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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57화 (57/225)

[57화]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시현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희열, 통쾌함, 환희.

이런 말로는 포장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의 파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적셨다.

‘성공했다.’

그날.

시현에게 지독한 절망감을 심어 줬던 세 사람 중 한 명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했다.

절망에 허우적대던 이설아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시현을 기쁘게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이한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함정을 팠다가 역으로 당한 셈이 되었으니 속이 뒤집어지겠지.’

이 자리에 춤판이라도 깔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다.

“젠장! 절대 놓치면 안 돼!”

“하지만 따라잡는다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2, 3번 대장이 동시에 달려들었는데도 못 당한 상대잖아.”

“멍청아. 그 정도로 격하게 싸웠으니 그놈도 지쳐 있겠지. ……아마도.”

무장한 전투원 둘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앞을 지나갔다.

시현과의 거리는 기껏해야 10여 미터.

만약 밤하늘에 걸린 달이 가늘지 않았다면, 커다란 차량이 그를 숨겨 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발각되고 말았을 것이다.

들킨다 해서 위험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일이 귀찮아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차를 숨겨 둔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네. 차는 버려야 하나.’

하필이면 타고 온 차량이 소총을 대가로 거래한 시현의 차였다.

아깝지만 별수 없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민서라와 합류한 뒤 복귀하는 게 우선이니.

이 근방에 전투원들이 쫙 깔리기는 했지만 구원자는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시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추격을 따돌리며 합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형! 왜 이렇게 늦었어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편의점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두 사람이 시현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시현을 걱정하고 있었는지는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절로 미소가 피었다.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서라 씨.”

“네?”

“남지후를 죽였습니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등으로 시현의 가슴팍을 툭 건드리며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일부나마 복수에 성공한 것에 대해 기뻐하는 건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형.”

민서라의 심리 상태를 유추하려 끙끙거리고 있으려니 이재현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형을 기다리는 중에 중형 악마가 요 앞을 지나갔어요. 아직 근처에 있을 게 분명하니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중형이라……. 욕심이 나기는 하지만 일단은 네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거 같다.”

지금의 시현에게 중형 악마는 그저 경험치를 많이 주는 사냥감일 뿐이다.

단체로 몰려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1:1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본진을 거하게 털린 교단이라면 시현과 민서라의 현 거점인 학교에 그 이상으로 되갚아 주려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되돌아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 의심되는 것도 있었고.

돌아가는 길은 불가피하게 도보를 이용해야 했다.

“학교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하네요.”

얼마나 걸었을까, 상당히 지친 건지 민서라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 정도 운동량은 운동 측에도 끼지 못했을 테지만, 교단에서 천뢰의 진에 직격당한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힘겹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재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리 아파 죽겠네. 권수학 그 자식, 다음에 만나면 제 손으로 죽여 버릴 거예요.”

이재현은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살의를 불태웠다.

“그러려면 아마 교단이랑 정면으로 싸워야 할걸?”

“왜요?”

“정보를 팔아넘긴 대가로 교단에 몸을 의탁하지 않았을까? 나라면 그랬을 거 같은데. 아, 하지만 내가 제대로 엿 먹였으니 권수학을 내칠 수도 있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권수학의 가정교육 수준부터 시작해 온갖 욕을 토하며 분노를 삭였다.

그러던 이재현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조용해졌다.

시끄럽던 사운드가 침묵한 것은 반길 만한 일이었으나 그 이유가 궁금했다.

“갑자기 왜 그래?”

시현은 가장 후미에서 걷던 이재현에게 시선을 줬다.

살짝 허리와 고개를 숙인 이재현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혀라도 씹었어?”

가끔 있는 일이다.

떠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이재현이 혀를 씹고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을 몇 번이나 봐왔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우웨엑!”

이재현이 무언가를 토했다. 검붉은 피였다.

뿐만이 아니다. 이재현의 동공이 축소되었으며 호흡은 상당히 거칠었다.

자세히 보니 대량의 땀이 그의 옷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코에서도 피가 흘렀다.

