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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110화 (110/225)

[110화]

인류가 악마와 처절한 생존 경쟁을 벌인 지 약 1년째 되는 날.

한 남자는 생각했다.

악마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남자가 알고 있는 악마는 1차 아포칼립스가 발생한 날, 아무런 전조도 뭣도 없이 돌연 전국 각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몸담은 세력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었기에, 남자는 본격적으로 악마의 근원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남자는 인망이 있었고, 능력도 있었다.

많은 생존자들의 도움을 받아 끈질긴 추적 끝에 결국 남자는 검은 수해의 안에서 기이한 건축물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아포칼립스 이전에는 없던 건축물.

그 안에 무언가 단서가 있을 것이라고 남자는 확신했다.

그러나 남자의 확신은 좋은 방향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그 안에 있던 것은 단서 따위가 아니었다.

남자가 찾아다니던 것 그 자체, 이른바 악마의 근원이었다.

남자는 그것에게 물었다.

“악마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지?”

그것이 남자를 조롱하듯 웃으며 답했다.

악마는 인류가 탄생하기 아득한 시절부터 이 땅에 살아가던 우리의 아이들이다. 기만자들에 의해 오래도록 잠들어 있다가 우리의 힘이 강해진 지금 함께 깨어나게 되었지.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너는 어떤 존재지?”

그것은 이번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유혹하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너희가 신이라 부르는 가짜들의 탐욕으로 잊힌 진짜 신이다. 나약한 자여, 기만자들은 잊고 내게로 오라. 이 땅의 진정한 주인에게로. 이 모든 것은 원래 있어야 할 모습을 되찾아 가는 과정일 뿐이니. 진실을 추구하는 너에게도 진정한 축복을 내려 주겠다.

“…….”

남자는 눈을 감고, 그 상태로 한참이나 고민했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더 이상 남자에게서 망설임은 남아 있지 않았다.

빛처럼 새하얀 검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는 그것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리석은 자여, 그게 네 선택인가? 무지가 곧 종말을 초래하는구나.

“나는 늘 인류의 편이다. 그리고 확실하게 기억해 둬. 나는 나약하거나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구원자 정훈이다.”

* * *

이채연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손은 피로 가득했으며, 붉게 물든 눈동자는 희미하게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인간을 배신하고, 악마의 편에 선 구원자.

이단의 상징이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이곳까지 오며 차곡차곡 분노를 쌓았던 시현은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인사 정도는 받아 주지. 성격이 급하네. 여기가 어떤 장소이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물어보면 알려 주려 했는데.”

“굳이? 너무 뻔해서 딱히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인데.”

“재미없어라.”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이채연이 역수로 쥔 단검을 뒤에 있던 나무판자에 꽂아 넣었다.

저주받은 장비에 담긴 강력한 힘을 버티지 못한 판자는 산산조각 났고, 그 너머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흐흐흐.]

[키히히히!]

판자 너머에 있던 것은 하수인 무리였다.

그 수가 족히 수십이 넘었으며, 간간히 2단계 하수인도 눈에 띄었다.

심지어 하나뿐이기는 하지만, 3단계 하수인까지 존재했다.

마치 좀비처럼 제자리에서 멍하니 상체만 흔들던 놈들이 일제히 일행에게 시선을 줬다.

“……이거 아무래도 도망가는 게 낫지 않을까?”

강소하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면 예언가 김영운이 본 미래, 인류의 종말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이미 일행을 먹잇감으로 결정한 하수인들이 얌전히 놓아줄 리가 없다.

[캬아아아!]

하수인들이 일제히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성난 노도와도 같은 하수인들의 기세에 모든 게 쓸려 나갈 것만 같았다.

“기왕이면 마지막까지 아끼려 했는데. 별수 없나.”

안타까움에 혀를 찬 시현은 등에 매고 있던 지팡이, 이끄는 태초의 빛을 땅에 내리꽂았다.

터져 나오는 빛에 하수인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1단계 하수인 중에서는 그대로 주저앉는 놈까지 발생했다.

반대로 빛에 휘감긴 일행은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적의 힘은 약하게, 반대로 아군의 힘은 강하게 만드는 사기적인 축복의 힘이 한없이 불리하기만 하던 전황을 조금이나마 뒤집어 놓았다.

“쓸어버려!”

우렁찬 외침과 함께 시현이 선두에 섰다.

