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일방통행은 소모가 크고 방법이 까다로워서 그렇지 형태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형태는 평면의 직사각형이지만, 그것을 구부려서 원통을 만들 수도 있고 정육면체를 만들 수도 있다.
지금처럼 반 구체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안과 밖을 뒤집는 것에도 크게 제한이 없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캬아아아아!]
결국 피의 사슬에서 풀려난 하수인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반투명한 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하수인의 공격은 맥없이 튕겨져 나오고 말았다.
이채연의 공격이라 해서 다를 건 없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단검을 휘둘렀으나 일방통행의 벽을 넘기는 못했다.
이 반투명한 벽은 시현의 정신력이 바닥나기 전까지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이다.
원래라면 사용자를 보호해야 할 일방통행을 뒤집어 씌워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나연아.”
시현은 낮은 단계의 하수인과 씨름하고 있는 이나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순간 흠칫하는 이나연이었지만, 이내 시현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고는 그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었다.
<허가 완료. 에르의 권능 ― 폭풍을 모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광휘의 모방을 해제합니다.>
목적지에 도달했으므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광휘를 제거하고 폭풍을 받아들였다.
시현은 이채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이채연은 길길이 날뛰기보다는 얌전히 패배를 받아들였다.
“폭풍.”
시현의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바람은 이내 맹렬한 폭풍이 되어 나아갔다.
그러고는 나아가는 길 위에 위치한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윽고 매서운 칼바람은 일방통행의 투명한 막에 닿았다.
일방통행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공격을 너무도 쉽게 받아들였고, 폭풍은 일방통행 안으로 파고들었다.
반면,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려는 폭풍은 일방통행이 확실하게 잡아 두었다.
그 결과, 폭풍은 일방통행 안쪽에서 뭉치고 응축되어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지옥을 만들었다.
붉은 피가 폭풍에 섞여들었다.
바람이 멎었을 때, 시현은 상당량의 정신력을 잡아먹는 일방통행을 거둬들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미 3단계 하수인과 이채연은 온몸이 넝마가 되어 바닥에 엎어져 있었으니까.
3단계 하수인의 경우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으며, 이채연의 경우 살아 있기는 했지만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아무리 여러 가지 보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경이로운 생명력이 아닐 수 없었다.
시현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이채연에게 다가갔다.
힘겹게 눈동자를 굴려 시현을 바라본 이채연은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서 어떠한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어.”
어차피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현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정화의 권능을 가진 구원자가 네게 권능을 사용한다면, 너는 어떤 말을 했을 거 같아?”
약간이지만, 돌아서면 잊을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지만, 시현은 그녀에게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며 시현은 짧게나마 김해철의 Re write를 읽었다.
수해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채연은 굉장히 선하고 착하며 자기보다 타인을 위하는 인물이었다.
그 정도가 너무 과해 어리석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런 이채연이 이처럼 피를 갈구하고 살육을 탐하게 된 원인은 어디까지나 정신 오염에 있다.
“글쎄… 아마 그분을 만나기 이전의 나라면…….”
이채연은 피를 토하면서도 웃었다.
“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죽여 달라 애원하지 않았을까? 멍청하게도.”
“……그래.”
더 이상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시현은 핏빛 칼날을 거꾸로 들고 내리찍었다.
붉은색의 칼날은 이채연의 가슴을 뚫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펄떡이며 몸부림치던 이채연의 움직임은 오래 지나지 않아 완전히 멎었다.
그토록 바래 오던 순간이지만, 생각한 것보다 속이 답답했다.
시현은 이채연의 눈을 감겨 주었다.
* * *
사실상 적 세력에서 가장 까다로운 건 3단계 하수인과 이채연이었다.
그 둘이 무너지고 난 후에 시현이 참전하자, 하수인들의 머릿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수인들은 완전히 전멸했다.
전신에 자상을 입고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 있는 이채연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한소현이 입을 열었다.
“천리안은? 싸울 때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던데… 설마 서울로 도망간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겁니다. 이채연이 전투 도중 천리안의 보조를 받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는 건 이 건물 어딘가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소리네.”
