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시동을 끄고 운전석에서 내리자 그는 활짝 웃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흘린 땀을 소매로 대충 훔치며 말이다.
“제가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시현 님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설마 저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아니요. 최지호를 처리하려고 왔습니다. 그만뒀지만요.”
“아아……. 최지호 씨를 만나셨군요. 어땠나요?”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스댔다.
저 미소를 보아하니 누가 최지호의 미래를 정반대로 바꿔 놓았는지 일목요연했다.
시현은 웃고 말았다.
신호석 때도 그렇고, 제 시간과 노력을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 곳에 쏟아붓는 이 참가자가 어리석지만 동시에 대단하다고 생각됐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행복해 보이더군요.”
“그렇죠? 아마 시현 님이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거라 자부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양심상 그럴 수가 없네요.”
임태연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표정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뭔지는 몰라도 귀찮은 일이 분명했다.
자칫 상당한 시간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이 호기심이라는 놈이 문제였다.
‘일단 들어나 보자. 결정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리 판단한 시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사실…….”
고기가 미끼를 물기만 기다렸다는 듯 임태연이 입을 열었다.
* * *
신호석 사건 때 알아봤지만 임태연은 굉장히 독특한 참가자였다.
Re write라는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상위 10% 내에 들어가려고 고군분투하는 다른 참가자와 달리 승리에 그다지 집착이 없었다.
게임에서 패한 자는 원래의 세상, 즉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
즉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해도 지옥, 패하면 죽음.
절망뿐인 선택지밖에 남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임태연은 이런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기는 건 진즉에 글러 먹은 거 같고. 어쩌겠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즐기기라도 해야지.”
손이 닿지 않는 승리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 세상에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만드는 참가자, 그게 임태연이었다.
늘 승리만 보고 살아온 시현으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본인이 그게 좋다는데.
문제는 자신의 터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임태연이 큰 실패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시현 님, 혹시 전지운이라는 사람을 알고 계세요?”
“적어도 바로 떠오르는 이름은 아니네요.”
Re write의 등장인물은 굉장히 많다.
그러다 보니 상당한 활약을 선보이거나 차고 넘치는 존재감을 가진 캐릭터라면 또 모를까. 전부를 기억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역시 그런가요? 그래도 제대로 이름이 등장하는 빌런이었는데.”
“아, 빌런이라고 하니 기억났습니다.”
전지운.
판타지의 표본과도 같은 정형화된 시비로 주인공을 자극하더니, 그대로 참교육을 받고 쓸쓸하게 퇴장하게 되는 엑스트라 캐릭터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이 인재만을 기억하는 시현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가 나름 동정을 살 만한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파트의 정해수와 경우가 비슷했다.
본래는 선량한 인간이었으나 의도치 않은 경로로 악마의 조직이 체내로 들어가 정신이 오염된 상태로 각성해 버린, 아주 특이한 케이스.
어째서 지금 타이밍에 전지운의 이야기를 꺼낸 걸까.
전지운이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하던 시현은 한 가지 오류를 발견했다.
이 세상에는 전지운이라는 빌런을 참교육해 줄 주인공 정훈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지운은 어떻게 됐습니까?”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마침 시간도 됐고.”
그렇게 말한 김태연은 시현을 포함한 세 남자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먼저 시현이 안내받은 장소는 예배당의 2층이었다.
그곳에 가니 넓은 예배당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난간에 서서 예배당 안쪽을 훑어보던 시현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굉장히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눈치챘다.
판타지의 사제를 연상케 하는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얼굴에 두건 같은 뭔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건…… 뭐죠?”
“여기 교회의 성가대가 입던 복장이에요.”
“단순히 옷이 부족해서 입고 있다……라는 건 아닌 거 같군요.”
시현의 말에 임태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가대 복장을 한 사람의 수는 굉장히 적었다.
이 넓은 예배당 안에서도 고작 열 명 정도.
그들이 눈에 띈 이유는 단순하게 복장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들에게 무릎을 꿇은 채 무언가를 사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최지호 씨는 2등 시민이라고…….”
