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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105화 (105/225)

[105화]

당황한 연합군 소속 전투원들의 저지를 가뿐하게 무시하고는 시현을 향해 달려오는 단발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이나연이다.

일부러 조명이 가장 밝고 눈에 띄는 장소에 자리한 보람이 있었는지 그녀는 헤매는 일 없이 곧장 시현에게 향했다.

그러더니 조금의 주저도 없이 시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뭐야.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 왜 연락 한 번 안 했어요! 오빠가 준 귀걸이가 깨져서 엄청 걱정했는데…….”

“미안.”

변명거리야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말해 봐야 이나연의 근심과 걱정만 늘어날 것이다.

여태까지 심적으로 고생했을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안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시현은 자신이 죽을 뻔했던 과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뭐야, 멀쩡하기만 하네. 괜히 왔어.”

이나연에게 여기까지 끌려온 강소하가 질색하며 말했다.

그 투덜거림마저도 반갑게 느껴졌다.

서울에서 인천까지의 여정 동안 꽤나 많은 괴물 쥐를 사냥했는지 강소하의 머리 위에는 자그마한 붉은 구슬 하나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반가운 두 남녀를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피었다.

인천으로 오고 있는 두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게 바로 시현이 예언된 미래를 회피하기 위해 선택한 결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 왔어.”

이로써 두 사람이 죽고, 세 사람이 도망간다는 최악의 미래를 회피했다.

남은 것은 언제까지나 요새에 틀어박혀 있으면 안전한 줄로만 아는 김해철과 그 일당들에게 요새가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라고 교육해 주는 것뿐이다.

* * *

김해철은 창 너머로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등대와 시청의 연합군이 아파트 단지를 쥐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포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네 사람이 있었다.

랭킹 1위 한소현.

예언자 김영운.

시청의 리더 정은수.

그리고 3레벨 구원자 윤시현.

하나만 해도 상대하기 벅찬 놈들이 무려 넷이나 있었다.

보통이라면 무조건적으로 항복을 선언했을 테지만, 뮤턴트는 다르다.

뮤턴트의 리더인 자신부터 시작해 잠시 머물다 갈 손님이기는 하지만 천리안 정유환도 있고, 이채연도 있다.

특히, 이채연의 경우 혼자서도 어지간한 세력은 풍비박산 낼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지하에는 라미아까지 있다.

얼마 전 이채연이 생포해 온 중형 악마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악마다.

며칠을 굶겼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일 터.

연합군이 온갖 방해를 뚫고 요새에 진입했을 때 풀어놓는다면 커다란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김해철과 이채연은 저주받은 무기까지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놈들이 소수 정예로 요새를 공략하려 든다 해도 요새의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면 충분히 막아 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적들이 먼저 공격을 해야 사용 가능한 것들이다.

지금의 상황은 예정이 없었다.

“왜 공격해 오지 않는 거야? 대체 왜! 설마 진짜로 우리를 굶겨 죽이려는, 비겁하고 치졸한 수를 쓰려는 건가?”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피가 나도록 손톱을 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창문에 비춰진 한껏 찌그러진 얼굴은 추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불안해?”

“으아악!”

갑작스럽게 들려온 음성에 김해철은 비명을 질렀다.

분명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생각할 게 있으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을 해 둔 터였다.

그런데도 방구석에 그녀가 있었다.

이채연.

그녀가 침대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할짝.

그녀가 자신의 손가락을 핥았다.

새빨갛게 물든 그녀의 소매에서 끊임없이 적색의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너 설마 입구에 있던 생존자들을 죽인 거야?”

“응, 비키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들어서.”

“이런, 젠장!”

그는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책상을 내려칠 생각이었지만 그랬다가는 피를 봐서 한껏 예민해져 있는 이채연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채연이라면 앞뒤 재지 않고 자신의 심장을 찌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말아 쥐었던 주먹은 얌전히 펼쳐져 무릎 위에 공손하게 자리했다.

‘미치겠군. 이래서야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한시라도 빨리 수해로 가서 치료를 받게 해야 하는데…….’

원래 이채연은 이런 성품의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의 사도가 되고 난 후 그녀는 변했다.

