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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69화 (69/225)

[69화]

현재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누가 뭐라 해도 호텔을 정비하는 일이다.

현재 호텔의 상황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우선은 의식주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식’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

학교에서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수중에 있는 물자는 그리 많지 않다.

‘지금 인원으로는 잘 해도 2주를 버티기 어렵겠네.’

그리고 식량만큼 중요한 게 방비를 굳히는 것이다.

호텔의 방위 수준을 비유하자면 자동문에 가깝다.

바리케이드 따위는 일절 없으며, 주변에 함정이나 울타리, 담벼락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병력이라고는 시현을 제외하면 구원자 셋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참가자 하나, 그리고 소총을 가진 생존자가 열 명 남짓이었다.

대형 악마 콜로서스의 등장으로 퇴각했던 임프 무리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감안하면 영 불안한 수준의 병력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호텔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면 상당한 수준의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철저하게 한다.”

시현은 의욕을 불태웠다.

먼저 시현은 호텔에 있는 구원자 전원을 호출했다.

일단은 구원자였기에 천수민도 끌려왔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모이게 된 일행은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임시이기는 하지만 리더로서 알아볼 것, 그리고 지시할 것이 있어서 호출했어.”

그에 대한 반응은 반으로 나뉘었다.

“에엥……. 귀찮은데. 나 요즘 엄청 고생했으니까 조금 쉬어도 되지 않을까?”

천성이 게으른 강소하는 아니나 다를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원래 저런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크게 짜증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대 정도는 쥐어박고 싶었다.

천수민이야 당연히 이쪽이었고.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민서라다.

“저는…… 뭘 해도 도움이 안 될 거예요.”

그 민서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변화였다. 하필이면 좋지 않은 방향으로.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서윤의 죽음을 떨쳐 내기 위해 민서라가 선택한 것은 더 많은 아이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구원했다고 믿었던 아이들이, 알고 보니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의 손에 의해 실험체로 쓰이고 있었다.

그러니 충격을 받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저런 상태의 민서라가 달갑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시현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확인해 본 민서라의 랭킹은 어느덧 30위권 밖까지 떨어져 있었으니까.

반면, 나머지 두 사람은 시현을 돕는데 적극적이었다.

“뭔데요? 제가 뭘 도울 수 있나요?”

“시켜만 주세요!”

늘 강아지 같은 이나연이나 이번 사건 이후 더욱 시현을 따르게 된 신호석.

두 사람은 지시만 있다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기세였다.

“우선 생존자들의 인원 현황을 파악하고 싶어.”

“성인 남성이 열일곱, 여성이 열넷. 남학생이 열아홉, 여학생이 스물, 아이가 열하나이고, 노인이 일곱이에요. 총 88명이네요.”

“뭐야. 언제 조사했어?”

“후후, 이럴 줄 알고 제가 미리미리 다 준비해 뒀죠.”

허를 찌르는데 성공한 신호석이 가슴을 펴고 우쭐거렸다.

뭐라도 좋으니 시현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게 결실을 맺은 것이다.

괜히 경쟁심을 품은 이나연이 뺨을 부풀렸다.

“그나저나 생존자 수가 생각보다 적네.”

“아무래도 학교에서 도망쳐 나오며 죽은 사람이랑, 그……. 감염된 사람의 수가 많았잖아요.”

“식량은? 그 인원이면 며칠이나 버틸 수 있지?”

“아마 2주도 못 버틸 거예요. 당장이라도 나가서 식량을 구해 와야 하는데…….”

신호석의 시선이 민서라에게로 향했다.

사실상 학교의 식량은 민서라 혼자 공급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민서라가 저 상태라면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다.

어디까지나 민서라가 선택한 일이기에 지금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짜증이 확 솟구쳤다.

“먼저 말해 두겠는데.”

“넵!”

“나는 학교처럼 세력을 운영할 생각이 전혀 없어.”

“그게 무슨 뜻인가요?”

“멍청하게 앉아서 식량과 물자를 축내기만 하는 생존자를 목숨 걸고 지켜 주지 않겠다는 뜻이야.”

“…….”

실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힘 있는 자가 약자를 지킨다.

