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시현이 빈손으로 목덜미를 훑자, 진득하니 피가 묻어났다.
작게 혀를 차며 늘어뜨린 칼날에서 검은 피가 떨어졌다.
“그래도 효과는 있는 모양이네.”
[캬아아아악!]
하수인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가 보였다.
푸화악!
요란 소리를 내며 상처로부터 대량의 피가 솟구쳤다.
권능의 효과 또한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
레벨 차이 때문에 공격 자체가 통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시현은 1레벨 정도는 극복할 수 있는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야 더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느새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피가 멎어 있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치유력 덕에 벌써 상처가 아물었다.
루스의 낙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권능이 담긴 일격에 의한 상처라 그런지 하수인의 상처는 아무는 속도가 몹시 더디다.
흘러내린 검은 피가 계속해서 바닥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대로 장기전으로 끌고 나가면 틀림없이 승리를 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시현은 이 싸움을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괜히 시간을 줬다간 구종환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하수인을 가장 확실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목을 베는 거야.’
하수인은 레벨이 높아질수록 생명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바퀴벌레도 저리 가라 할 생명력을 이용해 심장이 꿰뚫려도 한참이나 학살극을 벌이다가 2시간이나 지나서야 숨이 끊어진 어느 하수인의 이야기는 참가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어설프게 처리했다가 허를 찔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목을 베어야 한다.
심장을 꿰뚫는 것보다, 목을 베는 게 하수인을 처리하는 가장 정석이고 확실한 수단이다.
[아아아악!]
하수인은 제 몸의 상처를 보살피지 않고 오로지 눈앞의 시현을 향해 달려들기를 반복했다.
이성을 잃은 상대가 오히려 손쉬운 법.
시현은 당황하지 않고 기회를 노렸다.
빠르게 간격이 좁혀졌다. 너무 멀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
자신의 검이 목을 벨 수 있지만, 짧은 하수인의 팔은 닿지 않을 절묘한 거리.
그러나 시현은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휘둘렀다.
하수인의 두 팔은 공격을 위해 앞으로 뻗어진 상황이기에, 방어로 되돌리기엔 한참 늦었다.
시현은 자신의 공격이 성공할 거라 확신했다.
콰득!
그러나 공격은 막혔다.
“미친!”
놀랍게도 하수인은 치아를 이용해 단검을 물어 자신이 베이는 것을 막은 것이다.
단검을 입에 문 채 히죽 웃은 하수인이 몸을 크게 비틀었다.
뻗은 손은 시현에게 닿지 않지만 온몸을 뒤틀며 가한 발차기는 시현의 옆구리에 꽂혔다.
퍼억!
“크학……!”
경이로운 고통에 순간 정신을 놓쳐 버릴 뻔했다.
아래쪽 갈비뼈가 부러진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아마 내장도 상했을 것이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시현은 단검을 놓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눈앞의 작은 하수인에게 살해당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으아아아!”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들며 비명인지 기합인지 스스로도 모르게 내지르며, 이를 악물고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공중에 떠올라 있던 하수인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단검이 점점 하수인의 입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키이이이이!]
하수인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밀어내려 했다.
검을 쥔 두 손에서 검은색 피가 흘러내렸으나 하수인은 더욱 힘을 더했다.
단검은 더 이상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막상막하, 용호상박이었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은 정체였다.
거기에 제3자가 난입했다.
벽에서 불쑥 튀어나온 두 손이 검을 잡았다.
[캬히히히힛!]
조금 전, 바람을 일으키는 함정에 당해 날아갔던 유령이 되돌아온 것이다.
유령은 잡고 있던 검을 하수인 쪽으로 끌어당겼다.
검은 기류를 품은 칼날이 점점 하수인 쪽으로 가까워졌다.
입이 살짝 베이고 검을 물고 있는 이빨을 지탱해 주는 잇몸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하수인이 몸부림을 쳤으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미안하다.”
하수인의 목숨을 앗을 때마다 내뱉던 사과를 끝으로, 검이 앞으로 쑤욱 나아갔다.
뽑힌 이빨이 우수수 떨어지며 하수인의 잘린 손바닥 두 개와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헉……. 허억…….”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하수인을 내려다보며 거친 숨을 토하던 시현은 주저앉고 말았다.
승리를 취했음에도 전혀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이의 목숨을 앗아 가는 건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힘겹게 주머니를 뒤적여 회복약을 꺼냈다.
