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늦은 밤.
요새에 허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사람은 야간에 입구의 경계를 담당하는 생존자였다.
“흐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는 근무 교대를 위해 임시로 만들어 놓은 망루로 향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망루 위에 서면 하늘을 향해 치솟는 붉은 기둥이 보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과 신음은 경계 담당자의 정신을 피폐하게 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그것도 완전히 사라졌다.
2주 가까운 시간을 죽지도 못하고 고통받던 여성이 가까스로 눈을 감는 걸 허락받은 것이다.
더 이상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피곤함과는 별개로 생존자의 걸음걸이는 몹시 가벼웠다.
“아저씨, 교대 시간이에요.”
사다리를 두드리며 전 근무자를 호출했다.
사다리의 폭이 워낙 좁아 여러 명이 동시에 오르내릴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피식 웃은 생존자는 사다리를 올랐다.
“이 아저씨, 보나 마나 또 졸고 있겠네. 아무리 우리 리더가 세상 물정 모르는 애기라지만 기본은 지켜야 할 거 아니……. 우와악!”
그는 의도치 않게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사다리를 오르던 도중 갑자기 손이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사다리와 그걸 잡은 손에 끈적이는 액체가 묻어 있었다.
“이게 뭐야?”
어두워서 뭐가 묻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위태롭게 사다리에 매달린 채 주머니를 뒤져 손전등을 꺼낸 생존자가 자신의 손을 비췄다.
피였다.
“…….”
극도로 당황한 나머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생존자는 천천히 손전등을 위로 향했다.
사다리의 윗부분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활짝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의 주인이 전 근무자의 시신이라는 것을 확인한 생존자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으아아아아악!”
생존자의 비명 소리가 요새의 밤을 깨웠다.
서둘러 사다리를 내려온 생존자는 아직 잠들어 있는 모두를 깨우기 위해 소리쳤다.
정확하게는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무언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으으읍!”
“하필 지금이 근무 교대 시간일 건 또 뭐람. 운도 없지.”
귓가에 파고드는 건 여성의 목소리였다.
차가운 무언가가 생존자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것이 피부를 가르고 몸속에 파고드는 걸 확인한 생존자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성인 남성이 전력을 다했는데도 여성은 거목처럼 미동조차 없었으니까.
‘구원자…….’
상대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생존자의 목에 회생 불가능한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손에 묻은 피를 혀로 핥은 여성은 천장으로 시선을 줬다.
사망한 생존자가 처음 내지른 비명 때문인지 내부가 어수선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무전기를 꺼냈다.
“아아, 정유환. 내 목소리 들려?”
[잘 들립니다. 이채연 씨, 작전은 어떻게 됐죠?]
“당연히 성공이지. 구원자도 아니고 고작 일반인 주제에 내 잠행을 간파할 리가 없잖아. 요새는 무슨, 이렇게나 잠입하기 쉬운데.”
웃으며 말하는 그녀, 이채연의 몸을 검은 안개가 감쌌다.
다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남아 있지만 그녀의 신체는 확실히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바리케이드는요?]
“당연히 처리했지. 아, 그리고 들켰어.”
[무사히 안으로 진입만 했다면 크게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본대를 움직이도록 하죠.]
조금만 있으면 요새에 뮤턴트의 구원자들이 침입해 올 것이다.
목표는 하나.
천연 요새라 불리는 이 아파트를 손에 넣는 것이다.
세력째로 집어삼키는 건 무리가 있으니 무력을 이용해 강탈할 셈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서도 충분할 거 같으니까.”
[저희가 미처 조사하지 못한 강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수해에서 축복을 받은 당신이 강한 건 알고 있지만…….]
뚝.
무전이 끊겼다.
정확하게는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그녀가 일방적으로 무전을 끊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냥 시간인데. 방해하게 둘 수는 없지.”
손에 묻은 피를 혀로 핥은 그녀가 기쁜 듯 웃었다.
“이 세계는 제법 마음에 든다니까.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세계라니. 완전 내 이상향이잖아.”
얼굴 가득 희열에 젖은 이채연이 계단을 올랐다.
* * *
“……으아아아!”
김세연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같은 방에서 잠을 청하던 김세찬과 두부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김세연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두부가 낑낑거리며 김세연의 눈물을 핥았다.
어째서 김세연이 울고 있는지 아는 김세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울어. 그런다고 형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그치만…….”