이는 도덕과 윤리를 배운 이라면, 그리고 선한 마음이 있는 자라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현은 일하지 않는 구조파를 보살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누구는 놀고먹으며 보호받고, 누구는 목숨 걸고 악마와 싸우며 물자를 공급하고. 심지어 노약자도 아니고 건장한 성인 남녀가 말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평화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오오! 윤시현!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차갑지도 않은지 맨바닥에 드러누운 채 호들갑을 떠는 강소하를 무시하고 시현은 말을 계속했다.

“물론 전부가 나가서 악마랑 싸우라는 말이 아니야.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거지.”

“전 형 생각에 찬성입니다. 정확하게 알려 주세요.”

신호석이 눈을 빛내며 시현의 의견에 동조했다.

학교에 있을 시절 어지간히도 쌓였던 게 많았는지 굉장히 의욕적이었다.

“…….”

그런 학교의 분위기를 만들었던 민서라는 더욱 침울해졌다.

“우선 아이와 노인을 제외한 생존자 전원을 세 팀으로 나눌 거야. 팀장은 세 사람에게 맡길까 해.”

시현은 순서대로 이나연, 신호석, 강소하에게 시선을 줬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 있는 자가 위에 서야 한다.

“네!”

“맡겨만 주세요!”

기세 좋게 외치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강소하는 싫어 죽겠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호석이네 팀은 방어에 힘써 줘. 지금부터는 심심찮게 임프들이 무리를 지어 쳐들어올 거야.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주변에 목책이나 발목을 잡을 함정을 설치해.”

“네? 어, 어떻게요? 할 줄 모르는데…….”

“수민이를 너희 팀에 넣어 줄게. 둘이 머리를 잘 맞대 봐.”

제작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수민이라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어떻게 천수민의 협력을 얻어 내느냐가 관건이겠지만.

천수민은 강소하에 이어 두 번째로 싫어 죽겠다는 얼굴을 보여 줬다.

“목책은요? 나무는 어떻게 구해요?”

“주변 인가를 돌아다니면 못 쓰는 가구가 널려 있을 거야. 그걸 부숴서 써도 되고……. 목책이라 했지만 꼭 나무만 쓸 필요는 없어. 철, 플라스틱, 뭐라도 좋으니 악마를 막을 수 있으면 사용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임프이기는 하지만 다른 중형 악마가 올 가능성도 있으니 최대한 튼튼하게 만들어야 해.”

“저기……. 죄송한데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세요.”

결국 시현이 다시 한번 똑같은 설명을 하고 나서야 신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페트병의 뚜껑을 열어 목을 축인 시현이 강소하에게 시선을 주었다.

“강소하는 순찰 조를 만들어 줘. 하루 3교대로 운용하고 주된 임무는 옥상에서 주변의 생존자, 악마의 동선 파악이나 목책, 바리케이드의 수리를 주로 해야 해.”

“잠깐 기다려. 그게 꼭 필요할까?”

“당연히 필요하지. 싫으면 조장은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나랑 같이 행동하든가.”

“아니야. 나 순찰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강소하가 본 시현은 약탈자들의 리더였던 임진아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임진아가 가장 높은 곳에 앉아 군림하는 여왕이었다면, 시현은 반대로 무언가가 있으면 직접 몸으로 뛰어 일을 해결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시현과 같이 행동한다?

그랬다가는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부지런함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아니면 나연이랑 바꾸든가. 나연이네 팀은 부족한 식량 등의 물자를 구하러 갈 거야. 네가 그쪽을 맡을래?”

당연하지만 식량을 구하는 게 가장 위험하고 귀찮으며 피곤한 작업이다.

그날 해야 할 일만 끝내면 되는 경비, 보수와 달리 굶지 않으려면 물자 보급 팀은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서울시를 누벼야 한다.

“사양하겠습니다.”

강소하는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실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상 그 누가 이런 귀찮은 일을 도맡아서 하려 하겠는가.

시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이나연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저 혼자 가는 게 낫지 않아요? 괜히 생존자들을 데려가도 짐만 될 거 같은데.”

“생존자는 어디까지나 짐꾼이야. 너 혼자서 가지고 올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잖아. 위험한 일을 하니까 여러 면에서 특혜를 줄 생각이야. 그리고…….”

