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두 번의 아포칼립스를 통해 주변의 대지는 갈라지고, 단지 내 아파트는 단 세 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붕괴해 버렸다.
주변의 대지가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데, 그 위에 서 있는 건물이라 해서 멀쩡할 리가 없다.
‘이미 약해진 곳이라면 충분히 공략이 가능해.’
아무리 폭풍이라 해도 건물을 붕괴시킬 정도의 위력은 없다.
하지만 폭풍을 요새의 균열 틈새에 때려 박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나연아.”
시현이 손을 내밀었다.
“네!”
활짝 웃은 이나연이 시현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허가 완료. 에르의 권능 ― 폭풍을 모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기사 서약의 모방을 해제합니다.>
언제든 모방할 수 있는 기사 서약을 제거하고, 폭풍을 등록한 시현은 정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슬쩍 곁눈질을 한 이나연은 의도적으로 시현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폭풍.”
콰아아아!
같은 지점에서 발생한 두 개의 폭풍이 서로 엉켜들며 위력을 증폭시켰다.
거기에 강소하가 자신의 머리 위에 떠도는 피의 구슬을 던져 넣었다.
“어휴, 이거 다시 만들려면 진짜 한참 걸리는데…….”
그런 투정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효과는 탁월했다.
붉게 물든 폭풍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요새를 향해 쏘아졌다.
옥상 위에서 방아쇠를 당기던 생존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달아났다.
정확하게 균열의 틈새로 파고든 폭풍은 요새의 안쪽을 진탕으로 만들었다.
빼곡하게 자리한 창문들이 깨지며 강한 바람과 함께 유리 조각, 가구의 파편, 잡동사니, 심지어는 뮤턴트의 전투원까지 토해 냈다.
“으아아아악!”
“미, 미친. 이게 대체 뭐야!”
요새로부터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는 폭풍이 만들어 내는 굉음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엄청난 성과를 냈음에도 폭풍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쩌적.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사이로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시간으로 균열의 크기가 커지고 있었다.
그 균열이 요새의 우측 벽을 약 절반 정도 덮었을 때.
쿵.
굉음과 함께 요새가 살짝 내려앉았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쿠구구구궁!
요새는 빠른 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가장 약한 지점인 오른쪽을 향해 쓰러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요새를 보며 강소하가 말했다.
“……윤시현, 저거 우리 쪽으로 쓰러지고 있는데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달려!”
시현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질주했다.
사색이 된 이나연과 강소하 역시 사력을 다했다.
콰아앙!
결국 요새는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일행은 가까스로 붕괴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건물이 쓰러지며 발생한 대량의 흙먼지까지는 완전히 회피할 수 없었다.
“이런…….”
“켁! 케훅!”
눈을 찌푸린 시현은 소매로 코와 눈을 가렸다.
흙먼지를 잔뜩 들이마신 것인지 지척에서 강소하와 이나연의 기침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자박.
자갈밭을 걷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정확하게 요새가 붕괴한 방향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시현은 가늘게 눈을 떴다.
눈을 따갑게 만드는 흙먼지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시현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무언가의 정체는 화살이었다.
사거리, 위력, 조작, 요구되는 편리함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총기가 있음에도 구시대 유물인 활은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내고는 한다.
특히, 총기를 소지하지 못한 소규모 세력의 참가자들이 주로 수제 활을 만들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뮤턴트는 다수의 총기를 보유한 세력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활을 사용하는가.
이유는 하나, 사용자의 권능이 활을 다루는데 특화되어 있을 경우뿐이다.
콰앙!
굉음과 함께 쳐 내듯 화살을 막은 시현의 오른팔이 크게 뒤로 꺾였다.
외피가 멀쩡함에도 화살은 시현의 오른손을 꿰뚫었다.
“망할……! 저주받은 무기인가!”
아찔한 고통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숨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화살을 뽑아내고 응급 처치를 하고 싶었으나 그 전에 먼저 이 화살을 쏜 인간을 처리해야 했다.
“윤시혀어어어언!”
자욱한 흙먼지 너머에서 분노에 찬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연달아 화살이 날아왔다.
시현은 핏빛 칼날로 화살을 쳐 냈다.
굉음이 울리고 핏빛 칼날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비명을 질러 댔다.
