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히이이익!”
비명 소리가 들려온 순간 권수학은 창문을 통해 달아났다.
그를 쫓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남겨진 두 사람이 걱정이었다.
시현은 땅을 박찼다.
어두운 화장실을 벗어나는 시현을 반겨 주는 것은 눈부신 빛이었다.
병원 1층.
복도, 바닥, 천장을 구분하지 않고 가는 선들이 내달리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들은 푸르스름한 빛을 토해 냈다.
“이런 미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파지지직!
청색의 전류가 시현을 덮쳤다.
1층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던 선들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그러자 허물어지듯 쓰러진 시현은 무릎을 꿇었다.
사방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무장한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둘 시현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복장은 각양각색이었으나 왼쪽 가슴팍에 하나같이 교단을 상징하는 역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었으며 도, 검, 창, 총 등 쉽게 구할 수 없는 장비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긴 머리를 묶어 올린 여성이 무전기를 꺼냈다.
“서관 1층 화장실에서 목표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윤시현으로 파악됩니다.”
[죽여.]
무전기에서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무전을 종료한 여성이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접근해 왔다.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현의 목을 베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까앙!
“역시…….”
여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시현의 목 언저리에 피어난 외피가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시현을 보호하고 있는 외피를 벗겨 내지 못한다면 그녀는 상관의 명령을 완수할 수 없다.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그녀는 권능을 사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검에 불꽃을 피워 냈다.
그리고 내려치려는 찰나였다.
“천뢰의 진. 침입자에게 강한 전류를 흘려보내 신체를 마비시키는 함정형 권능. 맞지?”
시현의 입이 열리며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현의 말대로 그를 공격한 것은 천뢰의 진.
제아무리 2레벨 구원자라 해도 적중당하면 전신이 마비되어 족히 10분은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시현은 놀랍게도 정확한 발음으로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내려치는 여성의 검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여성의 검은 시현의 목에 닿기도 전에 적색의 날을 가진 검에 가로막혔다.
“말도 안 돼! 천뢰의 진에 당하고 벌써 움직일 리가 없어! 설마 마비에 걸리지 않은 건가?!”
여성의 동공이 격하게 떨렸다.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교단의 전투원 전원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위험했다.’
천뢰의 진에 걸려든 시현은 의심할 것 없이 마비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제아무리 천뢰의 진이라 해서 시현을 오래도록 속박해 둘 수는 없었다.
시현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이거 그냥 먹으면 되는 건가?”
시현의 손에는 말라비틀어진 세계수의 열매가 들려 있었다.
빛깔부터 윤기, 향, 모양 등 모든 부분에서 지독하게 맛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소모성 아이템 중에서 영구적으로 능력을 높여 주는 것은 굉장히 귀하다.
설사 진흙 맛이 난다 하더라도 전부 먹어 치워야만 한다.
“제발 맛있어라!”
시현은 간절한 염원을 담아 열매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씹었다…… 과즙이 터졌다.
“젠장…….”
예상대로 더럽고 끔찍한 맛이었다.
차라리 진흙을 먹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그러나 시현은 참고 열매를 꼭꼭 씹어 삼켰다. 그 결과는 푸른색 메시지 창이 되어 나타났다.
<말라비틀어진 세계수의 열매를 복용했습니다.>
<모든 뇌속성 저항력이 30% 상승합니다.>
회상을 마친 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했던 저항력이 비로소 빛을 발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현이 입고 있는 외투에도 적지만 뇌속성 저항이 달려 있었다.
덕분에 시현은 천뢰의 진에 적중당하고도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현은 주변을 살폈다.
그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전투원의 수는 총 일곱.
그 중 구원자는 눈앞에 있는 여성 하나뿐으로 추측되었다.
‘천뢰의 진은 범위도 넓고 외피마저 관통하지만, 준비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아무리 빠르게 잡아도 12시간 정도.’
시현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병원에 잠입하고 난 후 정확히 세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즉, 그가 병원에 잠입하기도 전에 설치한 함정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천뢰의 진은 상시 깔아 둘 수 있는 함정이 아니야.’
천뢰의 진은 함정이지만 근본은 어디까지나 권능이며, 범위나 효과가 막강한 만큼 정신력의 소모도 크다.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1레벨 구원자라면 고작해야 10분이고, 2레벨 구원자라 해도 겨우 30분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하나뿐이다.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잠입할 거라고 알고 있었구나?”