순수함의 결정체와도 같던 이채연이, 사람은 고사하고 악마를 죽이는 것조차 망설이던 그 이채연이 이제는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즐길 정도로 살인광이 되어 있었다.

정신 오염이란 한 사람의 근간을 바꿀 정도로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수해에는 정화의 권능을 가진 구원자가 있다.

그의 힘을 사용하면 이채연을 좀먹고 있는 정신 오염을 너무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그를 위해 연합군을 뚫고 요새를 벗어나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신 나간 짓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채연의 목소리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김해철을 호출했다.

무시하기에는 지금의 이채연이 너무 위험했다.

“바깥에 있는 놈들 때문이지, 뭐. 그보다 왜 온 거야? 혼자 생각할 게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

“나도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정유환이 너한테 대신 전해 달라 하더라고.”

“그게 뭔데?”

김해철은 반색했다.

정유환이 뛰어난 책사라 믿고 있는 김해철은 그가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타개할 기가 막힌 계책을 가져다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채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김해철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걱정했던 최악의 상황이라더라. 놈들이 지금처럼 며칠 밤낮으로 요새를 포위한 채 우리의 물자를 말리면 가망이 없다고……. 우리가 가진 물자로는 기껏해야 1주일? 아니, 5일이었나? 미안. 자세히 안 들어서 기억이 잘 안 나.”

“…….”

김해철의 두 눈이 갈피를 못 잡고 파르르 떨렸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간 김해철의 눈에 보이는 것은, 요새를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는 연합군의 전투원들이다.

저들이 저렇게 버티고 있는 한 요새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식량을 공수해 올 수 없고, 자신을 따르던 뮤턴트를 승리로 이끌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해? 어떤 게 최선의 수야?”

“정유환의 말로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며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정 안 되면 너랑 나, 그리고 정유환까지 셋이서 탈출한다. 그게 최선의 수래. 라미아를 풀어서 혼란을 주고 내 능력에 정유환의 권능이 더해지면 세 사람까지는 들키지 않고 탈출할 수 있으니까.”

“……알겠어.”

“정말 이해한 거 맞아?”

“알았다고!”

그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방적인 화풀이에 기분이 나빠질 법도 하건만, 이채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남겨진 김해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못 버려. 내가 어떻게 뮤턴트를 여기까지 키웠는데…….”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그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 * *

“이상하네.”

정유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윤시현이건, 한소현이건 박한을 죽였으면 Re write를 통해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알아차렸을 거야.”

다리를 꼬고 앉은 정유환의 손가락 끝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정유환의 집중력을 배가시켰다.

반쯤 감긴 차분한 눈은 정면에 있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보이는 것은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뿐이라지만, 창가에 서서 조금만 아래로 시선을 내려도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일 것이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무기를 든 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해.”

그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수상했다.

“수해의 봉인이 풀렸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보급을 차단하는 수를 쓴다고? 한시가 바쁠 텐데. 1분 1초가 아쉬울 텐데. 그런데도 며칠이나 걸리는 수를? 제정신인가?”

윤시현은 부족한 자원들을 가지고도 현무를 토벌하는 수를 고안해 냈다.

김영운은 예언자이며, 동시에 이미 증명된 바가 있는 유능한 책사다.

한소현도 수준이 미달이었다면 김영운과 등대를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유환은 그들 세 사람을 굉장히 높이 사고 있었다.

“그런 인간들이 같이 죽자는 식의 수단을 사용할 리가 없지. 분명 무언가가 있어. 그게 대체 뭘까…….”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정답을 유추하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정보의 양이 너무 적었다.

하다못해 박한이나 주도환.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살아서 정보를 전달해 줬다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1주일 정도를 번 건 좋은 일이야. 그 정도면 봉인을 완전히 깰 수 있어. 그렇게만 되면 Re write는 교단의 승리로 끝나겠지. 그나저나…….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김해철에게 조금 미안하네.”

찝찝한 마음을 억지로 날려 버린 정유환은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깊이 뉘였다.

그러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의식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인간이 가진 두 개의 눈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시각적 자료가 수집되기 시작했다.

천리안으로 요새 주변을 살피던 정유환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윤시현.”

* * *

계양동에 있는 아파트 단지, 통칭 요새.

이는 원작의 주인공 정훈이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패배를 승리로 뒤집은, 전쟁을 통해 얻게 된 이름이다.

