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임태연 씨, 한강에서 낚시는 계속할 생각이십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임태연이 낚시꾼들에게 시선을 주자, 그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이제는 잡은 물고기를 혼자 독차지하던 식욕의 마왕도 죽고 없다.
노고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 그들도 기쁜 마음으로 낚싯대를 드리울 것이다.
“그렇다면 저희 호텔과 주기적으로 교역을 하지 않겠습니까?”
“네? 교역이요?”
예기치 못한 제안이었던 듯 임태연은 한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가 당황한 건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그것 참……. 흥미롭네요.”
어느 순간 임태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시현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임태연이 모를 리가 없다.
“알겠습니다. 기꺼이 물고기의 일부를 주기적으로 저희가 제공해 드릴게요. 원한다면 무상으로요.”
그는 은혜를 아는 인간이다.
시현 덕분에 교회가 종말을 피해 가게 되었는데, 그깟 물고기 몇 마리 주기적으로 보내 주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그러나 시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뭐든 해 줄 것처럼 감사해하고 있지만, 반복해서 무언가를 받아먹기만 하면 그들의 감정은 이내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이다.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그래야 오늘 쌓아 올린 두 세력 간의 호의적 관계가 앞으로도 길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할 수는 없죠. 저희는 이 녀석이 만든 아이템을 제공하겠습니다. 이렇게 보여도 천수민은 에르가의 사도입니다.”
시현은 옆에 있는 천수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말인즉 이곳에 오고 싶다면 일을 해서 결과물을 만들고, 그것을 교환하는 행렬에 끼라는 소리다.
다행히도 시현의 뜻을 곡해 없이 이해했는지 천수민은 비장한 각오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천살성 이나연, 나태의 군주 강소하. 거기에 이어 에르가의 사도까지?”
임태연의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역시 시현 님, 대단하시네요.”
“그리고 또 하나.”
“여기서 뭐가 또 있습니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만, 운이 좋다면 수호나무의 열매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겁니다.”
“…….”
이제는 말문이 막힌 건지 임태연은 입만 벙긋거렸다.
한참이나 눈알을 굴리던 임태연은 이내 허탈한 미소로 답했다.
“그걸 감당하려면 아무래도 낚시꾼의 수를 배 이상으로 늘려야 할 거 같네요.”
뭐가 어찌 되었건 협상을 체결한 두 남자는 악수를 나눴다.
이 험난한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아군 세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몹시 든든해졌다.
비록 교회가 그리 강한 세력은 아니지만,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니 포텐은 상당할 터.
앞으로는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시고, 혹시 근처를 지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들러 주세요. 할 수 있는 한 성대하게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임태연의 말이 끝을 맺은 후, 한 남자가 시현에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얼마 전 시현에게 자신들의 수호신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던 2등 시민이었다.
설마 또 수호신이 되어 달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려나 싶어 미간을 구겼다.
“시현 님, 당신은 저희들의 구원자이십니다.”
그의 말에 시현은 겨우 구겼던 얼굴을 펼 수 있었다.
‘구원자라…….’
늘 타인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자라 소개해 왔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말한 구원자는 지금까지 스스로가 말해 온 구원자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 * *
“오빠! 어서 오세요.”
호텔로 돌아간 시현을 이나연이 반겨 주었다.
낮잠과 땡땡이의 대가로 온갖 고생을 해야 했던 강소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나 보다.”
“그러게요.”
그사이 강소하와 친해진 건지 천수민도 그를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다 강소하 같은 못 써먹을 인간이 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들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저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해 시현은 천수민을 호출했다.
“천수민, 곧바로 제작을 부탁해도 되겠어?”
“음……. 솔직히 말해 자신은 없지만 해 볼게요.”
다행히도 천수민은 의욕을 보였다.
호텔에는 아직 빈방이 잔뜩 남아 있었다.
시현은 그 중 하나를 천수민을 필두로 장래의 대장장이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먼저 안쪽에 불필요한 가구들을 싹 바깥으로 빼고, 오로지 천수민이 권능을 사용하기에 좋은 환경으로 개선했다.
그 과정에서 제법 많은 토큰이 소모되기는 했지만, 장래를 위한 투자였기에 그리 아까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성수…….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덕분에 빈털터리야.”
