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미치겠군. 설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건 배반자 정해수의 권능이잖아!”
분개한 남자가 주먹을 내려쳤다.
구원자의 막강한 힘을 버티지 못한 오래된 책상이 힘없이 으스러졌다.
멀쩡한 가구 하나를 깨부쉈음에도 남자의 분노는 좀처럼 풀어질 줄을 몰랐다.
“게다가 두 개의 권능이라고? 그렇다면 그놈이 블랙마켓에서 아르하의 권능을 구매했단 소리잖아. 어떻게 30억의 가치를 가진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을 수 있는 거지?”
잔해를 거칠게 걷어찬 남자의 이름은 왕근식.
남들 앞에서는 이은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참가자다.
그는 조금 전 광경을 떠올렸다.
참가자 윤시현.
권능을 이용해 사망한 이재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는 권수학을 고문하고, 종래에는 하수인으로 변하는 약을 강제로 먹였다.
하수인의 목을 친 것은 민서라였으나, Re write에서는 하수인으로 변한 시점을 기준으로 사망을 정의한다.
즉, 권수학을 죽인 것은 민서라가 아닌 시현이었다.
문제는 그가 권수학을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서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잔인할 수가 있지? 망할 놈! 쳐 죽일 새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분개하기는 했으나 왕근식은 알고 있었다.
구종환은 글렀다. 옥상으로 가 구종환과 합류해 봤자 윤시현이라는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선의 수단은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저 우라질 놈, 구종환을 죽이고 나면 분명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오겠지. 지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도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선 왕근식이 주섬주섬 중요한 물건들을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구종환이 쓴 연구 일지의 카피본, 성과가 담긴 캡슐 따위가 주로 가방의 공간을 차지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연구 성과는 살려야 해. 이것만 있으면 나머지는 이어서 개발할 수 있어.”
들어 주는 이 하나 없건만 주절주절 헛소리를 늘어놓던 왕근식이 마지막으로 학교에 있던 제단을 파괴했다.
제단을 만드는데 소모된 토큰을 포함해 영구적으로 페널티를 갖게 되지만, 제단이 시현에게 넘어가는 것보다야 나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왕근식은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손에 들었다.
이것을 자신에게 넘겨준 이한울의 목소리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사용하도록 해요. 사용 방법이나 효과는 충분히 숙지하고 계시죠?”
“물론일세.”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왕근식이 유리병 뚜껑을 열었다.
비릿한 피 냄새에 달콤한 향이 섞여 있었다.
이를 악문 왕근식은 내용물을 상담실 전체에 골고루 뿌려 댔다. 혹시라도 자신의 몸이나 의복에 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얼마 못 가 상담실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정도로 병에 담긴 신혈의 양은 상당했다.
“됐어! 이제 악마들이 내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 줄 거야.”
가방을 짊어진 왕근식이 상담실을 벗어났다.
조금 전부터 옥상에서 울리는 폭음을 감지한 몇몇 학생들이 상담실 입구에 모여 있었다.
“선생님! 아까부터 옥상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옥상은 선생님의 친구 분이 사용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 무슨 사고가 난 건 아니겠죠?”
“시현 형이 권수학을 죽인 이유가 재현이의 복수 때문이라던데, 대체 이게 무슨 소리예요? 선생님!”
그들은 제각각 목소리를 높였다.
한두 명이면 무시하겠는데 그 수가 제법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왕근식은 사람 좋은 미소를 만들었다.
“자자, 다들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렴. 무슨 일이 있는지는 내가 확인해 볼 테니까. 재현이에 대한 것도 정리가 되면 다 설명해 주마.”
“네, 선생님!”
상냥한 왕근식의 말에 학생 무리는 빠르게 흩어졌다.
신뢰할 수 있는 리더인 그라면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근식은 지금부터 그들의 믿음을 배신할 예정이었다.
학생들의 시선을 피해 정문에 도달한 왕근식은 정문에서 바리케이드의 보수 점검 및 정문의 출입 기록을 작성하는 남학생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날도 추운데 고생이 많은 너를 위해 손난로를 가지고 왔지.”
