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약속의 날이 다가왔다.
쿵. 쿵.
지축이 울렸다.
아파트 옥상에 오른 정은수는 망원경을 들어 올리려다 말았다.
이제 목표는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안면의 주름살까지 식별할 수 있는 장소까지 접근해 있었다.
[우우우우…….]
낮게 흘리는 울음소리조차 고막에 부담을 준다.
“히야……. 멀리서 볼 때도 엄청나다고 느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더 살 떨리네. 어우, 걸을 때마다 땅 떨리는 거 봐.”
“아니, 저거 사람이 잡을 수 있는 게 맞기는 해요? 영화에서나 보던 괴물을 실제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같은 조로 편성된 이은아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꼴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벌어지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기세다.
정은수는 망원경을 들고 다른 대기 포인트를 살폈다.
양옆 건물의 옥상 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기하고 있다.
현무의 위용을 눈에 담은 그들은 하나같이 떨고 있었다.
정은수는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십분 이해했다.
인간인 이상 어떻게 저 덩치를 보고 겁먹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내 역할이 중요해.’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미친 듯 뛰어 대는 심장이 조금이라도 더 잠잠해질 수 있도록 지그시 눈을 감았다.
쏟아지는 비는 여전히 그의 몸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몸을 차갑게 식히는 비가 고맙게 느껴졌다.
‘내가 성공해야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저 사람들의 등을 밀어 줄 수 있어.’
각오를 다진 정은수가 난간 위로 올라갔다.
“여기요.”
기다리고 있던 이은아가 그에게 양궁과 활을 건네주었다.
“신호 좀 부탁할게요.”
“제가요?”
“저 지금 엄청 쫄리니까 역할 분담 좀 해 주세요. 긴장해서 손이라도 삐끗하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도 손발이 덜덜 떨리네.”
“아, 알겠어요. 근대 진짜 실수하면 안 돼요.”
“물론이죠.”
“그런데 실패하면 저 도망쳐도 되나요?”
“아 좀!”
한껏 긴장해서 몸이 뻣뻣해진 이은아로부터 등을 돌린 정은수가 활 끝에 불을 붙였다.
기름을 먹여 놓은 천이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활활 타올랐다.
시위를 당긴 정은수가 권능을 사용했다.
그러자 멀리 보이던 것들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쿵. 쿵.
현무는 아주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런 현무의 앞에, 쌓아 놓은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있었다.
덩어리 밑에서 빠져나온 기름 먹은 천이 보인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였다.
“지, 지금이에요!”
있는 힘껏 소리친 이은아의 외침에 정은수는 시위를 놓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희미하게 청색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불꽃의 적색과 청색의 기류가 뒤섞인 한 줄기 섬광이 어둠이 내려앉은 밤거리를 가로질렀다.
빠른 속도로 쏘아진 화살이 정확하게 천을 꿰뚫었고, 옮겨 붙은 불이 순식간에 천을 태우기 시작했다.
정은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됐다!”
불꽃은 길게 늘어진 천을 따라 콘크리트 더미 속으로 파고들었다.
절묘한 타이밍에 현무의 오른쪽 다리가 콘크리트 더미를 밟았다.
콰아앙!
폭발이 발생했다.
솟구친 화염과 콘크리트 파편들이 밑에서부터 쳐올리듯 현무를 공격했다.
현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큰 대미지를 노린 행위가 아니었으니까.
조금 전의 공격은 일종의 신호탄이다.
콰아아!
굉음이 울리며 저 아래 지상으로부터 한 줄기 섬광이 쏘아졌다.
첫 번째 섬광은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도시 곳곳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고 있던 연합군 소속의 구원자들이 신호를 확인하고는 권능을 쏟아 냈다.
권능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원거리 사출 계열 중 가장 흔한 은색 섬광이 주를 이뤘다.
발밑에서 시작된 폭발에 이어 신의 축복이 담긴 권능의 향연.
아무리 현무로 인해 발생한 폭우가 구원자의 능력을 갉아먹는다지만 머릿수가 깡패였다.
화들짝 놀란 현무가 우측 머리를 흔들었다.
그 행위만으로 주변의 건축물이 무너지고 지반이 갈라졌다.
[뒤는 없다 생각하고 전력을 다하세요!]
무전기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아래, 현무와 가장 가까운 곳.
누구보다 위험한 장소에서 무전기를 들고 있을 시현의 음성이었다.
현무가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지축이 크게 흔들리며 사출 중이던 권능 몇 개가 갈피를 잃고 허공을 훑었다.
