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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99화 (99/225)

[99화]

밤은 깊어져만 갔다.

두부를 품에 안은 채 병원 옥상에 드러누운 시현은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도화지 위에 작은 별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도시의 빛들이 사라지고 도로를 달리는 차가 극단적으로 줄어, 맑아진 대기 덕에 도심에서도 무수히 많은 별들을 관측할 수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한 후 유일한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시현은 멍하니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댔다.

그런 시현의 곁에 누군가가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정은수였다.

“시현 씨,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말씀하시죠.”

정은수의 표정은 벌레라도 씹은 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조금 전에 한 이야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조금 전 이야기라면……. 시청 생존자들을 설득하는 것 때문이군요.”

정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가벼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몸을 일으킨 시현은 두부를 놓아주었다.

드디어 해방된 두부는 건물 어딘가에 있을 쌍둥이를 찾아 잽싸게 몸을 날렸다.

“걱정되십니까?”

“걱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이미 한번 시청을 버렸잖아요.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저를 따라와 줄지…….”

어지간히도 확신이 없었는지 정은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종래에는 구원자의 청각으로도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시청의 생존자들은 분명 정은수 씨를 선택할 겁니다.”

시현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뮤턴트는 사실상 반 억지로 시청을 점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맨 밑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 권력을 쥐고 있으니, 시청의 생존자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 시점에서 정은수가 나타나 그들의 구심점이 되어 준다면 뮤턴트를 몰아내기 위해 행동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걱정입니다. 시현 씨도 아시다시피 시청에 의지하고 있는 생존자는 굉장히 많아요. 저는…… 신현수가 아닙니다. 그들을 잘 이끌 자신이 없어요.”

자신감 없는 태도에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시현은 묵묵히 그의 한탄을 들어 주었다.

그의 심정을 백 번 천 번 이해했기 때문이다.

책임 없이 권리만 찾는다면 시청의 리더만큼 탐나는 자리도 없지만, 책임을 지려 한다면 시청의 리더만큼 벅찬 자리도 없다.

많은 사람 위에 선다는 건 그만큼 짊어져야 하는 것도 많다는 소리니까.

“부탁이 있습니다.”

“음……. 왠지 느낌이 썩 좋지는 않은데, 일단 들어는 보죠.”

“만약 시청의 탈환에 성공한다면 시현 씨께서 시청의 리더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아니나 다를까, 굉장히 무겁고 다루기 힘든 내용이었다.

시청의 리더.

분명 탐이 나는 자리이기는 하다.

붕괴한 학교의 생존자들을 모아 급하게 만든 호텔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체계가 잡혔으며, 견고한 세력. 그게 바로 시청이니까.

더군다나 시청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곧 인천연합의 수장이 된다는 말이 된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비해 인천연합과 손을 잡는 것보다야 인천연합 자체를 손에 넣는 편이 더 확실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현은 호텔에 남아 있을 생존자들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싫습니다. 그런 거 함부로 먹으면 배탈 나거든요.”

“그런가요? 하하.”

정은수는 힘없이 웃었다.

―아니 왜!

―굴러 들어온 기회를 제 발로 차 버리네. 이래서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아쉬워!

시현보다 오히려 댓글이 더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손을 휘휘 저어 댓글들을 치워 버린 시현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정은수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애초에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 자리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괜한 말로 위로하려다가 지뢰를 밟을 수도 있다.

때문에 시현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정은수 씨.”

“네.”

“만약 힘들면, 언제든지 서울에 있는 호텔로 도망치세요. 제가 항상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힘들어서 도망치면 언제라도 받아 주셔야 합니다.”

“푸하하하!”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정은수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 재미있는 말도 아니건만 한참이나 웃던 정은수는 찔끔 흘린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예, 얼마든지요.”

사람은 너무 몰아세우면 잘못된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시현은 낭떠러지에 몰려 있는 정은수에게 도망칠 길을 열어 주었다.

그 덕분일까, 조금이지만 정은수의 표정이 달라 보였다.

* * *

뮤턴트는 세력을 총 두 개로 분할했다.

