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요새의 옥상에 오르면 인천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도는 아니라도, 제법 먼 곳까지 둘러보는 게 가능하다.
상당수의 고층 건물이 두 차례의 아포칼립스를 겪으며 붕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만큼은 이 탁 트인 경치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저 멀리, 느리지만 착실하게 요새를 향해 다가오는 대형 악마의 모습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손톱보다 작게 보이는 저 악마가 앞으로 얼마나 커질지 걱정이었다.
시현은 그 악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역시 현무인가.”
원작에도 등장한 대형 악마, 현무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우선은 월등한 방어력.
저 두꺼운 등딱지는 고 레벨의 구원자라도 뚫을 수 없다.
머리도 상당 부분이 보호받고 있으며, 가까스로 상처를 입힌다 해도 회복 능력을 이용해 금세 치료해 버린다.
그 외에도 신체 능력을 저하시키는 비를 부르는 능력.
대기를 찢어발길 듯한 파동.
그리고 광포화까지.
놀라울 만큼 느려 터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단점이 없다시피 한 생물이다.
그런 괴물이 지금 요새를 노리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신혈의 기둥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중소형 악마들이 신혈을 노리고 달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혈은 악마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만들지만, 그게 생존 본능까지 거스를 정도는 아니다.
“형! 여기서 뭐 해요?”
“으아! 비가 너무 많이 와!”
옥상 문이 열리며 쌍둥이가 등장했다.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비바람이 워낙 강해서 그리 효과는 없어 보였다.
순식간에 김세찬의 우산이 뒤집어지고, 김세연은 우산을 놓쳐 버렸다.
삽시간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이 된 쌍둥이는 울상이 됐다.
“우씨……. 다 젖었어.”
“왕왕!”
그런 쌍둥이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두부는 마냥 신이 나서 빗속을 뛰어다녔다.
시현은 외투를 벗어 쌍둥이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왜 나왔어?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기껏해야 10세도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외모를 가진 쌍둥이지만, 두 사람은 엄연히 중학생이며, 사도다.
온갖 질병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축복을 가진 구원자가 고작 비 좀 맞았다고 감기에 들 리가 없지 않은가.
제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외형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색안경을 끼게 된다.
“괜찮아요.”
“그래도 추우니까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쌍둥이는 시현의 양쪽 팔을 잡아당겼다.
시현은 못 이기는 척 얌전이 쌍둥이를 따라갔다.
옥상을 벗어난 순간 수많은 시선이 시현에게 꽂혀 들었다.
옥상의 바로 아래층 복도에서 시현을 기다리고 있던 103동의 생존자들이 보내는 시선이다.
그 중에는 101동의 생존자들도 있었다.
안현우와 사실상 배후에서 그를 조종하던 참가자 여성이 사망한 후 101동 생존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 살길을 찾아 바깥으로 달아난 이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101동 참가자의 리더인 민주혁의 아래 무릎을 꿇었다.
민주혁은 그들을 받아 줬고, 그렇게 참가자 민주혁은 요새를 손에 넣었다.
그 민주혁이 엉거주춤 서 있는 생존자들을 대표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순진무구한 인상에 오동통한 체구, 하지만 눈빛만큼은 강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안현우를 밀어내고 둘로 나뉘었던 세력을 통합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처음에 저희 세력원이 다짜고짜 총을 쏜 것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말투와 태도 또한 제법 어른스럽다. 쌍둥이와 같은 나이가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반갑습니다. 윤시현이라고 합니다.”
시현은 민주혁을 단순한 14살 꼬마가 아니라 한 사람의 구원자이자 한 세력의 리더로서 대했다.
그러자 민주혁은 아닌 척하면서도 고양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면에서는 어린애다웠다.
“저기……. 혹시 소속된 세력이 없으시다면 요새에서 함께…….”
“죄송합니다.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요.”
시현은 민주혁의 제안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단칼에 거절했다.
예의가 아니란 것은 알지만, 애초에 민주혁 역시 쌍둥이를 넘기느니 죽게 놔두겠다는 심산으로 요새에 방치해 뒀다.
