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강소하.”
“…….”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코골이가 멎었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하던 강소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깊이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현은 알 수 있었다.
강소하는 이미 잠에서 깨어났으며, 저건 애써 자는 척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 증거로 강소하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삐질 흐르고 있었다.
“네가 일어날래? 아니면 내가 깨워 줄까.”
“아하하, 좋은 아침이네.”
협박을 이기지 못한 강소하가 멋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 일은 어쩌고 여기 자빠져 자고 있는 거야?”
시현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강소하는 좋은 아침이라고 했지만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다른 생존자들이 한창 일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걸 생각하면 강소하의 행동은 도를 넘어섰다.
타의 귀감이 되라고까지는 안 하겠지만 일단 구원자라면 제 몫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마를 짚은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시킨 일을 순순히 한다면 그건 나태의 군주가 아니지.’
강소하를 다루려면 일을 시켜 두고 방치해서는 안 된다.
옆에 두고 적극적으로 채찍질을 해야 겨우 사용해 먹을 수 있는 굉장히 까다롭고 불편한 인재.
그게 바로 강소하다.
“강소하, 분명 네 목적은 악마를 소탕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얻는 거라고 했지? 그거 때문에 임진아를 배신하고 나를 따라온 거고.”
“어……. 그, 그렇지?”
“역시 나연이랑 역할을 바꾸는 게 낫지 않아? 아무래도 그쪽이 더 많은 악마랑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야. 나 경비 일이 적성에 맞아.”
“봐주는 건 이번 한 번이야.”
시현은 가차 없이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강소하는 시현의 마음이 혹 바뀔까 싶어 부리나케 방을 뛰쳐나갔다.
“이번에는 얼마나 갈지…….”
엄중하게 경고를 줬다 해도 강소하라는 인간이 쉽게 바뀔 리는 없다.
괜히 능력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나태의 군주라는 별명을 얻은 게 아니다.
그저 눈에 보인 걸 모른 척할 수 없어 엉덩이를 걷어찬 것뿐이다.
방을 나선 시현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오가던 많은 생존자들이 시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으며 인사해 왔다.
리더로서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 주던 시현은 호텔 메인 홀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두 번째로 노동을 거부하며 농땡이를 부리는 잠재적 인재를 발견했다.
천수민이다.
여러 방면으로 일을 시켜보려 했지만 끝내 고집을 꺾지 못한 천수민은 오늘도 같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아직 중학생이기에 다른 생존자들이 강소하의 경우처럼 마냥 나쁘게 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이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머지않아 천수민을 향한 불만의 목소리가 쌓여 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강소하가 천수민을 구출해 온 장소가 교회 인근이었지?”
어쩌면 교회가 천수민을 바꿔 줄 돌파구가 되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 간만에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호텔 밖으로 나온 강소하는 하늘을 우러러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춥지도 않고, 적당히 선선한 게 낮잠 자기 딱 좋은 날씨다.
강소하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반성했다.
“너무 안일했어. 그렇게 눈에 띄는 장소에서 낮잠을 잔 게 잘못이지.”
창고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이는 조장 급뿐이다.
때문에 사람의 발길이 뜸할 거라 생각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이 소수일 뿐 출입 자체는 결코 적지 않았다.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두 번의 실수는 없다.”
곧 죽어도 강소하는 순순히 일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날씨에 일을 해야 하다니, 강소하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는 절대 들키지 않는 곳에 숨어서 낮잠을 자겠어.”
아직 시현이 있는 호텔을 향해 코웃음 친 강소하는 새롭게 숨을 장소를 찾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강소하는 성실하게 경비 일을 하고 있던 조원과 마주쳤다.
“조장,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오, 마침 잘 만났어.”
활짝 웃으며 격하게 반기는 강소하의 반응에 놀란 조원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잡은 강소하는 조원의 잘 단련된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어디 숨어서 편히 쉴 만한 장소 없을까? 윤시현의 눈에 절대 들키지 않을 만한 장소.”
“…….”
남자는 얼굴 주름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경멸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멸 정도로 강소하는 굴하지 않았다.
“대신 내일 근무 빼 줄게.”
“됐어. 내가 빠지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한테 부담이 되니까. 하아……. 어째서 네가 우리 조 조장인 거야? 나연이나 호석이가 조장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민서라 씨도 좋고.”
“상처 받네.”
“정 게으름 부리고 싶으면 차에 가서 자든가. 오늘은 차 쓸 예정 없으니까.”
결국 남자는 그럴싸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줬다.
강소하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고마워. 넌 천재야.”
바람에 날리는 연처럼 두 팔을 신명나게 흔들며, 강소하는 멀리 보이는 주차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를 보낸 남자는 재차 경비 일에 집중했다.
그러기를 약 5분.
“이거 놔! 난 안 갈 거라고!”
“미안하지만 백수에게 선택의 권한은 없다.”
호텔 입구에서 천수민을 옆구리에 낀 시현이 걸어 나왔다.
누구보다 가장 선두에 서서 싸우며, 다른 구원자들과 비교해 압도적인 강함을 지닌 호텔의 리더인 시현을 그는 굉장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쏜살같이 달려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시도했다.
“리더, 수고 많으십니다.”
“안수한 씨야말로 게을러터진 조장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설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남자는 크게 감동했다.
그 감정을 강제로 억누른 채 그는 평정심을 연기했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네, 여의도에 갈 일이 생겨서요. 나연이가 한동안은 차를 안 써도 된다고 해서 지금이 기회다 싶었죠.”
“어……. 그…….”
남자의 눈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헤맸다.
현재 호텔에서 소지하고 있는 차량은 딱 한 대뿐이다.
그리고 그 차의 뒤편에는 게으름의 화신인 강소하가 시현을 피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말해 줘야 하나?’