스스로에게 일어난 변화에 놀라 당황하는 이재현을 응시하는 시현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뭐지? 전투에서 부상이라도 입은 건가? 아니, 서라 씨라면 모를까 이재현의 외피는 멀쩡했는데? 천뢰의 진의 후유증 중 토혈은 없어. 그렇다면 병? 구원자가?’

당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시현은 그의 상태를 보다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전문가도 아닌 시현이 살펴본다 해서 무언가 뾰족한 대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커헉!”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이재현이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이번에는 검은 피였다.

“설마 내상인가? 민서라 씨, B형 치료제 가지고 계신 거 있나요?”

“잠시만요!”

울상이 된 민서라는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케이스 하나를 시현에게 건넸다.

케이스 안에는 A형과 B형 치료제가 몇 개씩 담겨 있었다.

그 중 B형 치료제 하나를 꺼내 이재현에게 먹였다.

A형이 외상에 효과가 있다면 B형은 내상에 효과를 보이는 약품이다.

그러나 이렇다 할 효과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이재현이 토해 내는 검은 피의 양이 많아졌다.

“복용과 동시에 반응을 보이는 약품인데도 효과가 없다면 내상도 아니야.”

도저히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재현의 신체에 변화가 찾아왔다.

눈동자가 붉어지고 흰자가 검게 물들었다.

가뭄에 마른 대지처럼 피부가 갈라지고 붉은색의 근육 조직이 드러났다.

서서히 흘러나오는 피가 보랏빛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한 순간, 시현은 반사적으로 단검을 뽑았다.

“하수인! 게다가 2단계 감염?”

경악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구원자는 악마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해서 감염되지 않는다.

원작에도 등장하지 않았으며,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가능성조차 제시되지 않았다.

의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재현은 악마와 교전을 하지도 않았고, 그로 인해 상처를 입지도 않았다.

이재현이 가진 외피는 아직도 건재하다.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감염되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심지어 피부가 갈라지고 드러난 근육 조직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것은 2단계 감염의 증표다.

1단계 감염을 거치지 않고, 2단계 증상이 바로 나타나는 것은 구원자가 감염 증세를 보인 것에 뒤지지 않을 만큼 경악할 사안이었다.

“말도 안 돼. 대체 왜……!”

변화를 지켜보던 민서라 역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두 사람이 현실을 부정한다 해서 눈앞의 현실이 없던 일로 되지는 않는다.

[아아……. 아? 뭔가……. 몸에 감각이 사라지는 거…….]

이재현의 목소리가 변했다.

서서히 이성이 마비되고 있는지 표정이 풀리고 벌어진 입에서 끈적이는 침이 흘렀다.

‘2단계의 하수인은 절대 살려 둬서는 안 돼.’

어째서 이재현이 하수인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주저는 위험을 낳는다.

시현은 단검을 꺼냈다. 그러나 쉽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

고작 며칠이지만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재현과의 기억이 가득했다.

늘 활기차고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며 시현을 잘 따르던 이재현이 진짜 동생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망설였다.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아마 이 망설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떨리는 손 위에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민서라의 손이 시현의 손을 덮고 있었다.

‘아…….’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눈물을 쏟고 있는 그녀가 어째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미안하다, 재현아.”

단검은 이재현의 심장을 꿰뚫었다.

지독한 고통에 이재현의 몸이 크게 휘었다.

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재현의 두 눈에서 배신감을 발견한 순간, 구토가 나올 거 같았다.

시현은 고개를 숙였다.

단검을 타고 전해지는 움직임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두 사람은 이재현의 시신 앞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감지한 시현이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위태로워 보이는 민서라가 이재현의 소지품을 뒤지고 있었다.

“민서라 씨?”

“재현이가……. 재현이가 이렇게 된 원인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다.

구원자가 하수인으로 타락한 전대미문의 사건.

분명 시현이 파악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현도 민서라를 도와 이재현의 소지품을 파악했다.

이재현의 소지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500㎖ 생수, 1,000원짜리 초코바 하나, 스마트폰, 수첩과 볼펜 등.

결국 무엇 하나 이재현의 죽음과 연관이 있으리라 추정되는 물건은 없었다.