쌍둥이의 부탁이 있어 민주혁네 세력을 돕기는 했지만, 시현은 여전히 민주혁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쌍둥이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시현이 시선을 주자 쌍둥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민주혁은 머뭇거렸다.
“네? 하지만 그건…….”
참가자인 민주혁은 쌍둥이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쉽사리 쌍둥이를 내어 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현은 애초에 허락을 받을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통보다.
애초에 쌍둥이를 한번 버린 민주혁에게 무언가를 주장할 만한 권리는 없으니까.
“누나…… 도와줘.”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민주혁은 결국 옆에 있던 여성의 소매를 당겼다.
물결치는 긴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20대 후반의 여성은 자연스럽게 민주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으로 나섰다.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신민아라고 합니다.”
“신민아?”
시현은 화들짝 놀라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인물의 이름이었으니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옆에서 으스대는 민주혁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신민아.
그녀는 아주 잠깐 사이 다양한 업적을 이뤄 냈다.
아파트의 생존자들을 모아 하나의 세력으로 일궈 낸 것도 그녀였고, 인근의 군부대로부터 대량의 총기와 탄약을 얻어 낸 것도 그녀였으며, 시청에 자리한 세력과 협상해 인천연합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전부 그녀였다.
낙인을 받지 못해 전투 면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지만, 그녀가 다양한 방면에서 유능하다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다.
그러나 신민아는 초창기에 그녀를 아니꼽게 본 안현우에게 뒤를 찔려 목숨을 잃고 만다.
진즉에 목숨을 잃었어야 할 그녀이지만, 그녀의 운명을 알고 있는 민주혁이 원작을 뒤틀어 기어코 살려 내고 만 것이다.
어째서 신민아가 민주혁을 대신해 앞으로 나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말씀하시죠.”
“당신을 따라가는 게 쌍둥이의 선택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그걸 말릴 생각은 없어요. 애들의 방치를 선택한 저에게 그럴 만한 권리도 없고요. 부디 저와 달리 그 애들을 잘 보살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누, 누나?”
도움을 요청한 신민아가 자신의 뜻과 상반되는 의견을 내놓자 민주혁은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신민아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낼 뿐이다.
무언가 크게 결심한 게 있는지 신민아의 표정은 굉장히 진중하다.
“하지만 시현 씨, 부디 그 애들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의 지극히 일부분이라도 좋으니 저희를 가엾게 여기고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요?”
“가엾게 여기다니요?”
“아시잖아요. 저 거대한 악마가 며칠 내로 요새에 도달할 거라는 걸.”
“대형 악마의 목표는 신혈입니다. 그것만 탐하면 정신을 차리고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겠죠. 그때까지 잠시 요새를 비워 두면 되는 거고요.”
“저만한 덩치의 악마가 방문했는데, 요새가 멀쩡할 리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요새가 처한 현 상황을 설명했다.
“건물은 죄다 파괴될 거고, 돌아올 곳을 잃은 저희는 새로운 거점을 찾아야 해요. 하지만 저희 세력원 전부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은 대부분 주인이 있거나, 악마의 둥지로 사용되거나, 떠돌이 악마의 안식처로 이용되고 있어요. 다른 생존자들과 마찰을 빚을 게 아니라면 악마를 소탕해야 하는데, 저희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죠.”
설마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생존자들은 얼이 빠져 신민아에게 진위 여부를 묻고 있었다.
심지어 참가자인 민주혁마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쌍둥이의 능력이 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쩌겠어요. 잘못은 저에게 있는걸요.”
은근슬쩍 쌍둥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그녀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세력의 휘하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는데. 요새는 인천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축에 속해요. 이 정도 인원을 전부 받아 줄 수 있는 세력은 없죠. 그러니까 시현 씨가 도와주셨으면 해요.”
설명을 마친 신민아가 허리를 직각으로 접었다.
“물론 맨입으로 도와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시현 씨가 인천에 오신 이유, 그것을 말씀해 주신다면 저희는 전력으로 그걸 돕겠어요.”
시현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작에서 유능한 인재라고 설명되어 있었지만, 그래 봤자 구원자도 아닌 생존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겠냐고 은연중에 깔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욕심이라는 것이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쌍둥이를 데려가는 마당에 민주혁이 애써 살려 놓은 신민아까지 탐내는 건 도가 지나치다.