“야! 다른 사람들 자고 있는 거 몰라? 다들 피곤할 텐데, 너 때문에 깨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세찬 역시 훌쩍이고 있었다.
시현은 쌍둥이가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 나타나 두 사람을 구해 주고 요새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쌍둥이에게 있어 시현은 영웅이었다.
그런 시현이 인천의 안전을 위협하는 거대한 악마 현무와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은 아직 어린 쌍둥이가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에이!”
뺨을 타고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김세찬은 방을 뛰쳐나갔다.
우는 모습을 쌍둥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간 김세찬은 의아함을 느꼈다.
밤이 늦었는데도 복도가 굉장히 어수선했다.
어둠이 내리깔린 복도에 이리저리 손전등이 흔들리며 다수의 생존자들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세찬아!”
누군가가 김세찬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실상 이름만 리더인 민주혁을 대신해 요새를 통솔하고 있는 신민아였다.
“누나, 무슨 일이 있어요?”
“침입자가 있어. 그것도 굉장히 강한 구원자……. 위험할 수도 있으니 너는 안에 들어가 있으렴.”
“침입자요?”
“들어가 있으래도.”
김세찬은 사도다.
그러나 사도이기 이전에 중학생에 불과한 김세찬에게 위험한 바깥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신민아는 자세한 설명을 삼갔다.
그런 신민아의 노력이 무색하게, 어둠 저편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남성 생존자는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뜰 만큼 입이 가벼웠다.
“신민아 씨! 벌써 3층까지 점령당했습니다. 그 여자 하나만 해도 속수무책인데, 지원군까지 있는 거 같아요! 멀리서부터 요새를 향해 접근하는 군용 트럭이 다수 확인됐습니다.”
“쉿, 쉿!”
“벌써 일곱 명이나 살해당했어요! 더 이상 요새에는 가망이 없어요. 도망쳐야 합니다!”
필사적으로 검지를 세워 제 입술을 두드리는 신민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소식들이 생생하게 김세찬의 귀에 들어갔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한참이나 울리던 총소리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잠잠해졌다.
상대방을 사살하는데 성공했거나, 역으로 살해당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헉……. 허억…….”
김세찬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일단 남은 생존자들을 데리고 비상구로 탈출해야겠어요. 남아 있는 구원자들에게 전면전은 피하고 최대한…….”
“하지만 남아 있는 구원자들이 몇 안 됩니다. 그마저도 그 여자를 피해서…….”
바로 옆에 있는 신민아와 남성이 나누는 대화조차 귀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붕 뜬 감각이었다.
비록 안현우와 민주혁의 대립으로 안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하지만, 일단 요새의 생존자들과는 2개월 가까이 함께 생활해 왔다.
모두가 형, 누나, 삼촌, 이모였다.
그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소식은 시현의 죽음을 접했을 때만큼이나 충격이었다.
더 이상 누군가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김세찬은 어둠이 내리깔린 복도를 지나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 줘!”
“팔……. 내 팔이……!”
“꺄하하하하!”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비명에 뒤섞여 여성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큰 충격을 받고 찌그러져 있는 비상문을 열고나서야 김세찬은 여성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기밖에 느껴지지 않는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다.
어째서 총기를 가진 생존자들이 무력하게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여성은 외피를 두르고 있었다. 즉, 최소 2레벨의 구원자라는 의미다.
여성의 앞에는 검을 든 민주혁이 있었다.
어떻게든 자세를 잡고 서 있기는 했지만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어머, 또 애기가 왔네. 여기 어른들은 어디 가고, 왜 너희가 오는 거야?”
살아남은 사람은 여성과 민주혁뿐이었다.
호흡은 더욱 거칠어졌고, 심장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미칠 듯이 뛰었다.
“……아줌마는 누구야?
“아줌마는 이채연이라고 해. 뮤턴트의 구원자란다.”
그녀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손과 소매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기에 일련의 과정은 그녀의 얼굴에 더 많은 핏자국을 만들 뿐이었다.
“왜 사람들을 죽이는 건데?”
“나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리더가 요새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고 하잖아. 하지만 말로 해서 곱게 내줄 리가 없으니 어쩌겠어. 뺏어야지.”
이채연은 불과 수 초 전까지 사람들을 죽였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순진무구한 미소를 만면에 그렸다.
“원 거주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세상은 힘이 곧 진리잖아. 약육강식. 그러니까 약자인 너희들이 빼앗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약육강식…….”
