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이른 아침.
시청과 등대 연합군은 요새에 도착했다.
“전원 하차!”
“신속하게 움직여!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고성이 오가며 구원자와 전투원들은 각자 맡은 자리로 이동을 시작했다.
머지않아 요새는 물샐 틈 없는 포위망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시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오전 8시.
작전 시간은 오전 11시.
앞으로 세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1분 1초가 귀한 지금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등대는 수해로 가겠어.”
시현이 간밤에 얻은 정보를 전달하자 한소현이 대뜸 등대의 이탈을 선언했다.
당연하지만 정은수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러시면 굉장히 곤란합니다. 등대의 조력 없이 시청의 인원만으로는 요새의 포위망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그의 주장은 타당했다.
단순히 시청과 뮤턴트의 전력만 놓고 보면 시청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뮤턴트에 다수의 참가자가 소속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게 시청과의 전력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예부터 전쟁의 승패가 늘 머릿수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형, 전략, 환경 등 다양한 요소가 가미된다면 어느 정도의 머릿수는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게 전쟁이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요새의 지형은 수적 우위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그 피를 최소한으로 억제해 주는 것이 바로 한소현의 권능이며, 등대는 외부에서 요새를 뒤흔들 정도의 화력을 갖춘 얼마 안 되는 세력이다.
더군다나 이번 작전의 목적은 단순히 요새를 탈환하는 게 아니다.
김해철, 정유환, 이채연을 비롯한 뮤턴트의 수뇌부를 하나도 빠짐없이 붙잡는 것.
그를 통해 후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게 진정한 목표다.
포위망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수뇌부가 요새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소현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가 부산에서 인천까지 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종말을 막기 위함이야. 종말의 코드가 무엇인지 확실시된 지금 헛된 곳에 시간과 인력을 낭비할 수는 없어.”
그런 한소현을 비난할 수도 없는 게, 등대는 어디까지나 일방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 한들, 등대가 이득을 보는 건 없다.
때문에 정은수는 보다 적극적으로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정은수를 대신해 한소현을 설득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예언자 김영운이었다.
“리더, 어차피 수해의 봉인을 깬 뮤턴트는 요새에 있잖아요. 분명 그것의 사도 또한 요새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 요새를 먼저 점령하는 게 맞아요.”
“하지만 만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리더가 잊고 있는 거 같아서 말해 주는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김영운은 목소리 톤을 낮췄다.
“구원자는 당신이 아닌 윤시현 씨일 거라 생각합니다.”
“…….”
한소현은 입을 다물었다.
이번 예언의 주인공은 한소현이 아닌 시현이었다.
잠깐 동안 시현을 바라보던 한소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마디 말로 한소현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김영운이 시현에게 다가왔다.
“시현 씨,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말씀하시죠.”
김영운의 표정이 굉장히 진지했기에 시현 역시 느슨해진 긴장의 끈을 잡아당겼다.
심호흡을 마친 김영운은 주변을 살피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있는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할 예정입니다.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부디 이 반지를 유품으로…….”
“…….”
“하하! 분위기가 너무 무거운 거 같아서 농담을 좀 해 본 건데,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거 같네요.”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던 김영운은 이번에야말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실 어제 꿈을 꿨습니다. 아무래도 시현 씨에게는 말씀을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꿈이라면…….”
시현의 눈썹이 크게 움찔거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꾸는 꿈이 뭐 그리 대수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김영운은 꿈을 통해 미래를 보는 예언자다.
그가 꾸는 꿈은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미래에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기에 시현은 그의 꿈을 허투루 취급하지 않았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그게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김영운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시작했다.
“사실…….”
* * *
“꺄아아아!”
이나연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답지 않게 여린 비명 소리에 놀란 강소하가 발작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젠장, 몰래 숨어서 게으름 부리던 게 들켰나?’
천성이 게으른 강소하에게 리더인 윤시현으로부터 사실상의 전권을 받은 이나연은 굉장히 꺼려지는 존재였다.
강소하는 주변을 살폈다.
늦잠을 자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발길이 최대한 뜸한 곳에 숨어서 잠을 청했는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이나연의 숙소 근처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안 좋아. 여기서 최대한 멀어져야 해. 그게 내 유일한 살길이다!’
