대가였다.

시현은 마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신을 보며 유종환은 절망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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