굉음과 함께 빌딩의 밑동에서 폭발이 발생했다.
붕괴한 빌딩이 쓰러지며 현무의 좌측 머리를 덮쳤다.
“저리 비켜요!”
히스테릭한 일갈을 내지른 박여래가 달려와 난간에 한 발을 올렸다.
한껏 뒤로 젖힌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불덩이가 들려 있었다.
원소 계열 중에서도 우수한 화력을 자랑하는 화염 계열 권능인 초열이다.
그녀가 던진 불덩어리가 현무의 좌측 머리를 집어삼켰다.
이 때다 싶었던 정은수는 나머지 하나 남아 있던 기름 먹은 심지에 불을 붙였다.
다시 한번 현무의 발밑에서 폭발이 발생했다.
솟구친 대량의 연기가 현무의 거대한 덩치를 덮었다.
“……된 건가?”
지금까지의 공격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연합군의 전력이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대형 악마가 상대라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정은수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 연기가 걷히기만을 기다렸다.
쿵.
“제길, 알고는 있었지만 헛된 기대였나.”
“그쪽이 부활 주문을 외워서 그렇잖아요. 아니었음 뒈졌을지도 모르는데!”
한순간 대량의 정신력을 쏟아 내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박여래가 매섭게 정은수를 노려본다.
정은수로서는 굉장히 억울했다.
거대한 현무의 두 머리가 자욱한 연기를 뚫고 나왔다.
주변으로 깎여 나온 외피의 부스러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우우우우!]
거대한 울음소리가 대기를 떨리게 만들었다.
“크윽! 무슨 소리가…….”
정은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주저앉았다.
강한 풍압에 신체가 뒤로 밀려났다.
근성이나 의지로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덩치에서 우러나는 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기가 된다.
현무의 우측 머리가 크게 입을 벌렸다.
대량의 공기가 현무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곳에 모인 모든 구원자들은 볼 수 있었다.
현무의 목구멍 언저리에서 녹색 빛을 발하는 무형의 덩어리가 점점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구원자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던 현무의 붉은 눈동자가 이번에는 착실하게 그들을 담고 있었다.
“이러면 된 거겠지?”
나지막이 내뱉는 정은수의 목소리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처럼 파르르 떨렸다.
* * *
“이놈의 비는 진짜 더럽게 거추장스럽네.”
잿빛으로 물든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일까.
도통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현은 알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거대한 산을.
정확하게는 산이라 생각될 만큼 거대한 덩치를 가진 현무를 토벌하지 않는 이상, 이 비는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우우우우!]
현무는 울부짖고 있었다.
귀찮은 파리 정도로 취급하던 구원자들이 퍼붓는 맹공에 서서히 짜증이 난 것이다.
그 증거로 현무는 정면에 있는 건물을 공격 목표로 지정하고 힘을 모았다.
‘오른쪽 머리가 다루는 것은 물의 힘. 가만두면 쓰나미라도 맞은 것처럼 일대가 초토화될 거야.’
구원자들이 모여 있는 세 개의 건물은 버티지 못할 것이고, 붕괴하여 물살에 휩쓸릴 것이다.
당연히 많은 구원자들이 죽어 나갈 터다.
그를 방지하기 위해 시현이 나설 차례다.
시현의 오른쪽 손등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신현수의 비서인 이은아가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낙인이었다.
낙인은 이은아가 가진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한 빛을 흩뿌렸다.
[오오오오!]
그러는 사이에도 현무는 착실하게 힘을 모았다.
구원자들이 이를 악물고 권능을 쏟아 냈으나 현무가 힘을 모으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이윽고 한계까지 힘을 모은 현무가 머리를 쭉 내밀었다.
[으아아아아! 온다! 진짜 온다! 시, 시현 씨, 살려 주세요!]
윗주머니에 꽂아 둔 무전기에서 경박스럽기까지 한 정은수의 비명이 들려왔다.
온갖 오두방정을 떠는 박여래의 음성 또한 희미하게 섞여 나왔다.
[가능한 거죠? 저희 진짜 살 수 있는 거죠?]
“가만히 지켜보고 계세요. 이러다가 집중이 흐트러질 거 같으니까요.”
[히익!]
가냘픈 비명을 끝으로 무전기가 침묵했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시현은 정신을 집중했다.
콰아아아아!
현무의 쩍 벌어진 입에서 물줄기가 토해졌다.
말이 좋아 물줄기지, 그 직경이 무려 15미터에 육박했다.