“아직 어려서 잘 모르려나? 그런데 애기야, 너 혹시 구원자니? 으음……. 하지만 아무리 나라 해도 애기들을 죽이는 건 좀 그렇단 말이지. 그러니까…….”
그녀는 피 묻은 손으로 옷깃을 매만지며 웃었다.
“너희 둘, 못 본 척해 줄게. 달아나.”
“…….”
김세찬은 침묵했다.
2레벨 이상의 구원자이며, 사람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고 단신으로 총기를 든 생존자들 사이에서 종횡무진할 만큼 실력도 있다.
뿐만 아니라 기형적으로 생긴 흑색의 단검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잘 모르는 김세찬이 봐도 보통의 무기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민주혁과 힘을 합쳐 2:1로 싸운다 해도 이길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뭐 하고 있어. 기회가 있을 때 달아나야지.”
민주혁이 김세찬의 손을 잡았다.
목소리만큼이나 마주 잡은 민주혁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세찬은 민주혁의 손을 떨쳤다.
‘하지만 내가 달아나면 다른 사람들이 죽어. 두부랑 세연이랑, 민아 누나도!’
쌍둥이 동생의 미소가 김세찬의 등을 떠밀었다.
“기사 서약!”
사망한 생존자의 손에서 단검을 집어 든 김세찬이 권능을 사용했다.
어린아이의 육체가 빛에 휘감기더니 성인의 것으로 변했다.
조금이나마 김세찬을 가엾게 여기던 여성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나랑 싸우려고? 흐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기억해 뒀다가 저승사자를 만나면 말해 주렴.”
보랏빛 단검이 김세찬에게 향했다.
“위대한 존재의 사도, 이채연이 보내서 왔다고.”
* * *
“서둘러! 어물쩍거리면 버리고 갈 거야. 그쪽 아저씨! 내가 필요한 것만 챙기라고 몇 번을 말해!”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요새의 몇 안 되는 구원자들에게 시간을 끌다가 도망치라는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길게 버텨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노예를 부리는 감독관처럼 모질게 생존자들을 채찍질했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익히 아는 생존자들은 군소리 없이 신민아의 지시에 따랐다.
“준비가 끝난 사람부터 밑으로 내려가요! 아, 절대 중앙 계단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외곽에 있는 비상계단을 사용해 후문으로 향하세요. 거기에 판자로 탈출로를 만들어 놨어요. 튼튼하지 않으니 한 명씩 건너야 해요. 그리고 다들 아시겠지만 밖으로 나가면 손전등의 사용은 엄금입니다.”
가장 먼저 짐을 챙긴 생존자부터 하나둘 요새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손이 가장 느린 김세연이었다.
결국 신민아가 나서서 김세연의 짐 싸기를 도왔다.
“다 됐어요.”
“좋아. 그런데…….”
모든 준비를 마친 김세연은 제 몸 만큼이나 큰 보따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물건이기에 가만히 서 있는 데도 몇 번이나 기우뚱거렸다.
“그건 꼭 가지고 가야 해?”
“…….”
김세연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김세연은 거추장스럽고 도망치는데 방해만 되는 보따리를 더욱 끌어안으며 신민아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김세연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저건 인천을 구한 영웅 윤시현이 남긴 유품이며, 쌍둥이는 시현을 굉장히 잘 따랐다.
그러니 억지로 빼앗으면 김세연은 울면서 돌려 달라고 매달릴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알겠어. 가지고 가.”
“그런데 언니.”
“왜?”
“아까부터 세찬이가 안 보여요.”
“…….”
두부를 끌어안은 채 불안한 얼굴로 김세연이 말했다.
조금 전 복도에서 남자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사라진 김세찬이 떠올랐다.
당연히 김세연이 있을 방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설마…….”
신민아는 사색이 되었다.
“머, 먼저 내려가 있어! 혹시라도 언니가 늦으면 다른 사람들이랑 함께 대피소까지 도망가도록 하고. 알겠지?”
그녀는 대답조차 듣지 않은 채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하지만 도중에 발을 헛디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철벅.
손에 따뜻한 액체가 만져졌다.
그것의 정체가 붉은 피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올라오는 위액을 억지로 삼킨 신민아는 몸을 일으켰다.
또각. 또각.
발소리가 들렸다.
부디 김세찬의 것이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신민아는 자신의 기도가 굉장히 헛된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세찬의 것이었다면 저런 구둣발 소리는 나지 않았을 테니까.
“안녕?”
상대는 그늘진 어둠 속에서 발랄한 인사를 해 왔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