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1층의 생존자들을 전멸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3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모든 침입자들을 처리한 게 아니었기에 시현은 쉬지 않고 2층으로 향했다.
대피소인 찜질방에 들어선 시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손발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은 생존자들이었다.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이다.
그들 중에는 쌍둥이도 섞여 있었다.
그런 생존자들 주변에 무장한 10여 명의 전투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신체 어딘가에 뮤턴트의 표식을 갖고 있었다.
“대장, 이것들은 왜 살려 두는 겁니까?”
“나도 몰라. 리더가 상자에 담아서 수해 팀에게 인수하라고 하던데? 시키니까 해야지 뭐.”
그들은 툴툴거리며 관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상자를 옮겨 왔다.
그 안에 저항하는 생존자를 때리거나 윽박을 질러 억지로 집어넣고는 그대로 뚜껑을 닫아 버린다.
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저런 기이한 행동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평상시의 시현이라면 몸을 숨긴 채 지켜보며 그들의 대화에서 정보를 뽑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덩치 큰 남자가 김세연에게 다가가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나마 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도 끊어져 버렸다.
“끄아아아악!”
첫 번째 희생자가 내지른 비명에 뮤턴트, 요새의 생존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의 시선이 시현에게 집중됐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머리가 으깨진 시체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악귀나 다름없어 보였다.
“……윤시현?”
뮤턴트의 멤버 중 하나가 시현을 알아봤다.
시현도 그를 알아봤다.
현무와의 전투에서 늘 김해철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던 사람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 움직이지 마.”
남자가 턱짓을 하자 고개를 끄덕인 뮤턴트의 멤버 전원이 총을 들었다.
그들의 총구가 향하는 곳은 시현이 아닌 요새의 구원자들.
어차피 3레벨 구원자인 시현에게는 총이 통하지 않으니 시현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그들을 인질로 삼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얄팍한 수단조차 시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너희가 하나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일방통행.”
시현은 권능을 사용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생겨난 반투명한 방패는 반구체를 형성하며 요새의 생존자들을 감쌌다.
당황한 남자 하나가 방아쇠를 당겼다.
당연하지만 반구체의 방패는 총알이 파고드는 걸 허락지 않았다.
“……그 방패는 직사각형 형태만 취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가장 편하고 정신력의 소모가 적을 뿐이지, 딱히 형태에 제한이 있는 건 아니거든.”
시현은 무덤덤하게 읊조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남자는 껴입은 몇 겹의 옷을 몽땅 적실만큼 땀을 흘렸다.
차라리 욕을 하고 언성을 높이며 방방 뛰면, 덜 무서웠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뭐 또 보여 줄 거 있어?”
그렇게 말한 시현은 천천히 다가왔다.
뮤턴트에 속한 멤버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모두가 뒷걸음질 쳤다.
그중에는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하고 무기를 버린 채 항복하는 이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가장 먼저 목숨을 잃은 이는 항복을 선언한 이였다.
콰득!
일말의 자비도 없이 머리를 밟아 터뜨리는 시현.
목숨을 구걸해 봐야 살 수 없다고 판단한 뮤턴트는 저항을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알은 외피에 가로막혀 볼품없이 찌그러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탄창을 갈기 위해 사격이 멈춘 잠깐 사이, 무기를 쥔 참가자들이 달려들었다.
“적은 하나야! 제아무리 3레벨이라도 우리가 다 같이 힘을 합치면……. 끄아악!”
“광운아! 이 새끼가 광운이를……! 커헉!”
“이, 이거 놔! 이거 놓으라…… 꺼어어윽!”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구원자들이 대량으로 달려들어도 겨우 승산이 보일까 말까 한데, 단순히 무장한 전투원이라면 아무리 수가 많아 봤자 제대로 된 싸움조차 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학살에 터져 나오는 피는 많아졌고, 반대로 비명은 줄어들었다.
대장격인 남자를 제외한 뮤턴트의 멤버 전원이 전멸하는데 걸린 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이 많은 수의 사람을 죽였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시현을 보며, 남자는 무심결에 우러나온 진심을 읊조렸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악마 새끼.”
시현은 그마저도 비웃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든가.”
대장 격 인물이라 해서 취급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절망하는 남자의 머리를 쥐고 힘을 주자 두개골이 처참하게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손을 털어 낸 시현은 그제야 요새의 생존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전부 풀어 드릴 테니까.”
