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이쪽입니다!”
멀리서 들리는 김영운의 외침에 시현은 도로 위를 달렸다.
6차선 도로 한복판에 쭈그리고 앉은 김영운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손으로 도로 위를 훑고 있었다.
그곳에 돌을 깎아 만든 괴물 쥐의 머리가 있었다.
고개를 들면 돌로 만든 괴물 쥐 석상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앞으로 이어지는 도로 곳곳에 흔적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드디어 흔적을 찾았어요. 예상대로 놈들은 서울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목적지는 역시 교단이겠죠.”
“흔적을 지우기보다는 빠르게 교단과 합류하는 걸 선택한 모양이군요.”
“음……. 시현 씨, 교단은 어느 정도로 강합니까?”
김영운의 질문에 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대충 김영운 씨 정도 되는 사람이 수십은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천리안을 통해 서울과 인근 지역의 인재들을 싹쓸이한 교단이다.
원작에서도 난다 긴다 하는 구원자들이 모여 있는 교단이라면 인천연합, 교단, 호텔의 연합군과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리더한테 위치를 보고하기는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김해철은 둘째 치고 이채연이 교단에 합류하면 일은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이동하도록 하죠.”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어요. 제 생각에는……. 이채연이 일부러 흔적을 남긴 채 이동한 것 같습니다. 천리안 그 영악한 자식과 함께 또 무언가 함정을 팠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달리 방법이 없는데.”
때로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위험에 봉착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김영운도 더 이상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흔적을 따라 10분 정도 달렸을 때, 시현은 괴물 쥐가 아닌 또 다른 석상과 맞닥뜨렸다.
“…….”
숨이 턱 막혔다.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머리가 멍해지고,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김영운의 목소리조차 굉장히 멀게만 느껴졌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언저리부터 치고 올라왔다.
“……아는 사람입니까?”
시현의 반응을 보고 무언가를 느낀 김영운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인 시현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뿌옇게 흐린 시야 너머로 주인을 잃고 버려져 있는 깨진 귀걸이가 보였다.
* * *
“여기까지가 지난밤 제가 본 미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계획대로 움직일 시 요새의 공략에는 성공하지만, 김해철을 비롯한 수뇌부의 확보에는 실패한다 이 말이군요.”
거기까지 말한 시현은 침묵했다.
김영운의 예언은 정확하다.
즉, 지금 이대로 요새의 공략이 시작되면 틀림없이 뮤턴트의 수뇌부를 놓치게 된다는 소리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유환, 이채연, 그리고 김해철은 반드시 처리해야 할 대상이다.
‘게다가 이대로는 나연이까지 위험해져.’
자신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소식을 진즉에 서울에 전하지 않은 게 이 사태의 원인이었다.
지금쯤 이나연은 강소하와 함께 인천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로서는 두 사람과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었다.
호텔이 보유한 무전기의 개수가 세 개뿐이다.
하나는 시현이 가지고 있고, 하나는 호텔에 있는 연락 담당이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경비조가 돌아가며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지금 무전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답답하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직 늦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비 효과라는 말처럼 사소한 선택으로도 미래는 바뀌기 마련이다.
이채연과 정유환이 생존하고, 이나연과 강소하가 죽는 미래도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작전 지역을 벗어나 두 사람을 마중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현재 등대와 시청을 묶어 주는 건 시현이라는 존재다.
정은수는 시현 때문에 등대와 손을 잡고 있고, 한소현은 오로지 시현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며 시청을 돕고 있었다.
만약 시현이 자리를 이탈한다면 정은수는 시청으로, 한소현은 시현을 따라 움직이거나 수해로 향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
“아무래도 어제 세운 작전부터 재검토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해철을 비롯한 세 사람이 살아서 요새를 빠져나갔다는 것은 계획에 하자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어제 밤을 새웠는데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군요.”
김영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시현과 김영운, 한소현과 정은수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요새 탈환 계획을 세웠다.
밤이 깊어지도록 의견 교환은 멈추지 않았으며, 결국 날을 새우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계획을 갈아엎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아깝다고 해서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계획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두 사람이 요새에서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있나요? 상대가 안 될걸 알고 진즉에 요새를 버리고 달아났을 수도 있잖아요.”
“없습니다.”