남자는 순간 고민했다.
아무리 미운 놈이라지만 일단은 조장.
의리라는 게 개미 더듬이 정도로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 의리는 시현을 향한 존경심 앞에서 큰 의미가 없었다.
“리더, 혹시 차에 탑승하시면 차 뒷좌석을 꼭 확인해 주세요.”
* * *
차에 탑승한 시현은 가장 먼저 안수한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알려 준 대로 뒷좌석을 확인했다.
그러나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대체 뭘 확인하라는…….”
“내려 줘! 나 여의도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시현의 의문은 조수석에서 날뛰는 천수민에 의해 싹 날아가 버렸다.
“그러면 제대로 일하겠다고 약속하든가.”
시현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차에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차량은 빠르게 주차장을 벗어났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배짱은 없는지 천수민이 시현을 가만히 노려봤다.
“내가 왜 일해야 하는데.”
“네가 우리와 같은 장소에서 살고 있으니까.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인데 너는 지금 남의 등에 빨대를 꽂고 있잖아.”
세력이 오래 유지되기 위해서는 작은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
그 사회의 규모가 작을수록 공급 없이 소모만 하는 사람에 대한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미성년자라고 봐주기에는 지금의 세상이 자비롭지 못할뿐더러, 호텔의 인력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너보다 어린애들도 생존에 도움이 되기 위해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가족을 잃은 사람이 너뿐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걸.”
“…….”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 생각해. 더 이상의 어리광은 안 받아 줄 거야.”
다소 냉정하기까지 한 시현의 말에 천수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량 내부를 고요한 침묵이 지배했고, 창 너머로 보이는 주변 환경이 휙휙 바뀌었다.
푸른 물색을 자랑하는 한강을 건너니, 초록색 이끼가 망가진 건물을 가득 뒤덮고 있는 장소가 나타났다.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창으로 눅눅한 공기가 훅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현은 목적지인 교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규모를 자랑하는 교회의 상징과도 같던 거대한 십자가는 꺾인 채 볼품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후우…….”
교회의 정문 앞에 선 시현은 숨을 골랐다.
이 안에 있는 넓은 예배당에는 한 사람의 남자가 가족을 잃은 아픔에 눈물을 쏟으며 처절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것이다.
시현의 역할은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고 매정하게 돌아서는 것이다.
설득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시현은 예배당의 문을 열었다.
“어머? 못 보던 분이시네. 잠시 머무르는 손님? 아니면 의탁할 곳을 찾는 생존자? 어느 쪽이든 환영해요.”
“……엥?”
예배당 안쪽의 광경은 시현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넓은 공간에는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예배당에 있던 의자를 치우고 드러난 공간에 돗자리나 모포 따위를 깔고 앉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시현은 자신에게 말을 건 여성에게 시선을 줬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20대 초반의 여성은 근심 걱정 없이 밝게 웃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라 당황하기는 했지만 시현은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원작이 뒤틀렸다.
원래라면 가족을 잃고 오열하는 최지호 한 사람만의 공간이었을 교회가 수많은 생존자로 가득한 세력이 되어 버렸다.
원작을 알고 있는 참가자의 개입이 있었다고 가장하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왜, 굳이 참가자가 교회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교회가 있는 여의도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떠안고 있다.
바로 한강에 자리하고 있는 대형 악마 콜로서스의 존재다.
그런 장소를 참가자가 눈독을 들일 리 없다 생각했고, 그렇기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시현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여성이 보내는 눈빛에 의심이 커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침묵은 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시현이 입을 열었다.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혹시 헤어진 가족이나 친지분이신가요?”
“그건 아니고. 어떤 분이 저 때문에 위험에 처한 적이 있으셔서요. 무사하신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최지호라는 분인데, 아시나요?”
“최지호……. 최지호……?”
최지호의 이름을 읊조리던 여성은 도통 모르겠다는 듯 연거푸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답답함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근처에 있던 중년 남성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거 있잖소. 별동에 있는 그……. 얼마 전에 제 딸이 추워한다고 기름을 잔뜩 가져온 양반. 그거 때문에 2등 시민이 됐잖수.”
“아아! 맞다!”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여성은 환하게 웃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학교처럼 그리 폐쇄된 집단은 아닌지 여성은 당연하다는 듯 시현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본 예배당의 옆에 붙어 있는, 시현으로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로 그를 안내했다.
그곳에도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최지호다.
“저분이 맞아요?”
“네, 맞습니다.”
그날과 비교해 최지호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굳이 찾아보자면 수염이 조금 더 지저분하게 자랐다는 것일까.
원작에서의 최지호는 가족을 빼앗긴 슬픔에 눈가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최지호는 슬픔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옆에 있는 부인과는 사이가 좋아 보였으며, 무릎에 앉은 딸은 다리를 흔들며 재롱을 부렸다.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최지호의 아내와 딸이 살아 있다는 건…….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는 뜻이겠지.’
역사는 바뀌었다.
원작에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끔직한 재앙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시현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어떻게, 불러 드릴까요?”
“아니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까요.”
대화재가 아니라면 굳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역사를 바꾸고 교회에 자리를 편 참가자가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우선순위는 인천 연합 쪽이 더 높다.
시현은 돌아가기 위해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시동을 걸고 막 기어를 바꾸려던 찰나.
쿵! 쿵!
“잠시만이요. 시현 님!”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며 그를 애타게 불렀다.
부르는 호칭이 굉장히 낯부끄럽고, 뭔가 싶어 상대를 확인한 시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랍게도 익숙한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태연 씨?”
약탈자들의 처형장에서 신호석의 구출을 의뢰했던 참가자 임태연.
그가 다급한 얼굴을 한 채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