뼈가 부러졌다. 아무리 남들보다 뛰어난 자연 회복력을 가졌다지만 이 정도 상처라면 낫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비용이 들겠지만 회복제를 사용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어욱, 더럽게 쓰네!”
그래도 아까우니까 남김없이 입안에 털어 넣은 시현은 쓴맛을 잊어버리려는 듯 힘차게 일어섰다.
3레벨 하수인은 처치하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일이 끝난 건 아니니까.
불쌍한 고아들을 실험체로 쓴 것으로도 모자라 하수인으로 만든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악인.
연금술사 구종환과 그의 배후라 할 수 있는 왕근식, 그 두 사람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시현은 구종환과 자신의 사이를 막는 최후의 관문을 통과했다.
“멈춰.”
낮은 목소리에 강한 폭력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현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짐승이 하악질을 해댄다 해서 물러날 거라면, 애초에 궁지에 몰지도 않았다.
“아직도 저항할 수단이 남았나?”
태연하게 대꾸하면서도 시현은 방 내부를 살폈다.
밝은 조명이 가득한 방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붙들려 있었다.
다행히도 그 중에는 천수민의 모습도 보였다.
마주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구종환은 포박되어 있는 아이들의 뒤에서 그들에게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3단계 하수인을 쓰러뜨린 거지?”
“내가 3단계 하수인에게 당하고, 하수인이 레벨 서포터의 부작용으로 사망하면 그때 기어 나올 생각이었나? 이거 아쉬워서 어쩌냐.”
시현의 조롱에 구종환은 혀를 찼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기를 버려. 조금이라도 접근한다면 아이들을 하나씩 죽일 거다.”
“히익!”
“흐아아아앙!”
그렇지 않아도 잔뜩 겁에 질려 있던 아이들은 구종환의 협박에 울음을 터뜨렸다.
시현을 향해 살려 달라며 호소하는 아이도 있었다.
울음소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러나 시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구종환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으니까.
방 안에는 아이들과 구종환, 시현 외에도 한 명의 사람이 더 자리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은 아니다.
방의 중심부에 온몸이 포박되어 있는 하수인이 보였다.
성별은 여성.
나이는 고등학생 정도다.
시현은 하수인을 향해 다가갔다.
“멈춰!”
구종환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시현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라고, 이 새끼야! 여기 이 애가 죽어도 아무렇지 않아?”
협박의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그의 손에 들린 단검이 남자아이의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살짝 맺힌 핏방울에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럼에도 시현은 멈추지 않았다.
시현을 발견한 하수인은 끈적이는 침을 흘리며 몸부림쳤다.
“내가 농담하는 거 같아? 멈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멈춘다면 아이들은 살릴 수 있어!”
다시 한 걸음.
“멈추라고. 이 새끼야!”
그리고 또 한 걸음.
이제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하수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현은 잠시 수납해 뒀던 단검을 꺼냈다.
“멈추라고오오오!”
결국 구종환은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레벨 서포터는 어디까지나 감염 치료제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연금술사 구종환이 자신의 천재적인 두뇌를 이용해 감염 치료제를 연구하기 시작한 결정적 이유, 그것은 사랑하는 딸의 감염이었다.
촤악!
휘두른 칼에 하수인의 목이 베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쭉쭉 뻗어나간 칼은 시현을 향해 달려들던 구종환의 목까지 함께 베었다.
레벨 서포터라는 경이로운 물건을 만들어 낸 연금술사의 최후는 몹시도 허망했다.
* * *
“역시 늦었나.”
권수학의 목을 베어 버린 시현은 곧바로 상담실로 향했다.
기껏 구해 온 아이들은 복도에서 잠시 기다리게끔 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상담실에서 왕근식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마냥 웃고 있으면 단칼에 그 목을 베어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끔찍한 광경을 아이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예상대로 왕근식은 달아났다.
문제는 그냥 도망간 게 아니라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상담실 내부에 온통 피 칠을 해 뒀다는 것이다.
그냥 피가 아니다. 냄새로 보아 악마를 불러들이는 신혈이 분명했다.
“도망칠 때까지 발을 붙잡을 셈이구나. 어쩜 이리 짜증 나는 일만 골라서 하지?”
“시현 씨!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복도에 사라졌던 아이들이 있던데, 구출에 성공한 건가요? 왕근식은요?”
뒤늦게 상담실 문을 열고 민서라가 등장했다.
아직 진실을 모르는 민서라는 옥상에 있던 연금술사가 왕근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민서라를 설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왕근식……. 그러니까 이은철이 도망갔습니다. 이은철 역시 한패였어요.”
