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후우…….”
정은수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면 그리운 시청의 모습이 보인다.
창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생존자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시작되고, 함께 울고 웃고, 먹고 자며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들이다.
모두가 친구고 가족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뮤턴트의 꼬임에 넘어가 시청을 배신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다.
특히, 신현수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던 터라 정은수는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래서 도망치고 말았다. 배신자가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면서 말이다.
‘그런 심약한 인간을 누가 리더로 따라 주겠어.’
시현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정은수는 이번 일이 잘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한때 가족이었던 이들에게 온갖 욕을 들을 각오를 마친 정은수는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곤 크게 놀라고 말았다.
많은 수의 생존자들이 반갑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가출했다가 돌아온 가족을 반겨 주는 것처럼 말이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여러분…….”
정은수는 입을 뗐다.
그의 머릿속에는 간밤에 김영운이 생존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써 준 각본이 들어 있었다.
남은 건 각본을 그대로 읽기만 하면 된다.
정은수가 보기에도 김영운이 쓴 각본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은수는 대본을 싹 잊었다.
그리고 말과 행동에 진심을 담았다.
“현수가 죽고 가장 힘든 시기에 도망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세상에서 저만 불행하고 저만 힘든 줄 알았습니다. 네, 제가 멍청했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상당히 크게 울려 퍼졌다.
옆에서 권능을 사용하고 있던 중년 남성이 그의 목소리를 증폭시켜 준 덕이다.
정은수는 고개를 들어 주변 반응을 살폈다.
대본대로 행동하지 않아 김영운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시현은 그냥 웃고만 있었으며, 한소현은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이다.
‘하여간 대담한 인간들이야. 저 정도는 돼야 한 세력의 리더를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신현수도 비슷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하며, 정은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뻔뻔하다는 거 알고 있는데. 지금부터라도 바로잡고 싶습니다.”
시청의 리더는 신현수, 서브 리더는 정은수였다.
신현수가 죽었으면 당연히 정은수가 리더가 되어야 한다.
설사 정은수가 아니더라도 신현수는 만약을 대비해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을 얼마든지 곁에 두었다.
비서인 이은아가 대표적인 예다.
지금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먼저 현수를 죽인 스컬의 리더 강서원, 그리고 인천의 은인이신 시현 씨를 죽인 뮤턴트의 리더 김해철. 그런 주제에 고개를 뻣뻣이 들고 행동하는 두 사람을 응징하겠습니다. 증거요? 그딴 거 없습니다. 그냥 저와 같은 심증을 가지고 계신 분, 행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정은수는 잠시 내려 두었던 소총을 들고 탄을 장전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빠르게 나아간 총알은 시청의 옥상에서 펄럭이던 뮤턴트의 깃발을 날려 버렸다.
“아, 속 시원하네.”
그 한마디를 끝으로 시청에서 함성이 터졌다.
* * *
정은수의 연설을 빙자한 대국민 사과를 시작으로 시청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시청을 지배하고 있던 뮤턴트에 반감을 품은 생존자를 필두로 신현수, 정은수에게 친밀감을 가진 생존자들이 대거 들고일어났다.
“강서원! 강서원은 어디에 있냐!”
“야, 잠깐. 저 새끼 그때 김해철이나 강서원 옆에서 은수 씨를 압박하던 그놈 아니야?”
“잡아! 의심쩍은 놈은 일단 잡아 놓고 심문한다!”
생존자들의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성난 파도처럼 밀어붙이는 그들의 태도에 당황한 뮤턴트는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는 가만히 있어 놓고 이제 와서 정의로운 척하는 거 역겨워 죽겠다!”
“까놓고 말해서 나는 시청의 운영 방식에 불만이 많았어. 왜 내 가족들이 텐트촌에서 몇 날 며칠 동안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데!”
정은수가 시청을 떠난 며칠 동안 박한이라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시청의 세력원들을 영입했고, 이제는 4할 정도가 그들의 편을 들었다.
6:4.
