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녀와 눈이 마주친 정유환은 입을 쩍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채연 씨. 눈이…….”
그제야 이채연은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무표정하고 죽은 사람처럼 하얀 피부라 그런지 피처럼 붉게 물든 눈동자가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죽여라.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언젠가부터 머릿속에 들려오던 목소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유환의 제안에 따라 검은 수해에 다녀온 그날 이후, 이 목소리는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울리며 그녀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리고 이채연은 그 목소리에 저항하지 않았다.
“누구를?”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하의 아이.
“……?”
그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그랬기에 목소리의 지시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수 없다.
천만다행이도 그녀의 곁에는 그것을 함께 고민해 줄 어리석고 충실한 인간들이 있었다.
“아르하의 아이를 죽여야 해.”
“설마 목소리가 들린 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해철이 기쁘다는 듯 활짝 웃었다.
“야, 정유환. 목소리가 들렸다는 건 완성 단계라 봐도 무방한 거겠지?”
“그래, 하지만 아르하의 구원자라면 윤시현밖에 없잖아? 어째서 그 이름이 나왔는지는 모르겠군.”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정유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이채연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는 거야. 왜 ‘인간을 죽여라’라든가 ‘구원자를 말살해라’ 같은 지시가 아니라 윤시현이라는 개인을 콕 집어서 말했냐는 거야. 그래서야 마치…….”
윤시현이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정유환의 뒷말을 예측한 김해철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히 이채연에게 향했다.
검은 수해에서 특별한 힘을 얻은 이채연이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적 관측에서였다.
그런데 이채연은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꿈을 꿨어.”
“그게 뭔 개소……. 흐읍!”
미간을 찌푸린 채 욕설을 토해 내려는 김해철의 입을 정유환의 손이 틀어막았다.
철천지원수를 보듯 김해철을 흘긴 정유환이 이채연의 앞에 자리하고 앉았다.
“무슨 꿈을 꿨어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원래 꿈은 깨어나면 잘 기억 못 하는 거잖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그것과 정신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사도입니다. 그런 당신이 꾼 꿈이 그냥 평범한 개꿈일 리가 없어요.”
이채연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귀찮기는 했지만 정유환의 말이 지금까지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눈을 감고 가만히 고민하던 이채연은 가까스로 간밤에 꾼 꿈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윤시현, 그 남자가 커다란 십자가를 거꾸로 든 채 갓난아이를 짓밟고 있었어.”
“……?”
기괴하기 짝이 없는 꿈 내용에 정유환은 크게 당황해했다.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던 김해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개꿈이 맞는 거 같은데.”
* * *
“그러니까 네 말을 정리하자면, 수해의 어딘가에 정화의 권능을 가진 참가자가 있다 이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시현의 말에 주도환은 단 1분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즉답했다.
불과 십여 분 전만 해도 시현을 향해 맹렬한 적의를 보이던 주도환이건만, 지금의 그는 충실한 심복을 보는 듯했다.
만약 주도환에게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지금쯤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축 늘어져 있거나.
“정화, 정화라…….”
미간을 찌푸린 시현은 들고 있던 피 묻은 단검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생각할 게 많아졌기 때문에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정화라니. 들어 본 적 없는 권능이네. 원작에는 없었던 종류의 권능이야.”
여러 차례 권능을 사용한 까닭에 미미한 두통을 호소하던 한소현이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정화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권능이다.
그러나 원작에 묘사되지 않은 권능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시현이 가진 이자프의 권능 또한 원작에 묘사되지 않은 권능 중 하나이니까.
“정신 오염을 해결할 수 있는 권능……. 확실히 그런 게 있으면 박한이 저주받은 장비를 사용한 이유가 설명되네요.”
저주받은 장비는 뛰어난 성능을 가졌다.
같은 등급이라 해도 상점에서 구매한 장비나 둥지 점령의 보상으로 얻는 장비보다 월등하다 말할 정도다.
무엇보다 외피를 침식해 제거하는 성능은 누구나가 탐낼 만한 기능이다.
정신 오염이라는 단점만 아니라면, 타 장비에 비해 무엇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다.