“오오!”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순수하게 기뻐하는 남학생에게 다가간 왕근식은 그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듯 했으나 남학생은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에 검이 꽂히는 순간까지 말이다.
“정말 수고 많았네.”
“커헉! 서, 선생님……?”
몸 안쪽에서부터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로 왕근식을 바라보던 남학생은 이내 힘없이 쓰러졌다.
늘 자식 같다고 말하고 다니던 학생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은 왕근식은 드디어 학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크아아아아!]
멀리서 들려오는 악마의 잔뜩 흥분한 울음소리가 왕근식을 기쁘게 했다.
이제 곧 저들이 학교로 들이닥칠 것이다.
남은 건 가방에 든 이종남의 연구 성과를 이한울에게 전하는 것뿐이다.
자신이 시현을 따돌리고 무사히 학교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판단한 왕근식은 발걸음도 가볍게 병원으로 향했다.
때문에 그는 머지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시현은 좌측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온갖 불쾌한 냄새가 진동하던 우측과 달리, 좌측 연구실의 공기는 제법 청량한 축에 속했다.
창문도 나 있고, 어설프게나마 환풍기 같은 물건도 설치되어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공기뿐 아니라 연구실 내부도 굉장히 깨끗했다. 청소를 제법 열심히 한 모양이다.
방의 중심부에는 제 무릎을 끌어안은 작은 남자아이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부는 불그스름했으며, 머리털은 죄다 빠져 있어 안쓰러움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가장 시현을 불쾌하게 한 것은 아이의 발목에 감겨 있는 쇠사슬이었다.
시현은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얼마 전 민서라와 함께 호텔에서 구해 온,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까지 지켜 낸 그 아이였다.
“왔나? 역시라고 해야 하나. 생각보다 이르군.”
아이의 뒤에는 여유로운 분위기의 구종환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걸친 그는 상당한 사이즈의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그래도 늦었어.”
비릿하게 웃은 구종환이 아이의 팔에 주사 바늘을 꽂아 넣었다.
아이의 작은 몸이 흠칫 떨리며, 무표정하던 얼굴에 두려움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
험악한 표정을 한 시현은 당장이라도 구종환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이성이 그의 폭주를 만류했다.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확인한 발 앞에 가는 낚싯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나하나 피해 갈 정도로 빈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짧은 시간에 용케도 이만큼 함정을 설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것을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원래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대부분 최악의 순간에서도 제 살길은 도모해 놓기 마련이니까.
이러는 순간에도 주사기의 약물은 아이의 몸속으로 투여되고 있었다.
‘하나하나 제거하다가는 끝이 없어.’
복도의 함정을 제거할 때처럼 시현은 실체화시킨 유령으로 함정들을 제거했다.
쨍그랑!
줄과 연결되어 있던 연금술 약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깨졌다.
그 순간 함정의 중심부에 있던 유령을 덮친 것은 엄청난 규모의 바람이었다.
[끼아아아악!]
강풍이 강하기는 하지만 살갗을 죄다 찢어발기는 폭풍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버티고 버티던 유령을 뒤로 날려 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뿐이랴. 바닥이 꽁꽁 얼며 마찰 계수가 상당히 낮아졌다.
아무리 시현이라도 저 빙판 위에서 강풍을 헤치며 나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하나같이 살상력은 없는 함정들이야. 마치 시간을 끌려는 듯한……. 설마……!’
더 이상 참지 못한 시현은 발을 굴러 바닥을 덮은 얼음을 깨부쉈다.
가만 놔둬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만, 지금은 1분 1초가 급했다.
발판을 마련하고 자신을 밀어내려는 바람을 억지로 헤쳐 나간 시현이 본 것은, 이미 완전하게 하수인으로 변화를 마친 아이였다.
[끄아아아아!]
어디에도 구종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 뒤쪽의 문이 잠기는 소리가 살짝 들려왔을 뿐이다.
“내가 만약 처음에 오른쪽 문이 아니라 왼쪽 문을 선택했다면 널 구할 수 있었을까?”
무기를 강하게 쥐는 시현의 손이 떨렸다.
하필이면 저렇게 어린아이라니.