방법이 없다. 완전히 막다른 길에 봉착하고 만 것이다.

민서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아니,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딱 하나.

유일하지만 가능하면 꺼내고 싶지 않았던 수단이 남아 있었다.

* * *

<연기를 시작합니다. 연기 대상 : 이재현.>

시현은 민서라와 함께 학교로 돌아왔다.

“후우…….”

긴장감에 한숨을 토한 시현은 정문 근처에 버려져 있는 차의 백미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봤다.

어딜 봐도 어색한 곳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이재현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시현 씨, 정말 괜찮을까요?”

이번 작전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시현만이 아니었다.

초췌한 안색의 민서라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시현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괜찮습니다. 실수만 안 하면 돼요. 실수만…….”

한숨을 내쉰 민서라가 앞장서서 정문을 통과했다.

두 사람이 학교에 들어서자 몇몇 학생들이 달려왔다.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이다.

“언니! 수고하셨어요!”

“재현이 너도. 2레벨이 됐다더니 그래도 엄청 쓸모 있어졌네.”

“갑작스레 선생님의 의뢰 때문에 밖에 나가셨다고 들었어. 나도 누나를 도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학생들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의 귀환을 반겼다.

하지만 밝은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격한 환대에도 웃지 않는 두 사람.

그리고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 나머지 두 사람.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오빠! 저만 두고 어디를 갔다 온…… 어라?”

계단을 한 번에 두 개씩 뛰어내려 온 이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찾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운동장까지 나갔다 온 이나연은 누가 봐도 초조해하고 있었다.

“서라야, 오빠는?”

“그게…….”

충분히 각오하고 있던 순간이다.

시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켜보는 입장인데도 심장이 떨렸다.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것인지 민서라는 입술만 달싹였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아, 혹시 너희만 보내 두고 딴 길로 샌 거야? 악마를 사냥하면서 경험치라도 벌고 돌아온대? 치사하게 나만 쏙 빼놓고…….”

“죽었어.”

“……?”

“정찰 도중에 갑자기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셨는데, 하필 그때 교단 소속의 구원자들이 들이닥쳐서……. 헉!”

민서라는 헛숨을 삼켰다.

비단 그녀뿐 아니라 주위를 둘러싼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학생들 전원이 겁을 집어먹었다.

‘이런 미친…….’

시현마저도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을 정도다.

“서라야.”

조용하게 민서라를 부르는 이나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져 있었다.

반쯤 내리깐 흑색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붉은빛을 띠었다.

“세상에는 해도 좋은 장난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장난이 있어. 넌 지금 선을 밟고 있고. 그거 넘을 거야?”

이나연이 한 걸음을 더 다가갔다.

신장은 이나연이 조금 더 작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나연이 그 누구보다 더 거대해 보였다.

“다시 한번 물을게. 오빠, 어디 있어?”

“…….”

민서라의 시선이 시현에게 향했다.

구조를 요청하는 시선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눈앞에 있는 이나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같은 2레벨 구원자이며 두 사람 사이에 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이나연이 조금 우세하지만 조금만 방심하거나, 민서라에게 조금만 운이 따라 준다면 충분히 승패를 뒤집을 수 있는 그 정도 차이랄까.

다시 말해, 민서라가 그녀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민서라가 떨고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세운 첫 번째 목적의 달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뜻이다.

시현은 민서라에게 시선을 보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입술만 움직여 ‘파이팅’을 외쳤다.

절망하던 민서라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난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해.”

콰아아아!

이나연을 중심으로 적색의 아지랑이가 대량으로 피어났다.

“으아아악!”

“꺄아아아!”

온갖 비명이 난무하고 쓰러지거나 정신을 잃는 자들이 속출했다.

일부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바지를 축축하게 적셨다.

시현은 사람들을 주저앉게 만드는 적색 아지랑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것의 정체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의지로, 유형화된 살기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수준이다.

띠링!

상황에 맞지 않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붉은색 메시지가 떠올랐다.

<에르의 구원자 이나연의 특성. 천살성이 발현됩니다.>

“됐다!”

성공했다.

그러나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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