단순히 수치로만 보면 정은수의 편이 더 많지만, 박한이 구원자를 우선적으로 영입했음을 감안하면 힘은 오히려 박한의 편이 우위에 있다.
이대로 시청 안에서만 내전이 진행된다면 승리하는 것은 박한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시현이 있고, 한소현과 등대가 있는 것이지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정은수가 먼저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이 정은수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가장 안전한 곳에서 팔짱만 끼고 승전보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은수가 앞장서고 그의 호위를 위해 시현이 따라붙었다.
“나도 갈래.”
손이 근질거렸는지 무장한 한소현이 시현의 옆에 섰다.
한소현이 선택한 무기는 권총이었다.
리더가 움직이자 등대의 세력원도 그녀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한소현은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너희는 여기서 대기. 소란을 듣고 악마들이 공격해 올 수도 있어.”
만약 보통 세력의 리더가 같은 발언을 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아우성이 벌어졌을 것이다.
전장의 한복판에 리더가 단신으로 걸어 들어가겠다는데, 어느 세력원이 그걸 보고만 있겠는가.
그러나 등대는 달랐다.
“알겠습니다.”
누구 하나 반론하는 일 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만큼 한소현이라는 존재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시청으로 진입했다.
“죽여! 방아쇠 당기라고! 아는 얼굴이라고 봐주지 마!”
“으아아아악!”
이미 안쪽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정은수는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죽이는 쪽도, 죽는 쪽도 전부 아는 얼굴이었다. 내전이란 그런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박한을 잡으러 가야 합니다. 그게 이 내전을 끝낼 유일한 방법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시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은수는 내전의 한복판으로 몸을 던졌다.
“정은수다! 잡아!”
“젠장, 은수 씨! 보호해 줄 테니까 이쪽으로 와!”
사람들은 정은수를 죽이기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서로 상반되는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
역시 시청이라고 해야 할까.
구원자는 물론 무장한 전투원들도 평균 이상이라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어딜.”
시현은 빠르게 접근해 오는 구원자 및 전투원들을 제압했다.
“시현 씨, 가능한 한 생명은 빼앗지 말아 주세요.”
“알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처분의 권리는 시현이 아닌 정은수에게 있다.
무엇보다 이들을 제압하는 것 자체가 시현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건물의 최상층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크읍!”
“이런.”
“어머나.”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자리에 엎어졌다
갑작스럽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면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크하하하! 랭킹 1위도 별것 아니구만!”
“그러게 말이야. 우리의 권능이라면 3레벨 구원자가 상대라도 압승이지!”
스컬의 리더이자 뮤턴트 소속의 참가자 박한, 그리고 그의 오른팔인 주도환이었다.
두 사람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으며, 손끝에는 녹색의 빛이 머무르고 있었다.
“내가 가진 권능이 중력 조작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 하지만 도환이의 권능 역시 중력 조작이라는 건 예상 못 했을 거다.”
승리를 확신한 박한은 으스대고 있었다.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구원자를 상대로 간단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는데, 누구라도 우월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옆에 있는 주도환 역시 배를 잡으며 웃고 있었다.
달콤한 승리에 깊이 취한 것이다.
때문에 두 사람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궁지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의 표정이 너무나 평온하다는 것을.
그들을 조롱하기 위해 시현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력 조작을 가진 구원자가 열 명이라도 상관없었어.”
“아하하! 손가락 까딱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주제에 허세는!”
시현의 말을 허세로 치부한 박한이 그를 조롱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시현은 그런 거 가지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치유.”
한소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한마디.
그 순간 시현을 비롯한 세 사람의 주변으로 녹색의 빛이 가득 채워졌다.
그녀가 가진 치유의 권능은 단순히 육체적인 상처를 회복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치유의 권능은 대상의 육체를 지배하는 모든 부정적 현상을 치유한다.
상처의 회복은 물론이요, 질병, 정신 질환, 각종 상태 이상까지 회복한다.