자연히 그날의 기억이, 아포칼립스 초창기에 만났던 이서윤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아아아아!]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 버린 하수인이 시현을 발견하고는 발광했다.
발목에 매여 있는 쇠사슬 따위는 아무런 족쇄도 되지 못했다. 마치 물먹은 종이처럼 너무 쉽게 찢어져 버렸다.
하수인이 되면 머릿속에 남는 것은 오로지 하나, 식욕뿐이다.
주식은 피와 고기.
굶주릴 때는 뼈도 씹어 먹으며 가장 좋아하는 부위는 뇌와 심장이다. 가장 좋아하는 사냥감은 인간이고.
이제 막 감염이 끝나 잔뜩 허기가 져 있는 하수인이 눈앞에 있는 사냥감을 두고 욕망을 참을 리가 없었다.
하수인은 시현을 사냥감으로 삼았다.
“미안하다.”
죄가 없는데도 악인의 필요에 의해 죽을 운명에 처한 아이를 향해 사과의 말을 남긴 시현이 검을 휘둘렀다.
일격으로 깔끔하게 끝을 낼 생각이었다.
까앙!
“……?”
검은 하수인의 목을 베어 내지 못했다.
들어 올린 하수인의 오른팔이 검을 막아냈던 것이다.
설마 자신의 공격이 막힐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시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속도도 속도지만, 문제는 그 강도다.
평범한 하수인이었다면 공격을 막은 팔이 잘려 나갔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금속이라도 때린 듯 손이 아려 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현은 자신의 얼굴을 노리고 뻗어 오는 아이의 손바닥을 보며 확신했다.
“3단계!”
쫘악!
강력한 일격이 시현을 보호하고 있는 외피를 한 움큼 깎아 냈다.
경이로운 공격력이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시현은 바닥에 구르는 주사기를 발견했다.
빈 주사기는 하나가 아닌 두 개였다.
“하나는 이 아이를 하수인으로 만들었을 테고, 다른 하나는……. 레벨 서포터인가.”
보통 악마를 통해 감염된 하수인은 1단계부터 시작한다.
인간을 사냥해 배를 채우며 경험을 쌓고 차근차근 위험 단계를 올려나가는 게 정석이다.
그러한 성질을 토대로 일부 생존자는 하수인을 두고 악마계의 구원자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구종환이 만든 약은 복용자를 곧바로 2단계 하수인으로 각성시킨다.
문제는 레벨 서포터가 하수인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눈앞에 있는 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3단계 하수인.
무려 3레벨 구원자와 비슷한 수준의 위력을 가진 인류의 적이다.
“후우…….”
시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1레벨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아무리 시현이 두 개의 권능을 가져 그로 인해 동레벨 구원자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레벨의 차이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오랜만에 목숨 걸고 싸워야겠네. 하다못해 핏빛 칼날이나 검은 가시만 있었어도…….”
시현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려 했다.
전투에서 늘 승승장구할 수 있는 건 두 개의 권능을 통해 남들보다 항상 앞서 걷고 있었기 때문이지, 전투 그 자체에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의 전투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강한, 아직 어린아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적과 싸우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드디어 윤시현도 자기보다 강한 인간과 싸우게 되는구나! 음……. 인간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무력 면에서 위기를 맞은 건 처음 아니야?
―할 수 있다아앗!
간만에 댓글창도 난리가 났다.
[우아아아아!]
하수인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지만 모든 공격이 빠르고, 공격력까지 뛰어나다.
시현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상대를 떠본다거나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힘의 3할을 숨긴다거나 하는 여유를 부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총동원했다.
<이자프의 규칙에 따라 대상이 악으로 지정됩니다. 대상을 처단하기 전까지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나 하수인은 인류의 적이다.
그렇기에 악이다.
디딤 발을 내딛는 시현의 검과 전신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을 닮은 검은색 기류가 솟구쳤다.
크게 휘두른 검이 하수인의 가슴을 베었다.
동시에 하수인의 날카로운 손톱이 시현의 목덜미를 훑었다.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며 시현을 지켜주던 외피가 산산조각 났다.
아주 살짝,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