어느새 뒤따라온 김영운이 주머니칼을 이용해 포박된 생존자들을 풀어 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그들은 김영운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정작 뮤턴트를 척살하고 제 손에 피를 묻힌 시현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뮤턴트의 전투원들을 상대로 시현이 보여 준 광경은 요새의 생존자들에게도 깊은 두려움을 심어 준 것이다.
쌍둥이 역시 한껏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시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왕! 왕!”
유일하게 시현을 반겨 주는 건 꼬리를 풍차처럼 돌리는 두부뿐이었다.
안심한 시현은 그제야 웃었다.
“혀, 형아!”
시현의 미소를 확인하고 나서야 쌍둥이도 미소를 되찾았다.
특히 김세찬이 눈물과 콧물을 동원해 자신의 서글픔을 호소했다.
“주혁이가……. 주혁이가……. 끄아앙!”
자신을 부둥켜안는 김세찬을 말없이 안아 주려던 시현은 멈칫하고 말았다.
“…….”
한참이나 허공을 헤매던 붉은 손은 김세찬의 등을 토닥여 주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졌다.
* * *
현재 시청은 뮤턴트가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뮤턴트의 리더 김해철이 시청의 리더로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시청의 생존자들을 하나로 묶어 줄 구심점이 될 사람이 딱히 없기 때문이었다.
신현수가 사망한 지금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은 정은수뿐이다.
그러나 정은수는 시청을 포기하고 잠적해 버렸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시청은 쭉 뮤턴트가 제멋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무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등대라 해도 시청과 정면으로 부딪치면 많은 희생을 낳게 됩니다. 그러니 저희는 정은수를 찾아야 해요. 그리고 설득해야죠.”
부산을 떠나기 전 등대의 두뇌 역할을 톡톡히 해 주던 김영운의 말을 떠올린 한소현은 깊은 숨을 토했다.
“후우…….”
정은수는 중요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게 적개심을 심어 줄 행동이나 언사는 절대 삼가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그게……. 헤헤, 너무 저항하는 데다 계속 달아나려는 탓에 어쩔 수 없었음.”
귀엽게 웃으며 변명을 늘어놓는 교복 차림의 여학생을 보고 있자니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김영운이었다면 뒷목을 잡거나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을 것이다.
“으읍! 으으으읍!”
정중하게 대해야 할 정은수가 현재 손발이 묶이고 재갈까지 물려 있었으니까.
여학생을 지그시 노려본 한소현은 정은수의 속박을 직접 풀었다.
“푸하! 너희들 뭐야! 등대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데!”
“아, 음…….”
한소현은 고민했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에 무작정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막상 정은수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떤 말로 설득하면 좋을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시청.”
“……?”
“왜 도망쳐 나온 거야? 네 인망이라면 사람들을 모아서 시청을 장악하려는 뮤턴트에 대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정은수의 눈에 전보다 더한 적개심이 맺혔다.
역시 초면에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 든 건 좋지 않은 선택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한소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우리가 도와줄게.”
“누구신지 모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저에게는 더 이상 시청에 미련이 없어요.”
그걸로 끝. 정은수는 완전히 입을 닫아 버렸다.
말을 붙이려 하면 눈을 질끈 감으며 대화할 의사가 없음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학생의 표정에 불쾌함이 실렸다.
“리더,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대화 방법은 주먹이라고 그랬음.”
“누가?”
“그게 중요함? 리더랑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었는데 고개를 조아리지는 못할망정 감히 저런 태도라니. 너무 주제를 모르는 거 같아서 하는 말임.”
“그런 말 하지 마.”
귀여운 외모와 달리 시건방진 여학생의 말투는 정은수의 적개심을 한층 더 부풀렸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맹렬한 시선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한소현은 다른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기왕이면 내 편으로 만들어 시청을 상대로 조금 더 우위의 관계를 형성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등대의 이익이 아닌 Re write의 베드 엔딩을 막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수를 꺼내 들었다.
“시청을 장악하는 건 윤시현의 뜻이기도 해.”
그 이름을 꺼내는 순간 정은수의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너무 놀라 말하는 방법마저 잊은 듯 한참이나 눈만 깜빡거리던 정은수가 겨우 입을 뗐다.
“시현 씨가 살아 계십니까?”
“지금 위기에 처한 요새의 생존자들을 구출하러 갔어. 나와 함께 간다면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한소현이 꺼낸 회심의 한 수는 정은수의 고집을 꺾기에 충분했다.
“가겠습니다.”
