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진한 피 냄새가 났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나온 피투성이의 여성.
무언가를 손에 든 채 샐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채연을 본 순간, 신민아는 결국 구토를 참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달아나야 하는데, 토악질이 멈추지를 않는다.
괴로움에 눈물이 나왔다.
여성의 손에 들린 무언가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던 생존자의 머리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네가 여기의 리더야? 이름이 민주혁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정확한 특징도 말해 준 거 같은데, 졸면서 들어 가지고 기억이 잘 안 나. 그러니까 네가 좀 알려 줬으면 좋겠어. 너 혹시 민주혁이 누군지 알아?”
“우우……. 우웨엑!”
“나 참……. 더럽게. 대화가 안 통하네.”
들고 있던 머리를 창틀에 고이 모셔 둔 이채연은 웃으며 다가와 신민아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단검을 들이밀었다.
지금까지 요새의 수많은 생존자들의 피와 목숨을 앗아 간 그 단검을 말이다.
그 단검이 신민아의 손가락 하나를 앗아 갔다.
“끄으읍!”
신민아는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았다.
이채연의 광기 어린 눈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이 비명을 지르면 이 여자가 기뻐하리란 것을.
“빨리 말해 줘. 민주혁이 누구야?”
“네가 죽였잖아!”
“어머, 그랬어? 진즉 말해 주지. 괜히 아까운 손가락만 잘랐네.”
이채연은 잡고 있던 신민아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갔다.
“말해 줘서 고마워.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도 있어야지. 특별히 너는 살려 줄게. 얼굴이 내 취향이기도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오르는 이채연이 너무도 무방비해 보였다.
신민아는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단검 손잡이가 만져졌다.
‘외피는……. 없어. 우리 구원자들이 목숨 걸고 외피를 깎아 놓은 거야.’
이채연의 칼 아래에 덧없이 죽어 나갔을 구원자들을 떠올린 신민아는 각오를 다졌다.
그녀는 구원자도 뭣도 아니다.
그러나 구원자와 전투원들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 준 기회를 제 목숨 보전하기 위해 놓쳐 버릴 만큼 매정하지도 못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어.’
저 무방비한 등에 단검을 꽂아 넣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신민아는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도달한 순간, 그녀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단검을 찔러 넣었다.
노리는 곳은 심장이었다.
푹!
“……어?”
신민아의 동공이 확장됐다.
그녀의 단검은 아직 이채연의 심장을 꿰뚫지 못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살과 근육이 꿰뚫리는 소리가 났다.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빠르게 의식이 멀어졌다.
신민아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입이 귀에 걸린 듯 찢어지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이채연이 자신의 목에 박았던 단검을 회수하는 광경이었다.
콰득!
지독한 고통과 함께 몸에서 검은색의 가시가 솟구쳤다.
* * *
“허억……!”
김세찬은 눈을 떴다.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신체 이곳저곳에서 고통이 느껴졌으며, 특히 이채연에게 당한 왼쪽 팔에 감각이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목숨만큼은 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 악마 같던 이채연에게도 최후의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끝내 생명까지 빼앗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심각한 부상은 피할 수 없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주변을 살피던 김세찬은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민주혁을 발견했다.
민주혁의 부상은 김세찬보다 한층 심각했다.
목숨은 붙어 있으나 방치해 두면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다.
“야, 정신 차려.”
김세찬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덩치가 큰 민주혁을 등에 업었다.
몸에 힘이 빠져 다리가 휘청거렸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민아 누나한테 데려다줄게. 분명 누나는 약을 가지고 있을 거야.”
계단을 오르려던 김세찬은 신민아가 생존자들의 대피를 지휘하고 있었음을 떠올렸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요새 내부가 굉장히 조용한 것으로 보아 이미 대피는 끝났을 것이다.
다행히도 김세찬은 대피소의 위치와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김세찬은 무게감에 비틀거리면서도 계단을 내려갔다.
이 와중에도 민주혁의 신음이 계속 들려왔다.
“아파……. 너무 아파…….”
“알았어. 조금만 참아. 금방 도착할 수 있어.”
