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선인의 지혜라는 게 제법 잘 들어맞는 거였구나.
왕근식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초조함은 실패를 불러온다는, 지혜가 담긴 옛말을 무시하고 얼마 남지 않은 성공까지 전력으로 달린 결과, 성대하게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처구니가 없군. 윤시현 그 작자만 없으면 될 거라 생각해서 그 인간에게 부탁한 거였는데. 설마 이재현 그놈이 꼬리를 잡을 줄이야.”
사실을 말하자면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렇기에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던, 무가치하다 판단했던, 돌부리에 걸려 거하게 넘어지고 만 것이다.
다행인 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정도는 아니란 점이었다.
옥상에 걸린 결계는 오로지 허락받은 사람만이 통과할 수 있다.
3레벨 구원자가 아니라면 힘으로 파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즉, 옥상에 있으면 그는 안전하다.
그 사람의 보장이 있었으니 왕근식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천만다행히 연구 재료는 대부분이 옥상에 있으니, 남은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일도 없다.
그러나 그냥 넘어가기에는 배알이 꼴렸다.
“이재현 그놈에게는 상응하는 처벌을 내려야겠는데.”
왕근식이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방구석으로 눈길을 줬다.
뭐가 그리 두려운지 제 몸을 꼭 끌어안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신의 유일한 체스 말이 보였다.
재능만 보자면 폰 수준이지만, 다행히도 폰은 프로모션을 통해 더 뛰어난 말이 될 수 있었다.
폰이 프로모션을 할 수 있게끔 돕는 건 왕근식의 역할이었다.
“권수학.”
심장을 관통하는 낮은 음성에 체스 말 권수학이 어깨를 떨었다.
“네, 선생님.”
대답에는 명백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가 하수인을 연구하기 위해 살아 있는 생존자를 실험체로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쭉 저런 상태다.
그러나 권수학이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왕근식은 거리낄 게 없었다.
그는 공범자다. 누가 누굴 배신한단 말인가.
“이재현에게 이걸 먹이고 오렴.”
그가 건네준 것은 작은 유리병에 담긴 검붉은 색의 액체였다.
뭔가 싶어 뚜껑을 열어 보니 비릿한 냄새가 났다.
“이게 뭔가요?”
“네가 몇 년이나 짝사랑했던 여자를 빼앗아 간 놈에게 내릴 천벌이 담겨 있는 약이지.”
“…….”
복잡하게 꼬아 말했지만 간단하게 풀어 말하자면 독약이라는 소리다.
권수학은 폭주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살며시 벌어진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 하지만 선생님. 전에 선생님이 주신 약을 이재현한테 먹였지만 그놈은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잖아요.”
“그때는 약을 고체로 만드느라 무리하게 양을 줄이고 다른 이물질을 섞어서 효능이 떨어졌을 거라 생각해. 그러나 이건 원액이다. 전에 사용한 약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효과를 가졌으니 결과는 확실할 거다.”
왕근식은 자신이 만든 약의 효능을 확신했다.
몇 번의 실험을 통해 확신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았으니까.
“저는…….”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저 멍청한 체스 말은 제 본분을 망각하고 저항하려 들었다. 두려움 때문이리라.
귀찮은 마음이 얼굴에 드러날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체스 말은 원래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왕근식은 떨리는 권수학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주며 속삭였다.
“사실 이재현이 어찌 되든 나는 상관없단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선의야. 좋아하는 여자를 평생 지켜봐야만 하는 널 위한 내 마음이지. 그러니 선택은 네가 하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왕근식은 권수학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거라 확신했다.
권수학은 이미 세 개의 환약을 통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증명했다.
무엇보다 그럴 인간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자신의 조수로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 내려가 보렴.”
그는 굳게 닫혀 있던 옥상 문을 열었다.
* * *
단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는 권수학의 요청에 시현이 향한 곳은 학교에서도 꽤 외진 곳에 위치한 교실이었다.
폭주한 이나연이 감금되어 있던 교실에는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셔.”
권수학은 대뜸 검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들이밀었다.
열린 뚜껑을 통해 비릿한 냄새가 났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교단을 정찰하러 나선 날에 권수학이 건넸던 환약에서도 비슷한 냄새가 났다.