그는 살금살금 방을 나갔다. 다행히도 복도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다 싶어 도망가려던 찰나.
“강소하.”
옆방의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등장했다.
“오우…….”
강소하는 한 줄기 식은땀을 흘렸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에게서 희미하게나마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시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딱 그때의 이나연이다.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확실히 살기의 농도가 약하다.
“아니야. 나 놀던 게 아니라 일하고 있었어. 이 방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보고가 있어서 확인을 해 봤는데, 아무 일도 없더라.”
“따라와.”
“…….”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괜히 저항하다가 어디 하나 잘려 나갈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강소하는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 전 2레벨 구원자가 되기는 했지만, 천살성을 다루는 이나연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연 씨! 안녕하…… 히익!”
“나연아, 좋은 아침……이 아니라, 죄송합니다앗!”
복도에서 마주친 생존자들이 기겁하며 달아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야, 눈 마주치지 마. 억울하게 살해당할지도 몰라.”
“그날 이후 잠잠하더니, 왜 또 저래?”
생존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강소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제 딴에는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듯한데, 구원자의 날카롭고 민감한 감각들은 그들의 수군거림을 죄다 잡아내고 있었다.
‘제발 입 다물어.’
강소하가 눈치를 주자 그제야 생존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도 이나연은 그 자리에서 폭주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얼마 전 구해 온 차량을 제 취향에 맞게 개조하고 있는 김선빈이 있었다.
“아, 누나. 어서 오…… 흐억!”
이나연과 눈이 마주친 김선빈의 입가에서 반가운 미소가 사라졌다.
벌벌 떨면서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없던 죄마저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내는 위압감이었다.
“이 차 사용할 수 있어?”
“넵, 그러하옵니다.”
“열쇠는?”
“여기 대령했습니다.”
차 키를 받아 든 이나연이 강소하에게 그것을 줬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강소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기까지는 얌전히 따라왔지만, 더 이상은 문제가 커진다.
“어딜 가려는 건데?”
“인천. 그 요새인지 뭔지 하는 곳에 가 봐야 해.”
“요새라면 윤시현이 향한 곳인가? 뭐 당장 와 달라고 무전이라도 온 거야?”
“무전이 안 돼. 조금 전부터 계속 해 보고 있는데 무전이 안 된다고. 게다가 이거.”
이나연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가운데 박아 놓은 노란색 보석이 보기 흉할 정도로 깨진 귀걸이였다.
“만약 무전을 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이걸 깨뜨리면 상대방에게 신호가 가는 물건이라고 오빠가 내게 준 거야.”
“……깨졌네?”
“오빠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해.”
그제야 강소하는 이나연의 돌발 행동이 이해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만남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알 수 있을 만큼 이나연은 윤시현에게 헌신적이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사람이 저 정도까지 할 수 있구나, 몇 번이나 감탄했을 정도다.
그런 이나연이니, 무전이 안 되는 상황에서 만약을 위해서라며 준 귀걸이까지 깨졌다면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잘 억누르고 있던 살기가 새어 나온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해와 행동은 별개다.
“다 좋은데, 왜 나까지 데려가려는 거야?”
“지금 운전대를 잡으면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사고가 날 거 같아서.”
“운전수가 필요한 건 알겠는데, 왜 하필 그게 나냐고. 나보다는 여기 있는 김선빈이 운전 더 잘하잖아. 게다가 난 맡은 바 소임이 있다고. 경비 팀 조장이라는 막중한 사명 말이야.”
“어차피 넌 밑에 사람들한테 다 떠넘기고 일도 제대로 안 하잖아.”
“…….”
맞는 말이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괜히 먼 산을 보며 입맛만 다시고 있으려니, 이나연이 쐐기를 박아 넣었다.
“게다가 김선빈을 데리고 갔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오빠한테 문제가 생길 정도로 위험한 곳인데.”
“난 죽어도 되고?”
“그리 죄책감은 없을 것 같네.”
“…….”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첫인상과 더불어 게으른 성품 때문에 자신에 대한 취급이 그리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울컥한 강소하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시간 없어.”
조수석에서 향해지는 싸늘한 시선이 그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무슨 눈이 저리 살벌하냐.’
결국 강소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운전석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제어할 수 있는 건 윤시현뿐이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을 얻은 채 말이다.