어째서 1층에 생존자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권수학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지. 혹시 권수학이 우리를 팔아먹었나?”
“…….”
시현의 질문에 답을 해 주는 이는 없었다.
쉽게 답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싹 다 잡아 놓고 고문이라도 해서 정보를 뽑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천뢰의 진에 당했을 민서라와 이재현을 구출해야 한다.
천뢰의 진이 설치된 곳은 병원의 1층 전체.
지금쯤 교단의 전투원들은 1층 어딘가에서 마비되어 있을 일행을 마무리 짓기 위해 찾고 있을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뜨릴 전투원들도 문제지만, 그 이상으로 교단의 구원자들이 위험하다.
“빠르게 끝내자.”
핏빛 칼날의 끝이 바닥을 때렸다.
탁.
그 자그마하고 마른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교단의 전투원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촤악!
일격이었다.
제법 실력이 뛰어난 축에 속하는 전투원의 머리가 고작 일격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절단면으로부터 피를 흩뿌리며 말이다.
“아아…….”
그걸 목격한 여성 구원자는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여기 있는 인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의 구원자가 아니라고.
“기, 긴급 상황입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뭐?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상황인데?]
“그러니까 지금 무슨 상황인가 하면…….”
정확한 보고를 위해 그녀는 전방을 주시했다.
“…….”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전원을 켜고 무전을 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수 초 남짓.
그사이에 하얗던 병원의 복도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의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겨우 둘뿐이었다.
“저, 전멸했습니다.”
[전멸이라고? 상대는 마비 상태였을 텐데?]
“3번대 대장님! 윤시현은……!”
촤악!
무전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던 여성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콰앙!
폭음과 함께 지독한 열기가 덮쳐 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혹한 열기가 목구멍과 기도에 열기를 입혔다.
괴롭다.
죽을 것 같았다.
목청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까딱할 수 없었다.
이재현은 가까스로 움직이는 눈동자만 굴려 우측을 확인했다.
콰득!
옆으로 쓰러진 채 부르르 떠는 민서라의 관자놀이에 창이 꽂혀 들었다. 외피가 깎여 나가며 오색의 파편이 흩날렸다.
창을 쥔 남자는 몇 번이고 민서라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그러다 지친 건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두통을 호소하는 동료를 호출했다.
“젠장, 이게 외피란 건가? 더럽게 단단하네. 야, 화염탄 한 방 더 박아 주라.”
“낮에 악마와 교전하느라 남은 정신력이 바닥이야. 회복되려면 멀었어. 그래도 곧 다른 인원이 도착할 테니까 참아.”
“그 전에 끝장을 내야 우리 공이 되지. 으쌰아아!”
남자는 기합을 내지르며 온 힘을 다해 창을 내려찍었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어코 민서라의 외피가 완전히 벗겨졌고, 남자가 반색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움직여.’
이재현은 필사적이었다.
지금까지 저 남자의 공격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외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피가 없다면 저 무식한 남자의 창이 민서라의 머리를 꿰뚫을 것이다.
‘움직여!’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무기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으나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
힘들고 괴롭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민서라가 죽을 테니까.
“캬아! 드디어 됐다!”
“그나저나 이 여자 민서라 맞지?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징그럽게 예쁘네.”
“그러게 말이다. 세상이 멀쩡했을 때는 이런 여자랑 손 한 번 잡아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는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다니…….”
“그래서 안 하려고?”
“당연히 아니지.”
남자는 창을 든 손을 크게 치켜들었다.
창날이 민서라의 머리를 노리며 내리꽂혔다.
‘제발……!’
이재현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손가락을 움찔하는 게 전부였다.
이다음에 벌어질 일을 차마 직시할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끄아아아악!”
비명이 들려왔다.
민서라의 것이 아니다.
창을 들고 있는 남자의 비명이다.
당황해 눈을 뜬 이재현이 본 것은 목 위에 있어야 할 것을 잃어버린 채 허물어지는 남자.
그의 등 뒤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있는 시현이었다.
“헉……. 허억……. 겨우 안 늦었다.”
짧은 거리를 전력으로 질주해 온 건지 시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땀의 원인이 거친 운동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엉……!”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움직여 시현을 불렀다.