무엇보다 시현이 인천까지 온 이유는 인재의 영입이 아닌 인천연합과 손을 잡는 것에 있었다.
“알겠습니다. 기꺼이 도와드리죠.”
자신이 손해 볼 건 없었기에 시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거니와 지금의 선택은 인천연합의 중심지인 시청으로 가는 티켓이 되어 줄 테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신민아의 낯빛이 한층 밝아졌다.
많은 생존자들의 생사를 갈라놓을 중대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 기분이 좋았던 신민아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래도 요새를 노리고 오는 대형 악마가 한 마리라 다행이에요. 두 마리였으면 어떻게 됐을지……. 어쩌면 새로운 거점이고 뭐고 인천에서 달아나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로서는 정말 농담 삼아 던진,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듣는 시현은 아니었다.
“……두 마리?”
그녀의 말을 통해 자신이 놓치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시현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어째서 그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을까.
간담이 서늘해졌다.
“신민아 씨, 혹시 인천의 지도 가지고 계십니까?”
“저희가 사용하던 지도가 있어요.”
시현의 심각한 표정을 확인한 그녀는 별다른 말없이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그동안 유용하게 사용했는지 지도에는 여러 표시가 되어 있었다.
위험한 악마가 있는 장소는 해골 표시.
더 이상 식량이 남아 있지 않은 장소에는 X 표시.
이런 식으로 말이다.
“죄송한데 낙서를 조금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신민아에게 인천 지도는 구하기도 힘든, 굉장히 중요한 아이템이다.
그러나 시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그녀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은 지도에 색칠을 시작했다.
강화도와 영종도를 포함한 섬은 제외하고, 본토에 파란색과 빨간색을, 자신의 기억에 따라 번갈아 가며 칠해 인천을 좌우로 나눴다.
인천 지도의 좌측은 청색이 되었으며, 우측은 적색이 되었다.
시현은 좌측 청색 구역의 상단에 별을 그렸다.
“이 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귀한 지도를 못 쓰게 만들어 가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호기심이 생긴 신민아가 질문했다.
“현무……. 그러니까 지금 요새를 향해 접근해 오고 있는 대형 악마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한 시현은 지도의 붉은색이 차지하고 있는 부평역에 별을 하나 더 그려 넣었다.
마지막으로 삼각형을 이용해 요새의 위치를 찍었다.
요새는 지도의 우측 상단인 적색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망할.”
대뜸 욕지거리를 내뱉는 시현에게 의아스러운 시선이 꽂혀 들었다.
숨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시현은 자신이 도출해 낸 결과를 공개했다.
“아무래도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습니다.”
“네? 시현 씨! 갑자기 그게 무슨……. 저희는 의지할 사람이 시현 씨밖에 없는데…….”
“인천이 곧 불바다가 될 텐데, 새로운 거점이 무슨 소용입니까?”
* * *
시현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째서 인천이 불바다가 될 거라는 망언을 퍼부었는지를 말이다.
다행히도 요새의 리더이면서 같은 참가자이기에 시현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민주혁이 시현의 편을 들어 주었다.
덕분에 요새의 생존자들을 설득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감당이 안 돼요. 한 마리만 해도 기후에 영향을 줄 만큼 무지막지한데, 두 마리째 대형이라니…….”
“이건 제 추측이지만, 저 둘이 맞붙으면 인천 전역에 회생 불능의 피해가 발생할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신민아는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그러나 현실을 도피하는 몇몇 심약한 생존자와 달리, 그녀는 제대로 이성을 붙잡고 시현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건 분명 방도가 있으신 거죠?”
“물론입니다.”
시현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는지 신민아는 참았던 숨을 깊이 토해 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씀만 해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대형 악마는 요새뿐 아니라 인천 전체에 닥쳐온 위기입니다. 그러니 해결하는 것도 인천에 거주하는 모든 구원자들이 나서야겠죠. 인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세력이 어디죠? 그곳과 연락을 취하고 싶습니다.”