“말도 안 돼! 선생님이 한패일 리가……. 아니,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왕근식을 변호하려던 그녀는 내부의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신혈입니다.”
“신혈이라면 악마를 불러들이는 권능이 담긴 피 아닌가요?”
“맞습니다. 이은철이 한패라는 증거는 여기 있습니다.”
시현은 가지고 온 연구 일지를 민서라에게 건넸다.
연구 일지를 펼치는 민서라를 뒤로한 시현은 복도로 향했다.
신혈을 이렇게나 듬뿍 발라 놨으니 인근의 악마로부터 무언가 반응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창을 통해 바깥을 확인한 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크으으으으!]
[캭! 캬아아악!]
언제 몰려온 건지 수많은 악마가 정문의 바리케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수가 족히 수십은 되어 보였으며, 중형 악마도 두 마리 정도 확인됐다.
뿌려진 신혈의 양을 보아하건데, 앞으로 악마의 수는 점점 많아질 것이다.
바리케이드로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어이가 없군.’
이대로 두면 학교 세력은 붕괴한다.
원작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많은 생존자를 구원했던 학교가 고작 참가자 하나로 인해 붕괴하려 하고 있었다.
학교 내부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당연하지만 학생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 왕근식을 찾았다.
“선생님!”
“밖에 악마가 엄청 몰려든……. 시, 시현이 형?”
학생들은 시현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 중에는 신호석도 있었다.
그러나 시현이 옥상에서 구종환을 처리하는 동안 민서라에게 설명을 들은 건지 그의 존재를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이재현이 죽고 없는 지금, 학생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이는 구원자인 신호석이었다.
“형, 그 피는 어떻게 된 건가요? 설마 형이 선생님을…….”
자세한 내막을 모르기에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마 여기서 진실을 전한다 해도 이들이 믿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순간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은철과 왕근식, 두 사람이 옥상에서 끔찍한 인체 실험을 하고 있었어. 그 사실을 우리에게 들키자 이은철은 도주했고.”
민서라는 연구 일지의 열람을 마치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시현은 그녀의 멘탈이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억지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며칠 전부터 생존자들 중 행방불명자가 계속해서 발생했는데. 그 사람들의 시신이 옥상에서 발견됐어. 여기 아이들도 옥상에 납치당해서 몹쓸 짓을 당했고.”
민서라의 시선이 닿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동안의 서러움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너희가 눈으로 확인해 보는 편이 가장 믿을 수 있겠지만……. 나는 너희가 그 광경을 눈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어. 평생 트라우마가 될 거야.”
이런 순간에도 민서라는 학생들을 걱정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져 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리더를 지극히 신뢰했다.
하지만 민서라를 향한 신뢰도 그에 못지않을 만큼 두텁다.
결국 몇몇 학생들이 자신의 눈으로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토악질을 해 대고 눈물을 뿌리며 민서라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시현이 민서라에게 물었다.
리더가 세력을 버린 지금, 실질적인 리더는 생존자들에게 가장 높은 신뢰를 사고 있는 민서라다.
그녀는 정문의 바리케이드를 깨부수고 있는 악마들을 응시했다.
악마의 수는 아까보다 더욱 증가해 있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다들 탈출 준비를 서둘러! 후문 쪽으로 탈출할 거야. 식량과 물자를 최우선적으로 확보하고 부상자는 차에 태워.”
목소리를 높인 민서라의 지시에 학생들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떨고만 있는 학생도 있었고, 머리가 새하얀 백지가 되어 버렸는지 멍하니 선 이도 있었다.
정신력이 완전히 바닥을 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다.
그들의 등을 떠밀어 주는 것 역시 민서라의 역할이었다.
“정신 차려! 이대로 죽을 거야?”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만큼 민서라는 바쁘게 움직였다.
“누나! 바리케이드가 뚫리기 직전이에요!”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남학생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아직 생존자들이 피난을 가기에는 시간이 한참 부족했다.
“내가 가 볼게.”
민서라가 정문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시현이 그녀를 붙잡았다.
“정문에는 제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서라 씨는 생존자들의 피난을 지휘해 주세요.”
“네? 하지만…….”
“적절한 지시가 내려지지 않으면 큰 혼란이 빚어질 테고, 그만큼 대피가 늦어질 겁니다.”
그동안 민서라는 착실하게 사람들의 신뢰를 사 왔다.
요 며칠 얼굴을 비친 시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말이다.
시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민서라다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