하지만 정화의 권능이 있으면 그 정신 오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박한뿐 아니라 야망이 있는 참가자라면 누구나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현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만 하시지요. 제가 아는 내용이라면 성심성의껏 거짓 하나 없이 진실만을 대답하겠습니다. 헤헤.”
주도환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비볐다.
자존심 따위는 내다버린 지 오래였다.
지독한 공포와 고통 앞에서 자존심은 불필요한 감정일 뿐이었으니까.
“뮤턴트나 김해철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신가요? 아니면 시현 님이 인천에 친히 강림하시기 전에 합류한 책사 놈에 대한 것을 말씀드릴까요?”
“그쪽도 궁금하기는 한데 나중에 듣도록 하고. 일단은 그 정화에 대해 말해 봐. 정화를 사용하면 감염자들도 치료할 수 있어?”
시현은 정화에 대해 설명을 듣던 중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어쩌면 정화가 정신적 부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몸에 침투한 악마의 세포마저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하는, 희망에 찬 가설 말이다.
“감염자라면……. 악마에 의해 상처를 입은 생존자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그렇지 않아도 박한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정화 사용자에게 실험을 요구했습니다.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안타깝지만 직접 수해에 들어가 그를 만나는 수밖에는…….”
말을 하는 주도환의 시선은 연신 시현이 내려놓은 단검에 꽂혀 있었다.
시현이 완벽하게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하지 못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이 정화의 권능으로 가득한 시현의 관심은 이미 주도환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만약 정화의 권능이 감염자마저 회복시킬 수 있다면…….’
가만히 눈을 감으면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따위 지옥과도 같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결국은 살아남지 못한 자들.
악마에 의해 상처를 입고 점점 하수인으로 변모하는 와중에도 살고자 했던 자들.
그렇기에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이재현의 얼굴이 있었고, 미처 구하지 못했던 이서윤의 얼굴도 있었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위도 없겠지만, 무슨 수를 써도 잊지 못할 과거란 있는 법이다.
“윤시현.”
나긋나긋한 음성이 시현을 불렀다.
잡념을 걷어 내고 눈을 뜨니 한 뼘 더 가까이 와 있는 한소현의 얼굴이 보인다.
“정은수 쪽 일이 끝난 거 같으니, 우리도 슬슬 끝내야 하지 않을까?”
한소현이 가리키는 곳에는 정은수가 서 있었다.
두 남녀가 주도환으로부터 정보를 뽑아내는 사이 정은수는 시청의 장악을 끝마쳤다.
애초에 정은수를 따르는 사람이 과반수였기에 시청을 장악하는 것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은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때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마저 수용하려 했다.
“나 역시 그들을 한번 배신했으니까요.”
―라는 게 정은수가 제시한 이유였다.
그런 이유로 시간은 제법 들었으나 정은수는 잠시나마 뮤턴트의 편으로 돌아섰던 생존자들의 마음까지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시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신현수가 없고, 내전으로 수가 조금 줄어들기는 했지만 원래 있어야 할 시청으로써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남은 건 요새를 장악하고 있는 뮤턴트의 잔당을 청소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전에 마지막으로 알아내야 할 정보가 하나 있었다.
시현은 평소보다 더욱 싸늘한 시선으로 주도환을 응시했다.
“헤헤헤.”
눈이 마주치자 주도환은 땀을 삐질 흘리며 어색하게 웃는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어떤 질문을 하던 거짓을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시현은 입을 열었다.
“이한울이라는 이름에 대해 알고 있어?”
“……!”
시현의 질문에 주도환은 크게 당황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열심히 눈알을 굴려 댔으나, 시현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단번에 백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머뭇거리는 주도환의 시선이 정은수에게 향했다.
참가자인 세 사람과 달리, 정은수는 어디까지나 Re write의 등장인물이다.
등장인물에게 Re write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게 되면 참가자는 큰 피해를 입게 되며, 해당 등장인물은 정신적으로 붕괴하게 된다.
즉, 주도환이 정은수에게 시선을 줬다는 것은, 지금부터 꺼낼 말이 Re write와 관련된 내용이니 정은수를 내보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문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정은수를 자연스럽게 내보낼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다.