두 사람이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해는 막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인천 근방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는 노을이 걸려 있었다.
“으아아아! 또 길이 막혔어! 이 정도면 인천으로 가지 말라는 신의 계시 아니야?”
도로를 틀어막고 있는 건물의 잔해에 화가 치민 강소하가 운전대를 내려쳤다.
물론 운전대가 부러지지 않게끔 힘 조절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이제 어쩔 거야? 이래서야 한참은 돌아가야 하겠는데. 그러다가는 해가 질걸?”
“으음…….”
조수석의 이나연은 지도와 씨름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길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무너진 건물 잔해와 위험한 악마의 둥지, 버려진 폐차로 인한 교통 방해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극히 제한적이다.
길이 막힐 때마다 지도에 X 표시를 해 두다 보니 지도는 굉장히 지저분해져 있었다.
“이쪽.”
고민하던 이나연이 볼펜 끝으로 아직 X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경로를 가리켰다.
“여기만 더 확인해 보고 안 되면, 오늘은 적당히 쉴 곳을 찾아보자.”
“이래서 부지런한 인간은 질색이라니까. 원래 이런 건 내일부터 열심히 하는 게 정석 아니야.”
투덜거리면서도 강소하는 이나연이 가리킨 장소를 향해 차를 돌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번에 고른 길은 누가 대대적으로 청소를 마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뻥 뚫려 있었다.
“됐다.”
간만에 이나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오래지 않아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저 멀리, 도로의 사거리 부근에서부터 무리 지은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찍!]
[찍찍! 찍!]
사람의 머리통만 한 크기를 지닌, 굉장히 흉측하게 생긴 커다란 쥐였다.
통칭 괴물 쥐라 불리는 악마다.
기껏해야 소형 악마로 보이지만, 그 수가 족히 백은 넘어 보였다.
“이런……. 차 돌린다!”
강소하의 판단은 빨랐다.
즉시 핸들을 돌려 U턴한 후, 차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다행히도 악마의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차와 괴물 쥐 무리와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찌지지지직!]
[찍찍! 찌익!]
“어우, 뭐가 이리 시끄러워?”
배후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에 강소하가 소리쳤다.
“강소하.”
“왜! 정신없으니까 말 걸지 마!”
“저 쥐들 뭔가에 쫓기고 있는 거 같지 않아?”
“엉?”
그제야 강소하는 곁눈질로 백미러를 확인했다.
이나연의 말대로 괴물 쥐는 무언가에 쫓기듯이 다급해 보였다.
앞에서 달리는 차량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으며, 달리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뭐에 쫓기고 있는 걸까?”
“저놈들을 먹이로 삼는 중형 악마 아니겠어?”
“그런가?”
호기심을 느낀 이나연은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괴물 쥐 무리를 살폈다.
[찌익!]
선두에서 달리던 괴물 쥐 하나가 무언가에 짓눌려 짜부라졌다.
“……뱀?”
이나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괴물 쥐 무리를 뒤쫓고 있는 것의 정체는 커다란 검은색 뱀이었다.
멀리서도 족히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뱀의 머리가 있어야 할 장소에는 여성의 상반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악마인데. 라미아…… 같은 건가?”
그 순간, 뱀 여성과 이나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주 잠깐이지만 뱀 여성의 눈이 붉게 빛났다.
“……어?”
그 순간 안구에서 미약한 통증과 동시에 손끝에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자신의 손을 확인한 이나연은 크게 헛숨을 삼켰다.
그녀의 손끝이 서서히 돌로 변하고 있었다.
그제야 상대가 굉장히 위험한 악마라 판단한 이나연은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강소하. 속도를 높여!”
눈의 고통이 더욱 심해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석화가 진행되는 손은 더 이상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악마에게서 멀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차량의 속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강소하! 너 도대체 뭐 하는…….”
운전석에 앉은 강소하의 멱살을 잡은 이나연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강소하의 몸이 돌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백미러에 향해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저 악마와 눈을 마주쳤구나!’
이나연은 이를 갈았다.
점점 속도를 줄인 차는 이내 멈춰 서고 말았다.
조수석에서 뛰어나간 이나연은 정면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몇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그녀는 쓰러지고 말았다.
두 다리가 돌로 변한 것을 확인한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