“맞아요. 저기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은 3등 시민이고. 저 복장을 입은 사람이 1등 시민입니다. 등급 간에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달라진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대단하네요.”
아포칼립스 이후 각 세력은 고립돼 갈라파고스화가 되어 각자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학교처럼 모두가 평등한 세력도 있고, 약탈자들처럼 자신들만의 군주를 세우는 세력도 있으며, 마트처럼 생존자들의 등급을 분류하는 세력도 있다.
교회의 경우, 마트와 비슷한 체계를 가졌지만 보다 더 노골적이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생존자들 사이에 신분 차이를 두는 건 처음 봅니다. 원작에도 없지 않아요?”
“부끄럽게도 그렇긴 하죠.”
“대체 여기 리더가 누구입니까?”
“……요.”
“네? 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렸습니다.”
“……저요.”
“…….”
시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무겁고 불편한 침묵이 어느 정도 계속된 후, 가까스로 임태연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그러나 임태연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대앵―
어디선가 무겁고 넓게 퍼지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예배당에서 제각각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일제히 정면에 보이는 십자가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건 1등 시민이라 해서 다를 건 없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와중에 누구보다 화려한 복장을 한 남자가 등장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남자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두건을 쓴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여럿이 힘을 모아 커다란 상자를 짊어지고 있었다.
곧이어 상자는 무대 중앙에 놓였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잡음 하나 없이 예배당은 고요했다.
길고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것은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은 남자였다.
“오늘 한 명의 죄인이 탄생했다.”
그 무거운 한마디가 있자마자 잠깐의 소란이 있었고, 두건을 쓴 자들에게 붙들린 누군가가 무대 위로 끌려 올라갔다.
“이, 이거 놔! 놓으라고!”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발버둥 쳤으나 그를 양쪽에서 붙들고 있는 자들은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발버둥 치는 남자가 상당히 우람한 체격을 가졌음에도 말이다.
그들은 남성을 강제로 무릎 꿇렸다.
“이자는 죄를 저질렀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할 식량을 빼돌려 제 배 속을 채웠다.”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어. 창고에 식량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 겨우 초콜릿 세 개밖에 배분되지 않다니 너무하잖아!”
붙들린 남자는 애원했다.
눈물을 흩뿌리며 호소했으나 화려한 복장을 한 남자의 무표정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우리의 신은 이를 용서하지 말라 하셨다.”
그가 손짓하자 무대 중앙에 놓여 있던 상자가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부터 그것이 튀어나왔다.
[우어어어어!]
“미친! 악마?!”
시현이 기겁하며 허리춤의 칼로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악마였다.
악마는 늑대와 용을 뒤섞어 놓은 듯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길게 뻗은 몸에는 회색 털이 수북하며, 근육이 우람하고 늑대를 닮은 머리에 박힌 황금빛의 흉포한 두 눈이 계속해서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 거지?”
그랬다.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공격해야 할 악마가 놀랍게도 이를 드러내며 흉포한 성향을 드러내기만 할 뿐, 그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무표정의 남자가 있음에도 말이다.
“저도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임태연은 침음을 삼켰다.
그 와중에도 무대는 다음 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의 수호신이여, 처형을.”
무표정의 남자가 입을 열자 주변에 있던 두건의 사람들이 복창했다.
당연하다는 듯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들의 복창 소리가 예배당에 쩌렁쩌렁 울렸다.
무릎 꿇은 남자는 사색이 된 채 계속해서 사죄와 반성의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크아아아!]
악마는 남성을 한 손으로 집어 올렸다.
그러곤 공포에 찬 남성의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높이 집어 던진 후, 한 입에 삼켜 버렸다.
콰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악마의 입가에 붉은 피가 흘렀다.
한 번 피 맛을 봤을 텐데도 악마는 날뛰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얌전히 상자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는 모습을 보고는 기함했다.
“저, 저게 대체 뭐예요?”
당황한 건 천수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본 광경을 믿지 못하겠는지 떨리는 손으로 연신 자신의 뺨을 꼬집고 있었다.