민주혁의 신음 소리가 약해질수록 김세찬의 마음도 조급해져 갔다.
그러나 본인도 부상을 입었으며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마음과 달리 걸음걸이는 한없이 느렸다.
그렇게 요새를 무사히 빠져나온 김세찬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걸었다.
언제 어디서 악마가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렸다.
[크르르르…….]
멀리서 들려오는 악마의 울음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악마보다 더 무서운 건 점점 더 약해지고 있는 민주혁의 숨소리였다.
“아빠…… 보고 싶어. 왜 나만 두고 갔어. 엄마는…… 맨날 날 때려서 싫단 말이야.”
몽롱한 와중에 중얼거리는 소리 역시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롭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조금만 더…….”
저 멀리 신민아가 만일의 사태를 위해 지정한 대피소가 보였다.
대피소의 정체는 찜질방으로, 다 무너져 가는 겉보기와 달리 안에는 며칠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물, 그리고 소량의 약품이 구비되어 있다.
저기까지만 도착하면 민주혁은 살아날 것이다.
한껏 신이 난 김세찬은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조금 전부터 자신을 제외한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 * *
“어떻게 할래?”
언제 당황했냐는 듯 그새 침착한 모습을 되찾은 한소현이 질문했다.
현재 시현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하나는 위기에 처한 요새의 생존자들을 구출하러 가는 것.
다른 하나는 뮤턴트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시청을 버린 채 잠적해 버린 정은수의 뒤를 쫓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은수의 뒤를 쫓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너에게는 요새도 중요할 거야. 그러니까 무엇을 선택할지 강요하지는 않을게.”
“……하아.”
시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성적으로는 정은수의 뒤를 쫓는 편이 바람직하다.
신현수는 죽었지만 정은수는 그다음으로 시청의 생존자들에게 존경을 사던 인물이다.
현재 시청은 뮤턴트가 장악하고 있지만, 정은수가 모습을 나타내면 판을 뒤집을 수 있다.
모두를 통솔해 줄 사람이 없어 잠자코 뮤턴트를 따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정은수를 따를 것이며, 시청을 다시 장악할 수 있을 터이다.
문제는 정은수를 설득할 사람이 시현뿐이라는 거다.
한소현이나 김영운처럼 생면부지의 타인이 호소한다 한들 정은수가 마음을 돌리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들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요새로 달려가고 싶었다.
민주혁은 죽었지만 만약 쌍둥이가 살아 있다면, 그들을 구하고 민주혁의 복수를 해야 한다.
인천연합과 쌍둥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전자를 택하는 게 옳다.
쌍둥이는 없어도 그만이지만, 인천연합은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집단이니까.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건만, 시현은 자신을 형, 오빠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쌍둥이를 버릴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요새로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시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선택에 김영운은 씁쓸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정은수의 설득은 리더가 하는 수밖에.”
“내가?”
“그러면 제가 해요? ……확실히 리더에게 맡기느니 제가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시현 씨와 동행할 생각입니다.”
김영운의 말에 시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고, 한소현은 뚱한 눈으로 김영운을 노려봤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 주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시현 씨가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여전히 못마땅한 듯했으나 한소현은 김영운이 시현과 동행하는 것을 얌전히 허락했다.
허가가 떨어지자 김영운은 곧바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시현 씨, 타세요.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망설일 여유가 없었기에 시현은 한소현에게 인사도 생략한 채 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빠른 속도로 도로 위를 달렸다.
당연하다는 듯 몇몇 악마들이 차 뒤로 따라붙었지만, 두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추격해 오는 악마를 무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몇 번의 총성과 함께 차 뒤를 쫓던 악마들이 피를 흘리며 꼬꾸라졌다.
백미러를 통해 확인해 보니 오토바이에 탑승한 남녀가 보였다.
아는 사이였는지 김영운이 차를 멈추고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요새에서 도망쳐 나온 생존자들이 머무르던 건물을 뮤턴트의 부대가 습격했습니다.”
“이런…….”
뮤턴트의 악랄함에 김영운이 분개하려던 찰나, 조수석에서 쑥 내민 손이 그를 잡아당겼다.
“비키세요.”