이번 건 그것보다 조금 더 냄새가 진했다. 그러니 저 유리병에 든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보나 마나 이재현을 하수인으로 만든 환약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 가는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주 대놓고 나오네.’
시현은 조롱하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게 뭔지 알고?”
“네가 옥상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상한 실험을 한다며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며.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실험에 동참하고 있는 건데. 너 때문에 생긴 오해니 니가 눈으로 확인한 후 직접 풀어.”
“그거랑 이 약을 마시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옥상에 있는 실험실에는 유독한 약품이 많아. 그게 기화되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이걸 마셔 둬야 해.”
“그런 거라면 방독면을 쓰면 되잖아. 전에 보니까 누나가 공수해 온 방독면 몇 개 있던데. 그게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잠시 밑으로 내려와서 증명하면 되는 일이고.”
“그건…….”
“왜. 못 내려올 이유라도 있나?”
시현의 반론에 권수학은 잠깐 침묵했다.
이 정도면 납득하겠지 하고 더 세심한 거짓말은 준비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의미 없이 좌측 상단만 응시하고 있었다.
시현은 더 이상 조롱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는데 얼마나 더 시간을 줘야 해?”
“……그래, 사실 이건 독약이야.”
다 까발려졌다고 생각한 건지 이제는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넌 이걸 마셔야 할 거야.”
권수학이 비릿하게 웃었다.
악당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비열함이 듬뿍 담긴 미소였다.
“네가 마시지 않으면 옥상에 감금되어 있는 아이들이 같은 약을 마시게 될 거니까.”
권수학은 자신의 협박이 100% 통할 거라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비록 지금은 관계가 틀어졌다지만 권수학과 이재현은 친구 사이였다. 절친하다 표현해도 될 정도로.
그렇기에 권수학은 이재현이 어떤 성향을 가진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재현은 이게 독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시고도 남을 인간이다.
그는 시끄럽고 촐싹거리는 인상과 달리 속이 깊은 학생이었다.
원작에서 이재현은 그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생면부지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다 목숨을 잃었다.
그런 의미에서 권수학의 작전은 제법 훌륭하다 평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수학이 하나 실수한 게 있었으니, 그의 눈앞에 있는 건 이재현이 아니라 이재현의 탈을 쓴 윤시현이라는 점이었다.
성실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진 이재현과 달리, 시현은 자신의 승리와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한 인간이었다.
“그 정도야?”
“뭐가.”
“친구한테 독을 먹여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지희가 좋냐고.”
시현의 한마디는 비수가 되어 권수학을 찔렀다.
상처 입은 맹수가 된 권수학은 시현을 잡아먹을 기세로 이를 갈았다.
감정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미성년자라면, 더욱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을 터다.
그러나 미성년자라 해서 지은 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지 권수학은 시현의 도발에도 그저 웃었다.
눈앞에 보이는 승리가 지독한 착각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어쩌긴.”
시현은 권수학에게 받은 약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권수학의 배후, 이재현을 하수인으로 만들 수단.
필요한 건 이제 전부 손에 들어왔기에, 남은 건 응징의 시간이었다.
“지금부터 그 대가를 치러야지.”
그렇게 말하는 시현의 음성이 변했다.
다소 가는 듯한 감이 있던 음성에 무게감이 실렸다.
키가 조금 자랐고 눈, 코, 입, 골격, 근육의 형태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재현에서 윤시현으로.
그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이재현의 표정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그는 시현을 삿대질하며 뒷걸음질 쳤다.
“자, 잠깐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죽은 게 아니었어?”
“축하한다. 너는 그날 재현이를 죽이는데 성공했어. 그것 때문에 이 자리에서 죽는 거고.”
시현은 간만에 자신의 얼굴로 웃었다.
상쾌한 미소와 함께 시현이 행한 것은 교실의 구석까지 몰린 이재현의 오른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가락 하나를 뚝 꺾었다.
이재현이 경악한 눈으로 자신의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인 손가락을 보는 것도 잠시였다.
“으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듣기 좋은 음색이었다.
시현은 콧노래를 부르며 두 번째 손가락을 꺾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재현은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고작 1레벨 구원자인 그의 힘으로 시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싫은데.”
세 번째 손가락에서 이재현은 눈물을 터뜨렸고, 네 번째 손가락에서는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시현은 그의 얼굴에 찬물을 부어 깨웠다.