약 6할의 병력은 요새를 점령하고 그곳에 상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4할은 시청에 남아 시청을 장악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신현수와 정은수가 없는 시청은 한곳에 똘똘 뭉치지 못한 채 너무도 쉽게 뮤턴트에 흡수되었다.

스컬의 리더 강서원을 죽이고, 그를 사칭해 시청의 리더 신현수까지 죽이는데 성공한 박한이 뮤턴트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잡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기어코 시청의 리더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시청의 구원자 중 4할은 협력을 약속했고. 이제 남은 건 6할인가……. 인천연합도 절반 정도는 수중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으니……. 후후후!”

현재 박한의 Re write의 순위는 146위.

아포칼립스 초반부에 워낙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해 밑바닥에서 출발하고야 말았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순위가 올라가지 않았다.

특히, 150위 내에 진입한 이후에는 거의 정체라 할 만큼 순위에 변동이 없었다.

하지만 뮤턴트와 손을 잡는 것으로 정체되어 있던 것들이 해결되자, 구독자나 조회 수가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기세라면 순위권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거야.”

희망이라는 것이 넘쳐흘렀다.

Re write를 시작한 이후, 이렇게나 세상이 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자신의 소설이 앞으로도 성공 가도를 달려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늘 위기와 극복을 반복하는 법이다.

“리더! 큰일 났어!”

무례하게 노크도 없이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이는 박한이 신뢰하는 오른팔인 참가자 주도환이었다.

그의 옷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큰일이라는 게 거짓말을 아닌 듯 주도환은 총상을 입고 있었다.

달갑지 않은 돌발 상황에 박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습격이야.”

“습격? 설마 악마인가?”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습격의 주체가 악마였다면 주도환의 상처는 총상이 아닌 깊은 자상이었어야 한다.

상처를 꾹 누른 채 지혈하던 주도환이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박한을 응시했다.

부끄러워진 박한은 헛기침을 했다.

“말실수였어. 그러니까 감히 누가 뮤턴트의 휘하에 있는 시청을 습격한 거야?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기에.”

“사실인지는 모르겠는데, 놈들 중 몇몇이 스스로를 등대의 구원자라 말하고 있어.”

“등대?”

굉장히 낯선 세력명이다.

나름 머리를 굴려 봤으나 인천에 등대라는 이름을 가진 세력은 없다.

조금 영역을 넓혀 서울이나 경기권에 있는 세력까지 탐색했으나, 역시 등대라는 이름을 쓰는 세력은 없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등대……. 등대? 그런 세력이 인천에 있었나? 설마 신설인가?”

“아니, 이 답답아! 환장하겠네.”

결국 주도환이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부산의 등대! 단일 세력으로 인천연합과 비견되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원작에서도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대의 세력이라 언급됐었잖아! 어떻게 그걸 잊어버리냐!”

“……미친?!”

당황한 박한이 책상을 내려치며 몸을 일으켰다.

책상이 정확하게 손바닥 모양으로 파였다.

“그놈들이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인천에서 부산까지라 하면 직선상으로도 300km가 넘는 거리다.

교통망이 살아 있는 아포칼립스 이전이라면 모를까, 두 차례의 아포칼립스를 통해 도로나 철도가 죄다 망가지고 거리에는 버려진 차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

부산에서 인천까지 오려면 하루 이틀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더군다나 이 세상에는 호시탐탐 인간을 노리는 악마가 들끓고 있다.

2차 아포칼립스가 시작되어 대형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세력의 구원자 다수를 이끌고 왔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행위다.

“아니, 그 미친 행동까지 해 가며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냐고!”

“나도 모르지. 하지만 여기서 끙끙거리기만 하다가는 시청이 완전히 박살 날걸? 밥그릇 뺏기기 싫으면 뭐라도 해야 해!”

“맞아. 뭐라도 해야지.”

박한은 허겁지겁 장비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시청이 인천에서 가장 크고 강한 세력이라고 하지만 등대에 비할 바는 아니다.

등대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있겠지만, 그 대가로 시청은 Re write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과거의 세력이 되어 버릴 것이다.

등대와 비등하게 싸우려면 최소한 인천에 있는 세력 전체를 하나로 묶어 완전한 인천연합을 만들어 내야 한다.