인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세력은 누가 뭐라 해도 시청이며, 시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질문을 던진 이유는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공개한 정보도 아슬아슬한데, 이 이상은 의심을 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 신민아라면 금방 해답을 도출해 내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세력이라면 시청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신민아는 결국 시현이 원하는 해답을 내놓았다.
“얼마 전에 시청에서 온 사람이 주고 간 물건이 있어요. 급하게 소식을 주고받을 때 꼭 필요할 거라면서…….”
시현은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욕망을 꾹 참은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했다.
“그게 뭐죠?”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양해를 구한 신민아가 방을 나갔다.
오래지 않아 되돌아온 그녀는 책상 위에 손바닥 사이즈의 종이 두 장을 올려놓았다.
앞면은 여백, 뒷면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구원자의 권능이 담긴 종이에요. 여기에 적은 내용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고요. 1회용이니 사용에 주의해 주시고. 다른 하나는 답신용이에요.”
“감사합니다. 이게 있으면 당장이라도 시청에 연락을 넣을 수 있겠군요.”
종이를 받아 든 시현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거였다. 시현이 요새에 방문한 진짜 이유 말이다.
그가 목표로 하는 인천연합의 대표는 신현수라는 인물의 구원자다.
그와 가장 자연스럽고 빠르게 만날 수 있는 방법.
그게 바로 이 별거 아닌 것처럼 생긴 종이다.
이걸 이용하면 시청에 있는 신현수에게 직통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가능하다.
단점이라면 종이가 너무 작아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일까.
시현은 본격적으로 종이와 씨름을 시작했다.
기회는 한 번뿐.
반면 지면은 터무니없이 적다.
‘그 인간, 굉장히 신중한 사람이라 어지간한 문구로는 움직이지 않을 거란 말이지.’
어떻게든 최소한의 문자만 이용해 상대방을 자극해야 한다.
글을 쓰는 건 시현의 특기가 아니다. 때문에 그는 몇 마디 문장을 만드는 데도 한참이나 고민해야 했다.
머리를 굴리며 연필을 깎다 보니 연필심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이래서야 연필이라기보다는 투척 무기에 가깝다.
“혹시 또 필요한 게 있다면 부담 없이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시현 씨를 전력으로 도와드릴 테니까요.”
고민에 빠진 시현을 방해하지 않으려 신민아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러나 신민아의 배려는 어느 침입자로 인해 그리 효과를 보지 못했다.
“와왕!”
침입자의 정체는 두부였다.
시현의 주위를 몇 바퀴 돌던 두부가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먹을 걸 내놓으라는 신호다.
영리한 두부는 시현이 먹을 것을 가장 많이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두부야! 일하는데 방해하면 안 돼.”
뒤늦게 들어온 김세연이 두부를 안아 들었다.
먹을 걸 얻는데 실패한 두부의 꼬리가 축 처졌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자, 두부도 사과해. 죄송합니다.”
“끼잉.”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김세연을 보고 있자니, 무의식적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괜찮아. 방해는 아니야.”
시현의 허락이 있었기에 김세연은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그러다 그냥 앉아 있기 심심했는지 김세연이 힐긋거리며 편지에 눈길을 줬다.
“……아.”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세연아, 이리 와서 이 종이에 받아쓰기 하나만 해 줄래?”
“그런 거 초등학교 1학년 때 졸업했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도움이 되고 싶었는지 순순히 와서 자리에 앉는다.
김세연이 연필을 잡는 걸 확인한 시현은 또박또박 대사를 읊었다.
“살려 주세요.”
“……끝?”
“끝. 다급해 보이는 느낌이 들게끔. 뒤에서 악마가 쫓아온다고 생각하고 써 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김세연은 시현이 읊은 대사를 받아 적었다.
주문대로 삐뚤삐뚤하면서도 급하게 갈겨쓴 느낌이 강한 필체다.
“됐어요!”
“잘했어.”
거기에 시현은 물방울을 몇 개 떨어뜨렸다.
마치 눈물자국처럼 종이가 얼룩지는 것을 확인한 시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답신용 종이에 반응이 왔다.
<1시간 내로 도와줄 사람을 파견할 테니, 꼭꼭 숨어 있으렴.>
신현수.
굉장히 이성적인 인물이지만, 그는 아이에게 약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