시현의 질문에 김영운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의심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천리안만큼은 아니지만 저희에게도 감시에 특화된 권능을 가진 구원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10분 전, 세 사람이 요새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저렇게까지 확신을 담아 말하니 시현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을 찾아봐야겠군요.”
“인원 편성을 한 번 바꿔 볼까요? 정문 쪽에 인원을 조금 빼서 다른 곳에 보강하는 거죠. 그렇지 않아도 여기 동쪽에 배치된 인원이 조금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어요.”
“그 반대입니다. 지금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새의 동쪽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 배치된 인원도 과하다 싶을 정도예요. 차라리 동쪽의 인원을 빼서 정문과 다른 방향의 병력을 보강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래서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없어요. 아, 신기루 권능을 가진 구원자에게 부탁해 기만 작전을 사용하는 건 어떨까요?”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천리안이라면 신기루 정도는 간파할 수 있을 겁니다. 괜히 허점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겁니다.”
“그놈의 천리안…….”
“차라리 대량의 화약을 이용해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정은수 씨에게 소지한 화약이 어느 정도 되는지 한번 물어보도록 하죠. 하지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리 군부대가 연합 소속이라지만 화약을 함부로 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아니요, 역시 됐습니다. 저희 괜한 고생은 삼가도록 하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그럴싸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시현, 한소현, 김영운, 정은수. 이렇게 네 사람이 날을 새워 가며 네 사람이 서로 의견을 교환한 결과 완성한 게 이번 작전이다.
이제 와서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댄다 해도 이보다 나은 작전이 만들어질 리가 없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한 시간이 흘렀다.
요새를 감싸는 포위망은 얼추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간헐적으로 총소리가 울렸다.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악마가 작전에 방해되지 않도록 사전에 처리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요란하게 움직이는데, 요새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가끔씩 창문을 통해 망원경을 든 생존자가 얼굴을 보였다가 사라지는 게 전부였다.
“저라면 아직 포위망이 형성되지 않은 지금 뛰어나와서 공격했을 텐데. 저놈들도 참 태평하네요.”
시현과 같은 것을 본 김영운이 말했다.
“그만큼 요새의 성능을 믿고 있는 거겠죠. 아마 가지고 있는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을 겁니다.”
“시간이 많으면 저들의 식량을 고갈시키는 전략을 선택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저희는 수해의 봉인인지 뭔지도 확인해야 하니까요.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죠.”
“그렇죠. 마냥 기다릴 수는……? 잠깐만요. 기다린다?”
갑작스레 던져진 새로운 키워드에 머리가 맑아졌다.
마치 오랜 먹구름이 걷히고 해가 드러난 것처럼 말이다.
시현은 자꾸만 떠오르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김영운 씨, 찾았습니다.”
“네? 찾다니요. 그게 무슨……. 설마!”
“미래를 바꿀 수 있으며 인명 피해도 줄일 수 있는 작전이요.”
* * *
오전 11시.
기존의 계획대로 포위망은 완성되었다.
남은 건 계획대로 요새를 향해 공격을 퍼부으며, 방어에 특화된 구원자가 선두에서 길을 뚫어 요새 내부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 개시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뭐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조금 늦어지는 것뿐이겠지.”
전투원들이 수군거렸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틀어질 수도 있는 게 인생인지라, 전투원들은 느긋하게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약 10분 후 하달된 명령에 전투원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대기? 그냥 대기하라고? 우리 리더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뭐야. 너는 돌입조 아니었어? 왜 여기로 와?”
“몰라. 돌입은 없을 거라면서 포위망 형성에 합류하라던데.”
“거참…….”
전투원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착실히 명령을 따랐다.
1시간.
2시간.
그렇게 무려 반나절이 지나 하늘에 노을이 걸렸음에도 추가 명령은 하달되지 않았으며, 전투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대기, 그리고 요새를 향한 경계뿐이었다.
지친 누군가가 자리를 이탈해 설명을 요구할 법도 하건만, 그 누구도 지정된 자리를 떠나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자신들의 리더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무한한 신뢰로 인한 과도한 충성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리더, 언제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어야 함? 그러지 말고 내가 먼저 돌격해도 될까? 나 자신 있음!”
머리카락을 묶어 올린 여학생이 폴짝폴짝 뛰며 한소현에게 매달렸다.
여학생의 등에는 제 몸만 한 크기의 진압 방패가 매여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커다란 거북을 보는 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김영운이 시간만 끌면 된다고 했으니까.”