앞을 가로막는 하수인들을 베어 내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시현의 눈동자는 미소 짓고 있는 이채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1단계 하수인들은 시현의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바스러졌다.

그러나 2단계부터는 아니었다.

[캬하하하!]

보다 강화된 능력에 더해 저주받은 장비까지 다루는 2단계 하수인은 결코 쉬운 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발목이 붙잡혀 있는 사이, 3단계 하수인까지 접근해 왔다.

“저건 제가 처리할…… 어억!”

호기롭게 앞으로 나섰던 김영운이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3단계 하수인이 휘두른 일격이 김영운의 외피를 갉아 먹고는 팔에까지 상처를 입혔다.

상당히 깊은 상처였으나 한소현이 있었기에 금방 회복되었다.

“……쳇.”

혀를 찬 시현은 목표를 이채연에서 3단계 하수인으로 변경했다.

현시점에서 3단계 하수인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3레벨 구원자인 시현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대는 저주받은 장비를 사용하지만, 시현에게는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구울의 왼손이 있었다.

“주변 잔챙이부터 정리해 주시죠. 부탁드립니다.”

일격에 나가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김영운을 잡아당긴 시현이 앞으로 나섰다.

[키히. 키햐햐하하!]

3단계 하수인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구울의 손에 의해 무기가 비명을 지르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결과, 3단계 하수인이 가진 장비는 부러지고 말았다.

[키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자신의 부러진 검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하수인이 부러진 검을 내던지고는 시현에게 달려들었다.

애초에 무기가 없다고 해서 하수인의 전투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수인의 공격은 묵직했으며, 공격을 회피하는 시현의 몸놀림은 재빨랐다.

하지만 저주받은 장비가 부러진 지금, 그저 본능에 맡겨 달려드는 게 전부인 하수인은 시현의 적수가 아니었다.

시현은 허리춤에서 뽑은 핏빛 칼날을 휘두르며 눈을 감았다.

“광휘.”

파앗!

시현의 정면에서 작은 빛이 폭발했다.

[캬아악!]

하수인이 두 손으로 눈을 감싸며 몸부림쳤다.

그 틈을 노려 처형의 권능이 담긴 검이 하수인의 목을 노리고 나아갔다.

그러나 시현의 검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 안 돼.”

쭉 전투를 지켜보고만 있던 이채연이 전장에 뛰어든 것이다.

그녀는 굉장히 익숙한 흑색의 기형적인 단검으로 핏빛 칼날을 막아 냈다.

시현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맺혔다.

“이제 보니 손버릇이 영 안 좋네.”

“……아, 그러고 보니 이 단검의 원주인이 너였구나.”

현무와의 교전에서 시현이 잃어버린 장비는 시청에서 회수해, 쌍둥이가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가시만큼은 찾아낼 수 없었다.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싶더라니. 대여료는 엄청 비쌀 거다.”

“덕분에 잘 놀았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나한테 소유권을 완전히 넘기지 않을래? 성능이 꽤 마음에 들더라고.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강제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수밖에.”

시현과 이채연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채연은 2레벨 구원자다.

하지만 지금의 이채연은 아무리 3레벨 구원자인 시현이라도 쉽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왼손에 든 저주받은 단검으로 시현의 외피를 지우고, 오른손에 든 검은 가시로 외피가 벗겨진 부분을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몸놀림이 재빠르고 공격도 매서웠기에 시현은 몇 번이고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그 존재의 사도인 이채연이 가장 힘을 받기 좋은 장소였다.

사실상 1레벨의 차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만약 축복의 힘이 없었다면 오히려 시현이 힘에서 밀리는 상황이 발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시현이라고 해서 마냥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구울의 왼손으로 저주받은 단검을 막고, 핏빛 칼날에 처형의 권능을 담아 이채연을 공격했다.

딱히 급소를 노리지 않아도 상처를 입히기만 하면 추가적인 피해를 줄 수 있기에 사실상 효과는 검은 가시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문제는 이 싸움이 시현과 이채연의 1:1 정면 승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이 오염된 이채연은 하수인에게 있어 동족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캬아아아아!]

3단계 하수인이 시현의 뒤를 노렸다.

“망할!”

어쩔 수 없이 시현은 핏빛 칼날로 대처했고, 그로 인해 생겨난 빈틈을 이채연이 파고들었다.

검은 가시가 시현의 오른팔을 그었다.

푸확!