아직 뮤턴트는 그 정도까지 일을 진행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설득해 이 전쟁을 막아야 한다.

콰앙!

“으아아악!”

폭발과 함께 시청의 벽 한쪽이 날아갔다.

뻥 뚫린 구멍 탓에 바깥의 상황을 더 잘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미친…….”

그는 몇 번째인지 모를 ‘미친’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시청의 주변을 상당수의 무장한 사람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중 구원자로 보이는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역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세력이라고 해야 할까.

살이 떨렸다.

“으아아악!”

“도망가! 일단 시청 안으로 들어간 다음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 싸운다!”

“후퇴! 바리케이드는 버려! 괜히 바리케이드를 지키겠다고 목숨 걸 필요는 없어!”

그들과 항전하는 시청의 병력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원래 시청이 이 정도로 약한 세력은 아니다.

기습도 기습이지만 준비가 미흡했다.

적어도 인천 내에서 자신들을 도발할 세력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해 방비를 너무 허술하게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너무 강했다.

그 결과 첫 충돌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더 이상의 피해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박한은 앞뒤 재지 않고 목이 찢어지도록 소리쳤다.

“멈춰어어어! 폭력 멈추라고!”

그의 목소리는 총소리가 난무하는 전장의 소음에 너무 쉽게 묻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은 몇 번이나 목청껏 소리쳤다.

어떻게든 시청의 피해를 최소화시켜야 했으니까.

그런 박한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주도환은 한숨을 내쉬며 적의 습격을 알릴 때 사용하는 확성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습격자들은 공격을 멈추고 정체를 밝혀라!”

확성기로 인해 증폭된 목소리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총탄을 퍼부어 대던 등대의 공격이 잠시나마 멈췄으니까.

등대의 병력이 반으로 갈라졌다.

마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그곳에서 걸어 나온 이를 본 순간 박한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정은수?!”

신현수의 절친이자 오른팔이었던 정은수.

시청을 버리고 달아났음에도 아직 과반수의 생존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 정은수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정은수 씨?”

“어째서 정은수 씨가 저기에…….”

시청의 생존자들 사이에서 동요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라졌던 정은수의 등장에 반가워하면서도 어째서 그가 시청을 공격한 무리와 함께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젠장, 등대가 정은수를 확보하고 있었구나.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더니만…….”

박한은 이를 갈았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지금의 상황은 박한에게 그리 좋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기껏 수중에 넣은 시청이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 아닌가.

절대 정은수가 입을 열게끔 해서는 안 된다.

“주도환, 저거 맞힐 수 있겠어?”

“한 번 해 볼게.”

주도환은 소총을 집어 들었다.

숨을 멈춘 그는 가만히 방아쇠를 당겼다.

전장의 요란한 소음 속에서 마른 소리가 울리며 한 줄기 섬광이 정은수의 머리를 노리고 쏘아졌다.

권능이 담긴 탄환이었다.

주도환은 자신의 공격이 빗나갈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까앙!

한데 무언가가 끼어들어 주도환의 공격을 막아 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몸을 던져 총알을 대신 받아 냈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문제는 총알을 대신 받은 이가 외피를 가진 구원자라는 것이었다.

“쳇, 감히 누가…….”

주도환은 겁도 없이 자신의 공격을 막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부라렸다.

저 멀리, 정은수의 옆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아직 말은 시작도 안 했는데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예의가 없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아군의 뒤통수에 칼을 쑤셔 넣겠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 남자의 얼굴이 굉장히 익숙했다.

“저, 저놈은…….”

옆에 있던 박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을 쩍 벌리고 귀신이라도 본 듯 바들바들 떨어 대던 그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래? 아는 놈이야?”

“……현.”

“뭐?”

“유, 윤시현이라고!”

그제야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최초이자 유일의 3레벨 구원자 윤시현.

아군으로 있을 때는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은 구원자이다.

반대로 적으로 돌리면 귀신이나 사신보다 더 두려운 존재로 돌변하기도 하는 구원자.

그런 인간이 적진의 한복판에서 자신들을 향해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제길.”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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