매주 조회 수에 비례해 참가자에게 지급되는 보수로 받은 토큰.
세력의 리더로서 받는 토큰.
이번에 교회의 생존자들을 구한 일이 선행으로 치부되어 얻은 토큰까지.
시현이 가진 토큰의 양은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그 절반은 방을 꾸미는데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절반은 현재 시현이 가지고 있는 유리병 안에 든 백색의 액체를 구매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게 대체 뭔데 그래요?”
천수민이 호기심을 보였다.
앞으로 아이템 제작을 위해서는 천수민 역시 필수로 알아야 하는 사항이었기에 시현은 입을 열었다.
“성수야.”
“성수요?”
“몬스터를 잡으면 그 시체는 짧으면 수 초. 길게는 수일 내로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천수민은 교수의 강의를 열정적으로 경청하는 대학생처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악마를 몇 번 봤어요.”
“그런데 가끔 사라지지 않고 남는 부위가 있어. 그걸 두고 드롭 아이템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아이템이라 해도 결국은 악마의 사체 일부분이잖아.”
“그렇죠.”
“그냥 사용하게 되면 정신이 서서히 오염되다가 결국에는 미쳐 버리게 돼. 권능 또한 사용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성수를 이용해 저주를 제거한 후에 사용하는 거야.”
시현은 성수를 양동이에 담고 거기에 드롭 아이템, 구울의 팔을 집어넣었다.
그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자 구울의 팔에 서서히 빛이 맺히기 시작했고, 반대로 맑고 깨끗하던 성수는 탁하고 더러워졌다.
“자, 이걸로 정화 완료. 이제 사용해도 돼.”
“사용해도 된다 하셔도……. 뭘 어떻게요?”
“그건……. 나도 모르지.”
시현의 무책임한 발언에 천수민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
“……뭐.”
“…….”
“……진짜 몰라. 애초에 축복과 권능의 사용법은 같은 권능을 가진 구원자에게 배우거나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거란 말이야. 정 모르겠으면 일단 권능을 사용해 봐도 되고.”
에르가의 권능이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으로 등장해 참가자들 사이에 널리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밤새 원작을 뒤져 봐도 정확하게 에르가의 권능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냥 그런 게 있었다는 수준으로 묘사되는 게 전부다.
그렇기에 천수민을 위해 시현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끄응……. 진짜 너무하네.”
얼굴을 한껏 구긴 천수민이 질색하며 구울의 팔을 받아 들었다.
그것을 작업대 위에 내려 둔 채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하루 이틀 정도로는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집중하고 있는 천수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시현은 조용히 작업실 문을 닫았다.
* * *
천수민의 작업이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라 판단한 시현은 곧바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뭐예요.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밖에 나가려는 거예요? 어디 숨겨 둔 애라도 있어요?”
멋대로 시현의 침대를 차지한 이나연이 입술을 잔뜩 내민 채 투덜거렸다.
“아쉽게도 일이야. 전에 인천에 갈 일이 있다고 했잖아.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겨서 뒤로 미뤄졌으니 조금이라도 빠르게 출발해야지.”
아포칼립스 이전에는 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이면 충분히 오갈 수 있는 게 서울과 인천의 거리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오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도로가 죄다 뒤집어지고 그나마 멀쩡한 도로는 버려진 차들이 가로막고 있으며, 엔진 소리를 내면 당연하다는 듯 악마가 달려드는 세상이었다.
서울과 인천까지의 거리는 예전의 서울과 부산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그렇기에 식량, 의복, 기름 등 챙겨야 할 게 생각보다 많았다.
그것들을 차의 뒷좌석에 꾸역꾸역 들이밀고 있으려니, 무언가를 품에 안은 천수민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 시현이 형! 행님!”
천수민은 예전과 비교해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달라졌다.
어둡고 음침하며 주먹을 부르는 꼬맹이는 오간데 없고, 사람을 잘 따르는 강아지처럼 밝게 행동하는 딱 제 나이 대의 소년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천수민을 대하는 시현의 말투나 표정 또한 온화해질 수밖에 없었다.