“김영운이요?”
여학생은 잡아먹을 기세로 김영운을 노려봤다. 지독한 경쟁의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현과 이야기를 나누던 김영운이 시선을 알아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서로 시선이 마주치자 김영운은 혀를 찼고, 여학생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등대의 생존자들도 마냥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네요.”
“등대의 문제라기보다는 저 문제아가 문제죠.”
“다 들리거든? 대머리!”
“이 머저리 미숙아가!”
유치한 방법으로 서로를 조롱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김영운을 향해 욕을 하던 여학생은 한소현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리더, 그러지 말고 나를 보내 주셈. 저 대머리의 예언에 꼭 따를 필요는 없다고 한 건 리더잖아.”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럴 때 써먹으라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한숨을 내쉰 한소현이 슬쩍 김영운을 응시했다.
그에 김영운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어?”
한소현의 질문에 여학생은 뛸 듯이 기뻐했다.
“물론 자신 있음. 나는 등대의 방패니까.”
“그렇다면 가서 길을 열어 줘.”
“알았음!”
활짝 웃은 여학생은 진압 방패를 앞에 세우고 요새를 향해 돌격했다.
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끝을 모르는 낭떠러지에 둘러싸인 요새.
그 유일한 골목을 여학생은 신중하게 걸었다.
“가만 보고만 있을 겁니까?”
시현이 김영운에게 질문했다.
시현의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투원들이 전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
여학생과 함께했어야 할 진입조는 현재 해산되어 포위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데 동원되었다.
즉, 지금 여학생의 행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에 목숨을 올려놓고 도박을 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그걸 알면서도 김영운은 사악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유서인, 저 미숙아는 좀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릴 겁니다. 으흐흐.”
“…….”
시현은 김영운을 외면했다.
등대에도 외부인에게는 말 못 할 인간관계가 얽혀 있구나, 그리 생각하며 말이다.
김영운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여학생이 그리 길지 않은 길목의 약 절반에 이르렀을 때.
타앙!
총성이 울렸다.
총알은 여학생의 머리에 명중했으나 외피까지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뭐야. 안에 있으면서 왜 손님이 와도 마중을 안 나옴?”
씨익 웃은 여학생은 머리를 숙이고 방패에 몸을 완전히 숨긴 채 본격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총을 가진 생존자들이 상체를 내밀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하려는 여학생을 향해 사정없이 총을 쏴 갈겼다.
권능을 담은 방패가 깨지는 일은 없었으나, 방패를 사정없이 때리는 충격에 여학생의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게 뭐야. 짜쯩 남!”
물론 연합군이라 해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엄호.”
“대응 사격 개시!”
한소현의 짧고 카리스마 있는 한마디와 정은수의 우렁찬 외침에 아군도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사격을 시작했다.
머릿수에서 차이가 있다 보니, 사격전은 금세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
뮤턴트의 전투원들이 머리를 숨긴 사이, 여학생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었다.
조금만 더 하면 요새의 정문이 손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학생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쏘아진 섬광이 여학생의 방패를 덮쳤다.
“어, 엄마야아앗!”
섬광은 방패를 뚫지 못했지만 강한 힘으로 여학생을 밀어냈다.
어떻게든 버텼으나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던 여학생의 발끝이 낭떠러지에 걸쳤다.
요새로 이어지는 길목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건장한 체구의 남성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겨우 건널 수 있는 정도.
그냥 건너면 크게 위험할 건 없지만, 지금처럼 요새로부터 온갖 방해가 들어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색이 된 여학생이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앞으로 내달린 한소현이 여학생의 뒷덜미를 잡고 안전지대까지 퇴각했다.
“후아……. 떨어질 뻔했다. 리더, 나 방금 진짜 죽을 뻔했음.”
진심으로 겁을 먹었는지 여학생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런 여학생을 보며 김영운은 폭소했다.
“푸흐흐흡!”
“아, 짜증 남.”
견원지간이 따로 없었다.
원작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김영운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에 시현은 신선함마저 느꼈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함?”
분을 삭인 여학생의 질문에 김영운은 시간을 확인했다.
“음……. 앞으로 10초?”
“……뭐?”
“뭐.”
“뭐!”
두 사람이 의미 없는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김영운이 말한 10초가 흘렀다.
정확하게 김영운이 예언한 시간이 되자 배후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