“으엥? 으어억!”
괴상한 비명을 지른 김영운은 강제로 뒷좌석으로 밀어졌고, 시현이 운전석을 차지했다.
상당히 거친 언사였음에도 김영운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시현의 눈매가 어지간한 대형 악마보다 흉포하고 사나웠기 때문이다.
“안전벨트 하셨습니까?”
“아니요. 아직…….”
“출발하겠습니다.”
부아아앙!
“으어어억!”
김영운의 비명을 한 귀로 흘려버린 시현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굉장히 위험천만한 행위이기는 했지만 그 덕에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저기 보이는 군용 트럭! 뮤턴트의 겁니다.”
김영운이 가리키는 곳에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군용 덤프트럭이 있었다.
시현은 트럭 옆에 차를 세웠다.
그에 트럭 운전석의 창문이 열리며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머리를 내밀었다.
“넌 뭐야!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여기서 꺼져!”
그렇게 지껄이는 남자의 귀에는 클립을 펴서 만든 어설픈 해골 모양의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뮤턴트의 상징이다.
그 순간 눈이 돌아간 시현은 그대로 남자의 귀걸이를 잡아 뜯었다.
남자의 귀가 찢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끄아아악! 이, 이 미친 새끼가!”
남자는 찢어져 피가 흐르는 귀를 붙잡은 채 분노했다.
그러나 남자의 분노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콰앙!
시현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차에서 끌어내려 그대로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머리가 깨진 남자는 짧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절명했다.
“…….”
손속에 일말의 자비도 없는 시현을 보며 김영운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천천히 따라오세요.”
“……네, 그러죠.”
김영운은 가까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저 천천히 따라오라는 뜻이 자신의 안위를 염려한다기보다 사냥감을 남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으름장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진짜로 천천히 따라갔다.
그러는 동안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선 시현을 반기는 것은 다양한 무기로 무장한 생존자들이었다.
일곱의 생존자는 건물에 하나밖에 없는 비상구 계단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이 남자,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하나같이 신체 어딘가에 해골 모양의 장신구를 달고 있음을 확인한 시현은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친구, 어쩌다 여기에 들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여긴 지금 굉장히 위험하니까……. 끄아아악!”
시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던 남자의 팔이 기형적인 각도로 꺾였다.
고통을 호소하는 남자를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던 시현이 살짝 더 힘을 주자 남자의 팔은 완전히 빠져 버리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끈적이는 침을 쏟으며 괴로워했다.
그제야 생존자들이 경각심을 드러냈다.
“저, 적이다! 습격이다!”
“설마 외부에 나가 있던 요새의 구원자인가? 빨리 영호를 불러!”
그들 중 하나는 총을 가지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방아쇠를 당기던 남자는 시현의 외피에 총알이 튕겨 나가는 것을 확인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물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시현이 아니었다.
빠르게 달려가 남자를 제압한 시현은 그의 소총을 빼앗아 개머리판으로 내려쳤다.
퍽!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나며 대리석 바닥에 피가 넓게 퍼졌다.
“…….”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는 잔혹한 살해 방법에 남은 생존자들은 겁을 집어먹었다.
몇몇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달아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시현은 방아쇠를 당겨 그들의 다리에 구멍을 뚫었다.
“꺼억!”
고꾸라지는 생존자들을 무시한 시현은 앞에 있는 남자의 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벽에 꽂아 버렸다.
그렇게 하나씩 머리통을 터뜨리는 잔인한 방식으로 숨통을 끊으며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공포심을 유발시켰다.
이미 남아 있는 자들은 도망치거나 저항할 의욕을 모조리 상실한 채 자신의 차례만을 기다리며 벌벌 떨어 댔다.
그중 하나가 부조리하고 압도적이며 일방적인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반기를 들었다.
“도대체 넌 뭐야!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건데!”
“윤시현.”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뮤턴트의 멤버들은 모두가 시현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들의 리더가 시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까지.
알고 있었기에 윤시현이라는 이름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 어째서 저 인간이…….”
남자는 손을 벌벌 떨며 무전기의 전원을 켜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시현의 손이 먼저 그의 얼굴을 덮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