다섯 번째 손가락에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자,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제발…….”
간절한 호소였으나 진심이 단 1그램도 섞이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저 지금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쇼일 뿐.
어린아이가 자신을 혼내는 부모 앞에서 그러듯 말이다.
물론 시현은 권수학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주 처절하고 악랄하게 응징할 심산이었다.
악인을 응징하는 건 영웅이어야 한다?
그거 다 옛날이야기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더욱 효과적이고 통쾌하게 악인을 응징하려면 같은 악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넋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지 않겠는가.
“너는 재현이를 죽였고, 나랑 민서라 씨까지 죽이려 들었잖아. 그래 놓고 용서라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저는…… 그냥 어쩔 수 없이……. 끄어어어억!”
이번에는 왼손의 첫 번째 손가락을 꺾어 권수학의 말을 강제로 차단했다.
자지러지는 비명을 듣고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어째서 죽었다고 알려진 윤시현이 권수학을 고문하고 있는 것인지를 궁금해하기 이전에, 학생들은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권수학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누구 하나 앞장서서 그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시현이 풍기는 기세가 대단했고, 살벌했으니까.
“시현 씨…….”
뒤늦게 나타난 민서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경우는 모든 걸 알고 있었기에 시현을 말리지 못한 케이스다.
“형, 살아 계셨어요? 아니, 그보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심해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신호석이 시현을 뜯어말렸다.
권수학을 싫어하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동급생 아닌가. 그러니 이러다가는 죽겠다 싶어 나선 것이다.
“사, 살려 줘. 이 인간이 미쳐서 나를 죽이려 한다고! 제발…….”
희망을 발견한 것인지 권수학이 신호석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 마.”
언제 나타난 걸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한 최지희가 신호석을 잡아당겼다.
“뭔 개소리야! 저러다 진짜 죽는다고!”
“죽으라지.”
“너, 너 그게 무슨…….”
“쟤도 재현이를 죽였잖아.”
그녀가 전해 준 진실에 신호석은 헛숨을 삼켰다.
“그러니까 쟤도 죽어야지.”
늘 온화하던 최지희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의 발밑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권수학을 바라보는 최지희의 미소는 병들어 있었다.
친구를 죽여 가면서까지 손에 넣고자 했던 최지희가 보내는 경멸과 증오의 시선에 권수학은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시현은 이 정도로 끝낼 마음이 없었다.
다시 한번 찬물을 끼얹어 권수학을 깨운 시현은 잠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약병을 손에 들었다.
“아무래도 마지막은 이게 좋겠지?”
권수학이 이재현에게 사용한 방법과 동일한 수단으로 죽음을 내린다.
이보다 확실한 복수도 없을 것이다.
“아, 안 돼! 다가오지 마!”
약병의 정체가 극독이라 알고 있는 권수학은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 내며 저항했다.
그러나 다 스러져 가는 울타리가 성난 해일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시현은 약병째로 그의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아아아아!”
강제적으로 약을 삼킨 권수학은 절규했다.
토악질로 내용물을 꺼내려는 것인지 헛구역질을 하다가 부러진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내용물이 다시 바깥으로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억울해!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권수학의 동공이 탁해졌다.
[나는……. 그저 피해자일……. 선생님…….]
더 이상 그 자리에 구원자 권수학은 없었다.
하수인은 붉게 물든 눈동자를 굴리며 식욕으로 범벅이 된 미소를 지었다.
* * *
소란을 피웠으니, 그 소식이 왕근식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일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하수인의 처리를 마친 시현은 뒷수습을 민서라에게 맡겨 둔 채 곧장 옥상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 시현의 모습은 점차 바뀌었다.
조금 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목숨을 거둬 간 권수학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다.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옥상의 문 앞에 도착한 시현은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러나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손에는 권수학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열쇠가 들려 있었으니까.
열쇠 구멍에 쏙 들어간 열쇠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철컥.
무거운 소리를 내며 옥상 문이 열렸다.
탁 트인 하늘 아래 펼쳐진 옥상.
그곳의 8할 이상을 차지하는 간이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만드는데 상당한 토큰을 때려 박았으리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건축물의 입구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래가 소란스러운 걸 보니 성공한 모양이네.”
왕근식.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딴판인 서늘한 미소로 권수학을 연기하는 시현을 반겨 주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