“어쩔 수 없네. 무슨 내용인지 나중에 나한테도 따로 알려 줘.”
결국 한소현이 나섰다.
정은수의 어깨를 두드린 그녀는 할 말이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밖으로 나갔고, 정은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채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둘만 남게 되니 본격적으로 주도환이 입을 열었다.
“뮤턴트의 리더인 김해철은 상당한 야망을 가지고 있는 참가자입니다. 그는 Re write가 시작된 직후 생명의 탑에 있어야 할 이채연을 확보, 그녀와 함께 인천으로 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목적은 시현 님도 아시다시피 인천연합이었고요.”
“이채연을 누가 채갔나 했더니 그 인간이었군.”
팔짱을 낀 시현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생명의 탑은 시현의 시작 지점이었다.
당시에 누가 이채연을 채간 것인지 궁금했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이야.
묘한 짜증에 구겨진 표정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저……. 계속해도 될까요?”
시현의 표정이 좋지 않자 주도환의 표정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그의 말에 일일이 반응하다간 이야기가 상당히 길어질 것이다.
“계속해.”
표정을 푼 시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안도한 주도환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김해철은 인천연합의 기점이 되는 시청을 손에 넣기 위해 뮤턴트를 만들고, 참가자들을 모으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뭐냐……. 네, 야망에 비해 능력이 부족했죠.”
김해철의 무력은 다른 참가자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진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원작이라는 최고 등급의 정보 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해철은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인천연합은 고사하고 시청조차 손에 넣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현무의 토벌을 기회 삼아 뮤턴트가 단번에 시청을 밟고 올라선다는 계획이 무능 그 자체인 김해철의 머리에서 나왔을 리가 없다.
자연히 떠오르는 것은 조금 전 주도환이 말했던 책사라는 인물이었다.
“그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이한울이었습니다.”
“…….”
예나 지금이나 그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표정 관리가 힘들다.
“저희도 처음부터 이한울을 신뢰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한울은 우리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었죠.”
그렇게 말한 주도환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즉, 자신들은 머리가 안 되고 이한울은 그게 됐다는 소리다.
“저희는 이한울의 지시대로 행동했고, 그 결과 뮤턴트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인천연합의 구심점이 되는 시청을 손에 넣었죠. 그래 봤자 삼일천하였지만요.”
“네가 말한 책사가 이한울인가?”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이한울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서울로 돌아갔어요. 그 대신 책사 역할을 해 줄 거라며 동행자인 정유환이라는 남자를 남겨 두고 갔습니다.”
“정유환?”
들은 적 있는 이름이었다.
이한울이 만든 세력 교단이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있게끔 해 준 사실상의 1등 공신.
천리안의 권능을 가진 참가자의 이름이었다.
“정유환이 여기에 있다고?”
“네, 정확하게는 김해철, 이채연과 함께 요새에 있죠. 그런데…… 왜 갑자기 그렇게 웃으시는지…….”
주도환은 땀을 줄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눈앞에 있는 시현이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현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표정과 눈빛을 통해 드러나는 감정을 전부 감출 수 없었다.
“천리안이 아직 인천에 있다 이 말이지? 설마 내 뒤통수를 깐 것도 그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야?”
“…….”
주도환은 무언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이 몹시 기대됐다. 분명 최고의 복수가 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도환은 흠칫 몸을 떨며 눈치를 살폈다.
그런 주도환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처분에 대해 고민하던 시현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넵!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이한울은 너희의 어떤 점을 보고 흥미를 느낀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이한울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극한의 효율주의자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뮤턴트를 도왔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건…….”
주도환은 시선을 피했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가 주인의 시선을 회피하는 것처럼 말이다.
테이블에 걸터앉은 시현은 팔짱을 낀 채 주도환을 지그시 노려봤다.
다른 협박성 멘트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잔뜩 겁을 집어먹은 주도환이 술술 입을 열었으니까.
“수해에 있는 그것의 봉인을 뮤턴트가 깨뜨렸습니다!”
그 순간 시현은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고, 그것이 주도환의 목을 베어 버렸다.
머리가 잘린 시신을 보며 이를 갈던 시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김영운이 말해 준 미래의 원인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상황은 시현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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