거기까지 말한 한소현은 일행의 상태를 살폈다.
시청부터 시작해서 요새를 점령하고 그 후에는 검은 수해에서 하수인들의 습격을 막아 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채연이 부리는 하수인의 무리와 싸웠다.
연이은 전투 때문에 일행은 굉장히 지쳐 있었다.
사실상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시현과 한소현, 둘뿐이라 봐도 무방했다.
“후아…… 이제 손가락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아요.”
가장 먼저 이나연이 포기를 선언했다.
조금이라도 시현의 힘이 되기 위해 최전선에서 힘을 아끼지 않고 날뛴 결과였다.
“난 정신력 고갈.”
강소하의 경우, 찝찝하지도 않은지 피가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 한복판에 드러누워 있었다.
정신력이 바닥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구토감이 몰려오는 것인지 핼쑥한 얼굴을 한 채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김영운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으나 몸이 말이 듣지 않는 것인지 맥없이 주저앉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한소현이 나서서 그를 강제로 앉혔다.
“쉬고 있어.”
“하지만 리더, 두 분이 고생하시는데 어떻게…….”
“어차피 정신력도 얼마 안 남았잖아. 괜히 방해하지 말고 여기에 있어.”
“……죄송합니다.”
그렇게 김영운까지 탈락하고 말았다.
사실 시현도 다른 사람에 비해 그나마 멀쩡하다뿐이지 소모가 극심하다는 것은 똑같았다.
당장이라도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랬다가는 김영운의 예언을 통해 본 최악의 미래를 맞이하게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지금은 몸에 채찍질을 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이동하시죠. 분명 여기 어딘가에 지하로 가는 길이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건물의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싸움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건물 내부는 외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기괴함을 갖추고 있었다.
벽면 전체가 촉수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바닥에는 새까만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구멍이 몇 개인가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판자로 막혀 있던 장소 안에서 시현은 대량의 뼈를 발견했다.
그 수많은 백골 중에서 짐승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쳐 죽일 놈들…….”
시현은 이를 갈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해철을 더욱 잔혹한 수단으로 처리했어야 하는데.
때늦은 후회를 하면서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이 사태의 원흉 중 하나라 볼 수 있는 유종환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아직 희생자들의 넋을 달랠 수단이 남아 있었다.
1층 내부를 샅샅이 둘러봤으나 계단은 고사하고 그 비슷한 것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구석진 장소에서 허리를 숙여야 겨우 드나들 수 있을 법한 작은 통로를 하나 발견했다.
입구 주변에는 선홍빛의 촉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통로 앞에 선 시현은 저도 모르게 코를 틀어막았다.
구원자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신체능력뿐만 아니라 감각 또한 민감해진다.
그런 시현의 후각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냄새를 잡아낸 것이다.
“아무래도 저기 보이는 구멍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굉장히 싫지만, 별수 없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소현은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위험한 장소로 향한다는 불안보다는 저 끔찍한 촉수들을 꺼리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시현이 앞장서 구멍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음성이 파고들었다.
네 욕망을 말하라.
목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두통이 발생했다.
“……지랄.”
거칠게 머리를 털어 내자, 더 이상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를 누군가가 꾹 쥐어짜고 있는 듯한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상당히 불쾌한 감각이군요.”
“전적으로 동감해.”
뒤따라 들어온 한소현도 마찬가지로 두통을 느꼈는지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혹시 몰라 말해두는데. 뭘 보더라도 절대 대답하면 안 돼.”
“알고 있습니다.”
시현은 손전등에 의존한 채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통로의 입구는 굉장히 좁았으나 안으로 어느 정도 들어가니 가까스로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통로가 넓어진 만큼 예의 끔찍하고 불쾌한 냄새는 강해졌다.
그리고…….
네 욕망은 무엇이더냐.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막이 아닌, 뇌를 관통하는 듯한 음성은 음험하고 끈적이며 섬뜩하기까지 했다.
‘욕망. 욕망이라…….’
가지고 있는 욕망이야 산처럼 많았다.