권능 덕에 중력의 압박에서 벗어난 시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회, 회복의 권능이라고? 하필이면!”
박한은 기함했다.
세상에 그 많고 많은 권능 중에, 왜 하필이면 한소현의 권능이 치유란 말인가.
마치 승리의 여신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젠장!”
두 남자는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기만 검이다.
그러나 칼집에서 뽑힌 그 순간을 기점으로 검에서부터 묘한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시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희들, 설마 드롭 아이템을 정화하지 않은 채 무기를 만든 거냐?”
“와, 정신병자들이네.”
저 보랏빛 기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시현과 한소현은 질색하며 그들로부터 멀어졌다.
“…….”
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달라졌다.
시현은 혀를 찼다.
박한과 주도환 자체는 그리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다.
문제는 이들이 들고 있는 검이다.
드롭 아이템.
그걸 사용하면 막강한 성능을 자랑하는 장비를 만들 수 있다.
제작자의 실력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장비는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무기보다 더 좋은 성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드롭 아이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정화를 하게 되면 아이템에 남겨진 악마의 힘이 상당 부분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생략하면 비록 뛰어난 장비를 만들 수 있어도, 그렇게 완성된 장비는 이른바 저주 아이템이 되어 사용자의 정신을 오염시킨다.
뿐만 아니라 발하는 독기는 주변의 생존자를 감염시키며, 흘러나오는 마의 기운은 구원자의 축복을 약화시킨다.
다시 말해, 일시적으로 강해질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디메리트밖에 없다.
“대체 왜 저런 멍청한 짓을 벌이는 걸까?”
한소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원작의 지식을 알고 있는 박한이 이유 없이 저주받은 장비를 사용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겁니다.”
“음……. 어쩌면 우리가 봤던 미래. 그거랑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그녀의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람을 붙잡아 두고 심문할 필요가 있다.
“정은수 씨, 죄송하지만 박한의 처분을 맡기겠다는 말은 없던 것으로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저놈은 지금 생각보다 위험한 상태입니다.”
박한은 스컬의 리더 강서원을 죽이고, 강서원인 척 행동하며 마지막에는 신현수까지 죽였다.
정은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원수를 갚고 싶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현에게 박한의 처분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 부탁했고, 시현은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박한과 정은수가 맞부딪치면 깨지는 쪽은 무조건 정은수다.
다행히도 정은수는 별말 없이 시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정은수가 물러나고, 시현은 핏빛 칼날을 꺼냈다.
현무와의 전투에서 분실한 줄로만 알았는데, 쌍둥이가 애지중지 보관해 준 덕분에 이렇게 전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박한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피라미?”
시현이 박한에게 칼을 겨누고, 한소현이 주도환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먼저 시현이 땅을 박찼고, 핏빛 칼날이 크게 반월을 그렸다.
박한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이게……! 끄아악!”
하지만 박한이 비명을 질렀다.
공격은 막았지만 힘의 차이로 인해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검을 쥐고 있는 팔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시현이라 해서 마냥 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망할.”
핏빛 칼날은 시현이 상당히 아끼는 물건이다.
적을 벨수록 피가 묻어 미끄러지기 쉽고, 뼈 때문에 날이 무뎌지는 일반적인 검과 달리 핏빛 칼날은 적의 수가 많을수록 더욱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피를 마시는 특성 때문에 신혈을 가진 이한울과의 교전에서 굉장한 효율을 보일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날이 크게 상한 핏빛 칼날을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어쩔 수 없나.”
이대로 몇 차례 더 공방을 교환하면 핏빛 칼날은 부러지고 말 것이다.
때문에 시현은 검을 칼집에 회수했다.
“갑자기 검을 집어넣다니. 대체 무슨 꿍꿍이지?”
무장을 해제한 시현을 보며 박한은 더욱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그런 박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현이 말했다.
“아, 그건 말이지…….”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펴는 걸 반복하며 웃었다.
“너 정도는 이걸로도 충분할 거 같아서.”
“…….”
말은 하지 않았으나 박한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