시현의 시선이 민서라에게 향했다.

학교에서 발생한 대참사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제 구실을 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민서라는 우수한 인재다. 마냥 놀릴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민서라 씨는 세 팀을 오가며 재량껏 서포트를 부탁드립니다.”

굳이 재량껏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녀에게 마음을 추스를, 어느 정도의 유예를 주겠다는 소리다.

“……네.”

민서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건 이건데.”

시현은 가방에서 백색의 묘목을 꺼내 들었다.

사실 조를 편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이 녀석이다.

“지금부터 이 녀석을 길러 줄 보모를 찾을 거야. 괜찮은 사람 있으면 추천해 줘.”

“그게 뭔데요?”

신호석이 호기심을 보이며 말했다.

“궁금해?”

“뭐 얼마나 대단한 거기에 그렇게 뜸을 들여요. 그래 봤자 흔하게 볼 수 있는 풀때기구만.”

“와, 수호나무 묘목을 풀때기 취급한다고? 무슨 배짱이냐. 무지하면 용감하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덜컹!

대뜸 요란한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시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분명 먼 곳에 앉아 있던 민서라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키울게요.”

“네?”

“제가 키우게 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아……. 네.”

엄청난 기세에 밀린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안 된다고 하면 힘으로라도 허락을 받을 기세였다.

묘목이 담긴 화분을 끌어안은 민서라의 입가에 희미하기는 하지만 모처럼 미소가 피었다.

현재 민서라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는 이나연이 슬금슬금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게 뭔데, 저런 반응이에요?”

“어……. 사실 너희들 설득하는데 쓰려고 이렇게 설명서까지 첨부해 왔는데. 헛짓거리가 돼 버렸네.”

시현은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어 뒀던 자필 설명서를 꺼내 보여 줬다.

<수호나무 묘목>

선한 마음으로 보살피면 성장하며 신성한 기운을 가진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이용하면 일정 구역을 정화 구역으로 만들 수 있다.

간단한 설명이지만 내용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정화 구역.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아는 사람이라면 탐욕스럽게 그것을 요구할 것이다.

현 시점에서 생존자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악마다.

악마에게 저항할 수단이 없는 생존자들은 언제 악마의 습격이 있을지 몰라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하며 산다.

심지어 커다란 세력에 소속되어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도 언제 악마가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들어올지 몰라 불안해한다.

하지만 정화 구역을 생존 거점으로 삼는다면, 반대로 생존 거점을 정화 구역으로 만든다면.

생존자들은 더 이상 악마의 침공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대형 정도 되면 정화 구역이고 뭐고 아랑곳 않고 짓밟아 버릴 테지만, 대형이 흔한 것도 아니고, 중형 이하의 침입만 막아 내도 효과는 톡톡히 보는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설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수호나무 열매에는 특별한 효과가 존재한다.

2레벨 이상의 구원자가 복용하면 외피의 강도가 더욱 견고해진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빠도 아시다시피 지금 서라는 상태가…….”

슬쩍 민서라의 눈치를 보던 이나연이 더욱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바로 귓가에서 속닥거리는데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다.

얼핏 보면 이나연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의 민서라에게 이토록 중요한 일을 맡기는 걸 이나연이 불안하다고 느끼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시현의 생각은 반대였다.

“오히려 민서라 씨가 맡아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수호나무 묘목은 여러 가지 이로운 효과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장점이 강렬하면 단점 또한 명확한 법이다.

수호나무 묘목은 기르기가 굉장히 어렵다. 열 번 도전해서 세 번 성공하면 잘했다고 말해지는 정도랄까.

원작에서도 내로라하는 원예가들이 도전했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누구도 성장한 수호나무의 묘목을 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상점에 재고가 남아 있었던 것이리라.

기르는데 실패하면 토큰을 버리는 꼴이 되어 버리니까.

그래도 도전할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참가자이기에 보통의 생존자들은 모르는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민서라라면.

그리고 지금껏 시현이 만나 본 그 누구보다 이타적인 성향의 민서라라면.

그 누구도 피워 내지 못한 수호나무 묘목을 성공적으로 길러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있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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