생존자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물줄기가 빌딩에 닿기 직전, 시현은 권능을 사용했다.
“일방통행.”
시현의 발밑에서 시작된 녹색 빛이 한순간에 거대한 직사각형의 장막을 만들어 냈다.
장막은 쏘아지는 대량의 물줄기를 집어삼켰다.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기에 충분한 양의 물들이 삼켜지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단순히 방어력만 놓고 본다면, 가히 최고의 권능이라 손꼽히는 일방통행이다.
문자 그대로 허락받지 못한 방향에서의 공격을 완전히 무효화시켜 버리는 압도적인 능력 앞에서 현무가 가한 회심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우우…….]
모았던 힘을 모두 토해 낸 현무의 우측 머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과도한 힘을 사용한 대가로 그로기 상태에 빠진 것이다.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 * *
“진짜로 막았어…….”
정은수는 자신의 뺨을 꼬집어 봤다.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은 이 모든 게 꿈이 아닌 현실임을 증명했다.
“100마리가 넘는 네크로 비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킬 정도의 공격력을 가졌는데,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막아 낼 정도의 수비력까지 갖춘 권능이라고? 원래 3레벨은 다 저래?”
옆에 있던 박여래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강한 힘을 가진 구원자가 아군이라는 사실이 든든하기는 하지만, 그는 영원한 아군이 아니다.
이번 작전에 한해서만 인천의 세력들을 돕는 것일 뿐, 그의 소속은 서울에 있는 호텔이다.
‘언젠가 입장이 달라져 우리를 적대하게 된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이었다.
박은수는 강하게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 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믿을 사람은 시현뿐이다.
“뭐 하고 있어요?”
그녀가 멍하니 서 있는 정은수의 등짝을 후려쳤다.
현무의 오른쪽 머리가 그로기 상태에 빠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저, 전원 공격!”
그제야 본분을 떠올린 정은수의 다급한 외침에 따라 정은수의 휘하에 있는 시청 구원자들이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경이로운 위력을 가진 현무의 공격을 막았던 녹색의 장막은 여전히 허공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현이 사용한 권능의 이름은 일방통행.
이름에 걸맞게 정면에서 가해진 현무의 공격은 차단되었으나, 후방에서 가해지는 구원자들의 공격은 장막을 통과했다.
지쳐 있는 현무의 우측 머리에 연달아 권능이 적중했다.
외피 탓에 대미지가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구원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상위 악마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외피를 벗겨 내는 것이란 걸, 그때까지는 공격의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시현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권능을 퍼붓던 박여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현무의 오른쪽 머리를 감싸고 있는 외피가 아까보다 얇아진 거 같지 않아요?”
“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애초에 공격받을 때 아니면 투명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아요.”
“아니야. 확실히 얇아졌어요.”
즉, 공격이 통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녀는 신이 나 온 힘을 다해 커다란 불덩어리를 만들어 냈지만, 불덩어리는 우측 머리에 닿지 못했다.
그로기 상태에 빠진 우측 머리를 지키기 위해 좌측 머리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우어어어어!]
아까 우측 머리가 그랬던 것처럼 좌측 머리도 입을 벌리고 힘을 모았다.
“와……. 아까랑 같은 규모의 공격이 다시 가해지는 거야? 에이, 설마. 아니겠지?”
정신력을 거의 한계까지 소모한 까닭에 헐떡이던 박여래가 경기를 일으켰다.
열심히 화살을 쏘던 정은수도 식은땀을 흘렸다.
비록 시현의 장막에 막히기는 했지만 그만큼 현무가 보여 준 공격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인천이 지옥으로 변모한다는 시현의 말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저런 걸 막 쏴 댔다가는 지형이 바뀌고 말 것이다.
‘게다가 어째 시현 씨의 방어막이 불규칙적으로 떨리는 것 같은…….’
그러나 정은수는 도망이라는 선택을 머리에서 지웠다. 시현을 믿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아!
우측 머리가 물을 다룬다면, 좌측 머리가 다루는 힘은 바람.
쩍 벌어진 주둥이에서 잿빛 폭풍이 쏘아졌다.
물줄기가 그랬던 것처럼 폭풍 역시 녹색의 장막에 삼켜졌다.
좌측의 머리 또한 그로기 상태에 빠진다.
즉, 지금부터는 안심하고 공격을 퍼붓기만 하면 된다.
“우오아아아아!”
기쁨의 함성을 내지른 정은수가 신이 나 활시위를 당겼다.
승산이 보였다.
승리를 위한 함성이 전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