끝을 모르는 낭떠러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통로는 단 하나.

유일한 통로는 성인 남성 둘이 어깨를 맞대야 겨우 통과할 정도인지라, 요새에서 공격이라도 들어오면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추락해 허무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낭떠러지의 경우, 폭이 그리 넓지 않아 2~3레벨 구원자라면 뛰어서 넘어갈 수도 있으며, 정 안 되면 판자 따위로 임시 다리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도중에 요새에서 요격이 있으면 꼼짝없이 낭떠러지로 추락.

그럴 경우 제아무리 고레벨의 구원자라 할지라도 영락없이 목숨을 잃게 된다.

때문에 해당 에피소드를 감명 깊게 읽은 참가자라면 누구나가 ‘아, 요새에 있으면 그 어떤 적이라도 막아 낼 수 있겠구나’라는 중대한 착각을 하게 된다.

실제 그런 뉘앙스로 묘사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요새가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준비 끝났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강소하가 말했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붉은 구슬은 조금 전보다 덩치가 더욱 부풀어 있었다.

“나연이는?”

시현의 질문에 이나연은 대답 대신 엄지를 치켜들었다.

시현 역시 준비를 끝마치고 한소현에게 사인을 보냈다.

신호를 받은 한소현은 방패를 손질하고 있는 여학생, 유서인에게 다가갔다.

“서인아, 시작하자.”

“리더가 함께 간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든든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환하게 웃은 유서인이 방패를 들고 앞에 섰다.

자그마한 체구의 유서인 뒤에 숨은 한소현은 언제라도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끔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자, 그러면…… 출발합니다!”

경쾌한 외침과 함께 방패를 앞세운 유서인이 내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요새로부터 유서인을 향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총알은 기본이요, 각종 사출형 공격이 유서인의 방패를 두드렸다.

“으으으으아!”

방패를 쥐고 있는 두 팔에 전해지는 강한 충격에 유서인은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자그마한 체구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밀려났다.

그러나 배후에서 한소현을 비롯한 구원자들이 든든하게 버텨 주고 있었기에 이전처럼 낭떠러지 쪽으로 밀려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요새의 공격이 두 여성에게 집중되고 있는 사이, 시현은 요새의 동쪽으로 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요새의 동쪽으로는 창문이 뚫려 있지 않다.

“창문은 없지만 그만큼 옥상에 있는 인원이 동쪽 방면의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을 거야. 외피가 뚫릴 수도 있으니 엄폐물을 잘 활용해야 해.”

달리는 와중에 내려진 시현의 지시에 강소하는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무리 경계를 철저하게 하고 있다 해도 이렇게 주변이 어두운데, 적들이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합류를 기다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소모한 결과, 어느덧 주변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거리에 빛이 모자라다 보니, 밤눈이 어두운 사람이면 바로 앞에 있는 사람조차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어둡다.

“뭐야. 지금 오빠를 의심하는 거야?”

강소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나연이 강소하를 사납게 노려봤다.

화들짝 놀란 강소하가 필사적으로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다는 거지. 어휴, 뭔 말을 못 하게 하네.”

강소하의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만약 밤눈이 어두웠다면 앞으로 내민 자신의 손조차 분간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주변은 어두웠다.

이런 어둠 속에서 본대와 떨어져 몰래 행동하는 세 사람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시현의 생각은 달랐다.

“저쪽에 천리안이 있어. 그 정유환이 내 움직임을 놓칠 리가 없고.”

타앙!

“어억!”

강소하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옥상에서 쏘아진 총알 한 발이 정확하게 강소하의 머리에 날아들었다.

외피 덕에 부상은 없었지만 심리적 충격 때문인지 강소하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거 봐.”

피식 웃은 시현은 강소하를 일으켜 세우고는 속도를 높였다.

주어진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시간을 끌면 외피를 가진 세 사람을 요격하기 위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구원자들이 동원될 테니까.

그렇게 목표 지점에 도착한 시현은 요새를 샅샅이 훑었다.

‘아무리 폭풍에 강소하의 권능을 섞는다 해도 요새를 붕괴시킬 수는 없어. 하지만…….’

시현은 웃었다.

탐색 끝에 결국 찾아내고 만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요새의 균열을.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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