익숙하지 않은 손이라 그런지 몇 번이고 실수가 반복되며 몸에 하나둘 상처가 늘어났다.
황급히 자리를 옮겼으나 화살은 정확하게 시현이 자리를 옮긴 장소로 날아들었다.
흙먼지 탓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텐데, 마치 그런 장애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천리안의 보조를 받고 있나 보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 명중률이다.
“네가 모든 걸 망쳤어! 네가 모든 걸 망쳤다고!”
분노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분명 김해철이었다.
“거의 다 왔는데……. 내 승리가 코앞에 있었는데, 네가……! 전부 망쳐 버렸다고. 대체 무슨 권리로!”
“애새끼도 아니고 진짜……. 더럽게 칭얼거리네.”
자신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을 쳐 낸 시현은 핏빛 칼날을 땅에 박았다.
그리고 오른손에 박힌 화살을 거칠게 뽑아 버렸다.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을 무시한 채 시현은 고개를 크게 젖혀 날아드는 화살을 회피했다.
“강소하!”
“뭐, 왜!”
바로 지척에서 강소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커다란 차 뒤에 모습을 숨긴 채 기침을 하고 있었다.
시현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락 버튼 눌러.”
“어? 뭐?”
“모방.”
<아르하의 권능 ‘모방―4’가 발동됩니다.>
<낙인을 가진 대상이 지정되었습니다. 구원자 ― 강소하.>
<대상이 생존자일 경우 허가를 기다립니다.>
“와, 이건 또 뭐야.”
강소하는 몹시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시현이 요청한 대로 그는 수락 버튼을 눌렀고, 시현의 눈앞에는 강소하의 권능을 성공적으로 모방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시현의 심장을 화살이 꿰뚫었고, 시현의 육신은 붉은 피의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이건…….’
권능을 이용해 신체를 안개로 만드는 기술.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유용한 능력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써 보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머리는 어지럽고, 시야를 비롯한 오감이 9할 정도는 불량해졌다.
안개화를 해제한 시현은 강소하의 옆에 주저앉았다.
“너 대체 얼마나 연습했기에 안개화를 그 정도 수준으로 사용하는 거야?”
“연습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아, 열 받네. 너무 불공평하잖아.”
가만 생각해 보니 그 강소하가 연습 같은 귀찮고 힘든 일을 할 리가 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가졌다는 소리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네 권능은 대체 정체가 뭐야? 남의 권능을 베껴 쓰다니, 사기네.”
“그러니까 30억이나 썼지.”
“뭔 소리야?”
“어쨌든 나연이 찾아서 안전한 곳까지 벗어나 있어.”
다시 한번 안개화를 사용한 시현은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은 아직 어려웠으나, 방향을 정하고 쭉 나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몇 번이고 화살이 날아와 그를 관통했으나, 시현은 어떤 대미지도 입지 않은 채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윤시현!”
쓰러진 자동차 위.
그곳에 자리한 김해철이 이를 갈며 안개화한 시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각 기능을 대부분 상실한 게 원인인지, 아니면 짙은 흙먼지가 원인인지, 주변을 살펴봐도 천리안 사용자 정유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정유환에 대한 생각을 접어 둔 시현은 눈앞에 있는 김해철에게 집중했다.
“오랜만이야. 그때 받은 선물을 되돌려 주려고 왔다.”
“그때 뒈졌어야 할 놈이……!”
김해철이 뒤로 점프하며 화살을 쐈다.
자세가 불량한데도 김해철의 화살은 정확하게 시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연습을 상당히 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시현은 왼손을 휘두르는 간단한 행동으로 그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다.
시현의 왼손을 감싸고 있는 구울의 왼손.
그리고 맥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화살을 담은 김해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콰직!
시현의 오른손이 김해철의 명치를 가격했다.
으지직.
갈비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뼈 부러지는 감촉이 손을 터고 선명하게 전달됐다.
‘얕았어.’
내장을 죄다 으깨 버릴 생각으로 가한 공격이었는데, 상처 때문에 생각보다 힘이 약하게 들어갔다.
“끄아아아아!”
김해철은 피를 토하면서도 활시위를 당겼다.
승리를 거머쥐고야 말겠다는 각오보다는 자신이 죽더라도 시현을 죽이고 말겠다는 집념과 원한이 강하게 느껴지는 태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이미 굉장히 가까워져 있는 상황.