먼저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 진짜 제대로 된 요리를 제대로 먹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Re write’가 시작되기 전에 먹은,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치킨과 시원한 탄산음료가 먹고 싶었다.
예쁜 여자 친구랑 데이트도 하고 싶었다.
뜨거운 물에 푹 몸을 담그고 싶었다.
난방을 한계까지 올리고 반팔 차림으로 사치스럽게 겨울을 보내고 싶었다.
산 좋고 물 깨끗한 곳으로 여행도 다니고 싶었다.
욕망이야 차고 넘쳤다.
말하라. 그리하면 이루어질지니.
목소리는 속삭였다.
가지고 있는 욕망을 말하라고.
그러나 시현은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너희를 굽어살피는 위대한 존재일지니. 두려워 말라.
아주 지랄 같은 소리다.
‘굽어살피는 위대한 존재?’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시현은 놈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자 놈은 더욱 치졸한 수를 썼다.
화악!
돌연 눈앞이 밝은 빛으로 가득해졌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빛 속에서 시현은 한참이나 오도카니 서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빛이 사라진 후, 시현의 앞에 펼쳐진 것은 어둡고 습하며 음침하기까지 한 통로가 아니었다.
모든 불이 꺼져 어두운 방 안.
한 남자가 창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깊게 패인 주름과 크게 절망한 눈동자.
아버지다.
“시현아…….”
그는 울먹이며 사랑하는 아들을 부른다.
“내가 미안하다. 못난 아버지라 미안해.”
시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분명 겨울용 야상을 입고 있었어야 할 몸이 고등학교 졸업 이후 걸쳐 본 적 없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뭘 해야 좋겠니? 이제 나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책임질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시현아…….”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 둔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뭘 해 줬으면 좋겠니?”
“…….”
시현은 침묵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말해! 말하라고! 원하는 게 뭐야! 아니면 믿던 놈에게 사기나 당해서 제 가족조차 지키지 못한 가장 따위한테는 해 줄 말도 없다는 거냐!”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쥐고 흔드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현은 등을 돌렸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한번 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어둡던 방은 사라지고 이번에는 익숙한 모교의 빈 교실이 나타났다.
석양이 지는 교실 안, 시현의 앞에는 예쁘장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헤어지자.”
“…….”
시현은 답답한 마음에 교복 옷깃만 만지작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아 대며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이유는 딱히 말 안 할게. 너도 대충 알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녀는 등을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1년간 사귄 정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내가 해 줬으면 하는 거 있어?”
“후우…….”
괴로운 기억을 강제적으로 마주하게 된 시현은 깊이 한숨을 토했다.
그러나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빛이 눈을 가린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등장했다.
어머니는 잠든 아버지를 피해 불 꺼진 화장실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언니, 부탁이야. 이번에 한 번만 도와줘. 그러면 우리 시현이 아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제발, 응? 내가 무릎 꿇고 사정할게. 언니, 언니?”
스마트 폰에 대고 애원하던 어머니는 훌쩍이며 화장실을 나왔다.
문 앞에 서 있던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눈물을 감추며 애써 웃었다.
“어머, 우리 아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웃는다.
“혹시 통화 내용 들었니? 괜찮아. 아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엄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돈은 사람을 미치게 하고, 흔들리게 하고, 한없이 낮아지고, 추해지게 만든다.
“아들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며 살게 할 거야. 우리 아들 꿈 있다며. 그거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만약 필요한 거 있으면 부담 없이 엄마한테 말하고.”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그 순간.
어머니의 입가에 맺히는 희미한 미소를 본 순간, 시현은 정신을 차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혀를 씹으며 흐려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눈을 감은 시현은 길게 호흡하며 제멋대로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헤어진 여자 친구도 사라져 있었다.
보이는 것은 좁아터진 통로뿐이다.
“으으…… 으아아아…….”
옆에서는 한소현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욕망. 내 욕망은……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사람의 기억 속에서 가장 나약한 순간을 헤집어 이용하다니.
아주 비열하지만,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미 알고 각오를 다졌음에도 흔들렸을 만큼 지독하기까지 하다.
시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