상처 주변으로 검은색 가시가 피부를 뚫으며 솟아올랐다.

“크윽…….”

시현은 이가 부러지도록 강하게 깨물며 고통을 견뎠다.

여기서 비명을 질러 봤자 빈틈만 늘어날 뿐이요,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죽음으로 연결된다.

이채연이 본격적으로 하수인과의 합격으로 시현을 압박했다.

이채연은 그것의 사도이며, 정신이 오염되어 있기에 하수인을 제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돌아 버리겠네.’

상황은 굉장히 좋지 않게 흐르고 있었다.

이채연 하나만 해도 버거운데, 3단계 하수인까지 동시에 상대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시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버티고 또 버텼다.

가장 위협이 되는 둘을 상대하고 있는 동안, 배후에 있는 아군이 나머지를 어떻게든 해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현의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해!”

목소리의 주인은 강소하였다.

강소하의 머리 위에는 핏빛 구슬이 생겨나 있었다.

1단계 하수인들을 처리하며 그들이 흘린 피를 모은 것이다.

구슬은 삽시간에 덩치를 부풀렸다.

촤르르륵!

족히 열 배는 거대해진 구슬로부터 붉은 사슬이 쏟아져 나왔다.

붉은 사슬은 1단계 하수인을 무시한 채 어느 정도 위협이 되는 2단계 하수인을 집중적으로 포박했다.

이채연과 3단계 하수인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캬아악?]

3단계 하수인은 사슬을 회피하지 못하고 손과 발이 묶였다.

반면, 이채연은 사슬을 가뿐하게 회피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행해진 공격인데도 말이다.

그것을 본 시현은 웃었다.

“천리안의 보조를 받고 있구나. 다행이야.”

적어도 천리안을 가진 유종환이 서울로 도망가지 않고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방증이니까.

어찌 되었건 강소하 덕에 시현은 숨 돌릴 틈을 얻을 수 있었다.

오른팔의 상처도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한소현이 치료해 준 것이다.

만전의 상태가 된 시현은 적극적으로 이채연을 압박했다.

피의 사슬이 3단계 하수인을 언제까지고 붙잡아 둘 수는 없을 테니, 그 안에 끝을 봐야 했다.

“…….”

마냥 여유롭지 않은 것은 이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현과 달리 시간을 끌어야 하는 이채연은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면서도 일정 거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시현에게서 너무 멀리 벗어나면 핏빛 칼날이 3단계 하수인의 심장을 관통하리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1~2단계 하수인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지금, 3단계 하수인의 숨이 끊어지면 이채연의 승산은 형편없이 떨어진다.

[크아! 크아아아!]

3단계 하수인이 마구 몸부림쳤다.

그를 묶고 있는 피의 사슬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불길한 소리를 냈다.

시현은 결판을 내기 위해 대치 상황을 깨뜨렸다.

화악!

이채연의 눈앞에서 빛이 터졌다.

광휘의 권능이었다.

“이런……!”

한순간이지만 이채연의 시각은 봉인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유종환이 가진 천리안의 권능이 그녀를 보조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리안은 시현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는 피의 사슬에 묶여 있는 3단계 하수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어디 얄팍한 수를!”

그녀는 곧바로 시현의 옆을 쳤다.

급하게 공격을 방어한 시현이 다시 한번 빛을 터뜨려 이채연의 시각을 교란시키더니, 3단계 하수인을 공격했다.

‘묶여 있는 하수인을 먼저 처리할 생각이구나.’

시현의 속셈을 간파한 이채연은 3단계 하수인을 지키기 위해 수세에 들어갔다.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채연은 버텼다.

파직.

하수인을 묶고 있던 사슬 중 하나가 깨졌다.

오른팔이 자유로워진 하수인은 더욱 사납게 날뛰며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혀를 찬 시현이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하수인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와 검을 맞대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채연도 하수인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을 때, 시현은 다시 한번 광휘를 터뜨렸다.

당연히 하수인을 노릴 거라 생각한 이채연은 뒤로 물러나며 하수인을 보호했다.

“……?”

이채연은 의문을 표했다.

당연히 광휘를 터뜨리고 자신이 당황하는 틈을 타 하수인을 처리하려 들 거라 생각했건만, 시현은 오히려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안전거리를 확보한 시현이 입을 열어 말했다.

“일방통행.”

그 순간 이채연은 자신이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반투명한 막이 반구를 그리며 이채연과 하수인을 둘러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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