그가 시위를 놓기도 전에 시현의 손이 시위에 걸린 화살을 붙잡았다.
빼앗은 화살을 손 위에서 한 바퀴 굴린 시현은 화살촉이 아래로 향하게끔 화살을 쥐고는 강하게 내리꽂았다.
“끄아아아악!”
화살촉이 김해철의 가슴 한복판에 꽂히는 것과 동시에 주변을 장악하고 있던 흙먼지가 완전히 걷혔다.
건물이 붕괴했지만 김해철과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살아남은 구원자가 다수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연합군에 의해 대부분이 진압되었으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항쟁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소감이 어때?”
시현은 화살을 더욱 깊이 찔러 넣으며 말했다.
“젠장……. 붕괴 때문에 라미아가 절명하지만 않았어도…….”
자존심 때문인지 김해철은 피를 토하면서도 웃었다.
“나만…….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도 같이 죽는 거야.”
“믿고 있는 건 수해의 봉인인가?”
“…….”
김해철은 입을 다물었다.
매섭다 못해 흉악하기까지 한 눈빛을 보아하니 어지간해서는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시현은 속삭였다.
“그거라면 포기해. 너를 처리하면 바로 수해의 봉인을 해결하러 갈 거니까.”
“푸하하! 네가 무슨 수로?”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도 김해철은 폭소를 터뜨렸다.
비록 싸움에서는 패했으나 어떻게 해서든지 시현의 속을 긁어 놓고야 말겠다는 각오와 집념이 엿보이는 눈이다.
김해철 같은 인간은 웃으며 죽어서는 안 된다.
절망 속에서 절규하며 죽는 것이야말로 딱 어울리는 죽음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시현은 그의 도발에 어울려 주었다.
“잘 생각해 봐. 부산의 등대. 그들이 왜 굳이 부산을 떠나 인천까지 온 것 같아? 나야 인천연합과 동맹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인천에 왔다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메리트가 없거든.”
“맘껏 지껄여! 어차피 봉인이 깨진 그것을 네가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제 곧 이채연을 사도로 만든 그 존재가 네놈들을 지옥으로 인도할 거다!”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도중에 끊으면 안 되는 거 몰라?”
시현은 웃으며 화살 하나를 김해철의 허벅지에 꽂아 넣었다.
비명을 지르면 시현이 기뻐할 거라 생각한 김해철은 이를 악문 채 고통을 견뎌 냈다.
눈에 핏발이 서고, 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만큼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현은 화살로 김해철의 체내를 이리저리 헤집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부터 등대의 목적은 수해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거였어. 나도 기꺼이 거기에 협력하기로 했고. 문제는 네 말대로 이미 깨진 봉인을 어떻게 하느냐는 거야. 솔직히 말해 답이 없을 줄 알았는데, 결국 답은 있더라고.”
김영운은 시현을 향해 인류의 희망이라 말했다.
그러나 원작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어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깨진 봉인을 복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김영운의 예언을 의심했을 테지만, 시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해결책을 찾았다.
남들에게는 없고, 자신에게는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그 결과, 시현은 찾아내고 만 것이다.
김영운이 본 미래를 바꾸고 인류를 구할 수단을.
“헛소리! 개소리를 아주 정성껏 포장하는군.”
김해철은 피를 토하면서도 입꼬리를 말아 올렸고, 시현을 비웃었다.
그를 보며 시현도 마주 웃었다.
허리를 숙인 시현은 김해철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끄는 태초의 빛.”
“…….”
“아르하의 낙인.”
“……!”
김해철은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시현을 응시했다.
경악, 혼란, 분노, 그리고 좌절과 절망.
시현이 속삭인 두 개의 키워드를 조합한 김해철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오기와 자존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마, 말도 안 돼. 네가……. 네가……!”
“그러니까 네가 지옥에서 나와 만나려면,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그때는 친히 선배님이라 불러 주마.”
“아아……. 으아아아아!”
김해철은 절규했다.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시현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무의미한 짓이었다.
시현은 김해철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고, 끔찍한 소리를 내며 김해철의 목은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였다.
“우아아아아!”
타이밍 좋게 멀리서 누군가가 함성을 내질렀다.
승리를 알리는 함성이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