“뭔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제가 어젯밤에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천수민의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제야 시현은 천수민이 안고 있는 물건에 시선을 주었다.
장갑처럼 생겼으나 손가락부터 손등, 나아가 팔목까지 보호하는 금속 비슷한 무언가가 장식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기존에 호텔에는 없던 물건이다.
“성공했구나?”
“네, 어제 막 권능으로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다루는 방법을 알게 됐어요. 제가 가진 토큰으로 설계도를 구매한 다음 그걸 따라서 만들었죠.”
천수민은 장갑을 내밀었다.
<정화된 구울의 왼손>
구울의 왼팔을 정화해 만든 장비.
에르가의 강한 축복이 담겨 있다.
뛰어난 방어 성능을 가지고 있으며, 금속 무기를 이용한 공격을 받았을 경우 강한 충격을 반사해 금속 무기의 피로를 증가시킨다.
시현은 장갑을 착용했다.
애초에 시현의 사이즈에 맞춘 건지, 장갑은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딱 맞았다.
착용감은 물론 성능 또한 확실했다.
단검을 이용해 살짝 금속 부분을 가격하자 칼날이 크게 진동했다.
아마 몇 번만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단검은 깨져 버릴 것이다.
“잘 만들었네. 수고했어.”
시현은 솔직하게 천수민의 작품을 칭찬했다.
역시 사도라 그런지 원작에 나온 구울의 왼손보다 성능이 뛰어나다.
“이번에 작업하면서 알게 된 건데요. 딱히 드롭 아이템이 없어도 뭔가를 만들 수는 있더라고요. 품질은 떨어지고 제작 기간이 기하급수적으로 길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문제는 설계도예요.”
시무룩해진 천수민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계도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제법 많은 양의 토큰이 요구된다.
그러나 사도로 각성한 후에도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던 천수민이 가진 토큰은 많지 않다.
“토큰이라면 나도 전부 사용해서 없는데.”
시현 역시 천수민의 작업장을 만들고, 성수를 구매하느라 가진 토큰을 모조리 쓰고 말았다.
가장 값싼 설계도를 구매할 여력조차 없는 상황.
고민하던 시현에게 기가 막힌 수가 떠올랐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봐.”
아리송한 얼굴을 한 천수민을 세워 둔 시현은 어디론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돌아온 시현은 실체화시킨 토큰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그, 그게 다 어디서 난 거예요?”
“강소하가 좋은 데 쓰라고 주더라. 교회 사건 이후 제법 많은 토큰을 벌어들인 것 같더라고.”
“…….”
유쾌하게 웃고 있는 시현을 보며 천수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삥 뜯었구나.’
천성이 게으르고 제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강소하가 평소에는 그저 얄밉기만 했으나, 오늘만큼은 그에게 동정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많은 토큰을 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재료는 나연이한테 말하면 식량을 구하는 김에 수급해 줄 거야.”
“네.”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방어구와 무기. 소총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호텔 전투원의 장비 수준이 너무 빈약해. 적어도 만만한 악마와 만났을 때 도망 외에 싸운다는 선택지를 줄 정도는 됐으면 좋겠어.”
“맡겨만 주세요.”
천수민은 우쭐해져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형, 인천으로 가신다고 했죠? 아마 돌아오셨을 때는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거예요.”
“그래, 그다음에는 남는 장비로 교회와 교역도 하자.”
“네!”
천수민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으며 힘차게 소리쳤다.
그 밝음 속에 형용할 수 없는 어두운 면이 공존하고 있었으나, 시현은 애써 모르는 척하며 차에 올라탔다.
연료도 충분하겠다, 시현은 시동을 걸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천수민은 웃었고, 이나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흔들며 시현을 배웅해 주었다.
조금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원망스럽다는 얼굴을 한 강소하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근처 방에는 민서라도 있었다.
설마 눈이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화들짝 놀라던 그녀가 이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쉽지만 근무 중인 신호석과 김선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녀올게.”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전한 시현은 시원하게 액셀을 밟았다.
시현을 태운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렸다.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악마들이 차량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악마들을 따돌린 시현은 경인고속도로로 향했다.
목적지는 인천연합이 있는 인천이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