머리를 조아린 생존자들 사이에서도 두려움이 피어나는 게 여실이 느껴졌다.
그러나 악마의 바로 지척에 있는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정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두려워 말라. 우리의 신은 무고한 이에게 심판의 철퇴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니 모두 죄를 미워하며 신앙심을 기르라.”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퇴장했다.
두건을 쓴 이들이 상자를 바깥으로 옮겼다.
모두가 예배당을 벗어나고 나서야 생존자들 사이에서 하나둘 숨이 터져 나왔다.
몇몇 생존자들은 한참이나 굽었던 허리를 폈으나 대부분은 계속 머리를 조아린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악마를 향한 기도를.
“임태연 씨.”
“네, 시현 님께서 무엇을 궁금해하시는지 압니다. 일단 제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실까요?”
그리 말하며 웃는 임태연은 굉장히 지쳐 보였다.
* * *
같은 시각.
주차장에 세워 놓은 시현의 차가 크게 들썩였다.
덜컹!
작은 소음과 함께 트렁크 문이 열리더니 운동과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사람의 손이 빠져나왔다.
그러곤 그곳에서 강소하가 땀에 흠뻑 젖은 채 튀어나왔다.
“망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얌전히 일하러 갈걸 그랬어!”
지금으로부터 수 시간 전.
조원의 조언에 따라 차량의 뒷좌석에서 잠을 청하려던 강소하는 문득 생각했다.
“지나가던 누가 창문으로 보고 윤시현한테 일러바치는 거 아니야?”
……라고 말이다.
때문에 강소하는 굳이 좁고 불편한 트렁크에 누워 잠을 청했다. 굉장히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하지만 차가 움직이고, 잠에서 깨어난 그의 예민한 귀에 시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후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들킨다!’
자신조차 운전석에 있는 시현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2레벨 구원자인 시현이 자신이 내는 소리를 잡아내지 못할 리 없다고 판단한 강소하는 정말 죽은 듯이 침묵했다.
살벌하게 웃는 낯짝으로 경고를 날리던 시현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시현이 운전석에서 내린 후에도 수 시간이나 움직이지 않고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에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푸하!”
오랜만에 마시는 바깥 공기는 굉장히 맑았으며 빛은 따사로웠다.
먼저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강소하의 눈에 들어온 건 두 번의 아포칼립스를 버텨 낸 거대한 십자가였다.
“아아……. 교회구나.”
전에 한 번 온 적이 있는 장소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강소하는 천수민을 구했다.
시현이 싫다는 천수민을 강제로 여기까지 연행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강소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하나는 솔직하게 시현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
아마 이쪽 선택지를 고른다면 곱게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현이 차를 끌고 호텔에 돌아갈 때까지 얌전히 트렁크에 숨어 있는 것.
이 경우엔 지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이 남아나지를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현이 언제 올 줄 알고 마냥 기다린단 말인가.
“배도 고프고. 어디 뭐 먹을 거 없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고민거리를 뒤로 미룬 강소하는 주린 배부터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차마 시현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교회로 들어갈 자신은 없었기에 주변에 있을 마트나 편의점을 찾아 이동을 개시했다.
그런 강소하의 눈에 보인 것은 반파된 국회의사당 건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국회의사당에 제법 먹을 걸 많이 쌓아 둔 뚱땡이가 자리 잡고 있었지.”
웃는 얼굴이 선하지만 실상은 그 누구보다 탐욕스러웠던 남자를 떠올린 강소하는 발걸음도 가볍게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조금 빠르게 걸으니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뚱땡아! 형이 전에 맡겨 놓았던 간식 돌려받으러 왔다!”
정문을 걷어차듯 안으로 들이닥친 강소하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굳었다.
더불어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간 것처럼 등골에 오한이 일었다.
“……하?”
떨리는 강소하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바닥이고 벽이고 할 것 없이 새빨간 피로 얼룩진 공간이었다.
그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시체의 산이었다.
비죽 튀어나온 가느다란 팔이 마치 살려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늘게 떨렸다.
“이런 미친…….”
덜컹!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