* * *
시현은 쌍둥이와 함께 근 하루에 걸쳐 민주혁을 비롯해 희생당한 요새 생존자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 안에 안치할 시신은 극히 일부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묘비라도 세워야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넋이라도 달래 주지 않겠냐는 김세연의 적극적인 주장이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묘비를 세우고 나니 김영운이 다가왔다.
“시현 씨.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습니다. 시청에서 움직임이 포착됐어요.”
“음……. 계획은 있습니까?”
정은수를 확보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그 과정에서 정은수를 불쾌하게 만들 난폭한 수단이 동원되기는 했지만, 시현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정은수는 전부 용서하고 한소현의 제안에 응했다는 모양이다.
이제 남은 건 정은수와 만나 그를 설득하고 뮤턴트가 지배하고 있는 시청을 재탈환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재탈환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게 시현의 생각이었다.
뮤턴트는 생각보다 우수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채연, 그녀는 굉장히 위험하다.
남들의 시선을 피해 요새에 들어올 만큼 잠입 능력이 뛰어난 데다 단신으로 요새의 구원자 전원을 썰어 버린 전투력까지 갖추고 있다.
섣부르게 행동하다가 이채연의 암습에 정은수가 죽기라도 하면, 그때는 진짜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만다.
확실한 계획이 필요했다.
“계획이라……. 굳이 계획이 필요할까요? 그냥 가서 정은수가 연설 한 번 딱 해 주면 시청의 생존자들이 알아서 뮤턴트에 반기를 들 텐데.”
“이채연이 신경 쓰입니다. 지금 제 권능은 오로지 전면전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라. 만약 이채연이 권능으로 모습을 숨긴 채 정은수를 기습한다면 막아 내지 못할 겁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시현 씨에게는 말씀을 안 드렸군요.”
김영운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제아무리 이채연이라 해도 절대 정은수 씨에게 해를 가하지는 못할 겁니다.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하시는 게 낫겠네요.”
“……?”
시현이 의아함을 드러냈으나 김영운은 장난기가 동한 아이처럼 웃기만 할 뿐 정담을 알려 주지 않았다.
결국 시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요새의 생존자들을 데리고 김영운이 이끄는 대로 따라 이동했다.
이동 시간은 기껏해야 도보로 30분 정도나 될까.
하지만 다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이동하려니, 시간은 한참이나 더 걸렸다.
현무 때문에 보금자리를 떠났던 악마들이 하나둘 복귀하는 상황이었다.
긴장감은 배가 되었으며 종일 날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니 정신력도 마모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물어 있었다.
“저기가 목적지입니다.”
김영운이 가리키는 곳은 커다란 병원 건물이었다.
그러나 상태가 그리 멀쩡하지는 않았다.
정면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으며, 안쪽도 하늘에서 거대한 창을 내리꽂은 것처럼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용케 무너지지 않고 서 있구나 싶었다.
“여기는 왜 온 겁니까?”
“여기에 리더와 정은수 씨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김영운이 무전을 열었다.
그가 내뱉은 대사는 ‘도착했습니다’라는 짧은 한마디였다.
그 순간 정면으로 작은 불 하나가 켜졌다.
랜턴을 든 채 1층 정문까지 일행을 마중 나온 이는 한소현, 그리고 정은수였다.
정은수는 시현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시현 씨! 정말로 살아 계셨군요!”
“한소현 씨가 치료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 겁니다.”
“그랬군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마치 헤어진 오랜 연인을 대하듯 매달리는 정은수를 차마 내치지 못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시현의 눈에 새로운 불빛이 보였다.
2층 창문에서 토끼 모양의 장식이 달린 손전등을 흔들며, 몸을 내밀고 있는 여학생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그쪽이 김영운이 본, 미래에 나왔던 그 윤시현이라 이거지?”
그런 여학생의 머리를 찍어 누르는 크고 거친 손이 있었다.
손의 주인은 호리호리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남성이었다.
“초면에 연상이잖아. 존칭을 사용해라.”
“이 망할 꼰대! 머리 깨지겠음!”
그는 시현과 마주치자 슬쩍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를 시작으로 하나둘 병원에 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채 1분도 되지 않아 수많은 빛이 한밤의 병원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었다.
그 수가 족히 백은 되어 보였다.
“……세상에.”
시현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인천까지 온 등대의 인원은 한소현과 김영운을 필두로 한 소수 정예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등대의 병력을 얼마나 끌고 온 겁니까?”
시현의 질문에 김영운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9할. 본진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두고 전원입니다. 인천에서의 일을 해결하는 건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었으니까요.”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