눈이 마주치자 왈칵 눈물이 나왔다.
“우, 우식아!”
쭈그려 앉아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를 악문 남자는 시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다 할 반항조차 못 한 채 조금 전까지 친구가 사용하던 창에 심장을 꿰뚫렸다.
조금 전까지 민서라의 목숨을 위협하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만큼 허무한 죽음이었다.
“늦어서 미안. 나도 습격을 당하는 바람에.”
“죽는…… 줄 알았……어요.”
조금씩 마비가 풀린 건지 민서라가 힘겹게 말했다.
시현은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래도 2레벨 구원자라는 걸까.
보아하니 마비 상태가 풀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았다.
“이미 파악하셨겠지만 함정에 빠졌습니다. 한시바삐 탈출해야 하지만 두 사람을 동시에 업고 탈출하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한 명이라면 업고 달렸겠지만, 두 사람이라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양손을 전부 사용해 버리면 도중에 교단의 전투원과 조우했을 때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조금 위험하지만 이곳에서 두 사람의 마비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수학이는……요?”
민서라는 이런 상황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권수학을 걱정했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지만 한 번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남자를 말이다.
이 멍청할 정도로 착해 빠진 여자에게 진실을 전해도 좋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숨기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시현은 진실을 고했다.
“천뢰의 진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시면 알 겁니다.”
“…….”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민서라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시현은 두 사람을 데리고 근처에 있던 진료실로 들어갔다.
머지않아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분명 이 근처에……. 허억! 시, 시체다!”
“어째서 이 두 사람이 죽어 있는 거야? 설마 마비가 풀린 건가!”
“흩어져!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거다!”
시체를 발견한 전투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탐색을 시작했다.
아마도 작정하고 숨은 것이 아니기에 이 장소도 머지않아 들킬 것이다.
“마비가 풀리기까지 얼마나 걸릴 거 같아요?”
“조금만 더 있으면 움직일 수 있을 거 같아요.”
민서라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혀도 풀린 건지 조금 전과 달리 발음도 정확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마비가 풀리는 즉시 창문으로 빠져나가세요. 잠입하고 있는 놈이 있을 수 있으니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가지 말고, 두 블록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만나죠.”
“……시현 씨는요?”
자신을 걱정하는 민서라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시현이 미간을 확 구겼다.
적진 한복판에서 마비에 걸리고 외피까지 벗겨진 사람이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탈출하기 전에 신호를 주시면 적당히 시간만 끌다 도망칠 겁니다.”
함께 도망가다가는 외피가 없는 민서라가 눈먼 총알에 맞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느니 자신이 교단 전투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포위망에 허점을 만드는 게 낫다.
자신이 있어 봐야 방해만 되리란 걸 알기에 민서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시현은 문을 박차고 나섰다.
“바, 발견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있던 전투원이 시현을 보고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게 자신의 유언이 될 거라고는 꿈에서조차 몰랐을 것이다.
“크허억…….”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자상을 입은 전투원이 허물어졌다.
그는 목숨을 잃었으나 마지막 유언은 주변에 퍼져 있던 전투원들을 한 곳에 불러 모으기에 충분했다.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전투원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로 시현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마치 같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를 한 괴물을 상대하는 전사들을 보는 듯했다.
준비한 함정은 통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아홉의 전투원을 죽인 시현이니 저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 부질 없는 짓이다.
‘구원자는 없군.’
제아무리 단단하게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보통의 생존자가 2레벨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시현의 상대가 될 리 없다.
코끼리와 개미의 싸움일 뿐이니, 일방적인 학살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교단 측도 알고 있었다.
“비켜라. 너희가 나서 봤자 개죽음이 될 뿐이야.”
익숙한 음성은, 무전기에서 들렸던 그 목소리다.
‘3번 대장인가 뭔가가 강림하셨나 보군.’
시현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눈길을 줬다.
응집해 있던 전투원들이 갈라지고 그들이 만든 길을 따라 거구의 남성이 걸어 나왔다.
목소리만큼이나 익숙한 남자의 정체를 시현은 잘 알고 있었다.
굉장히 반가운 얼굴이 아닌가.
“남지후, 오랜만이네.”
“그러게 말이야. 분명 그때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살아 있네. 윤시현.”
남지후.
이한울이 영입한 첫 번째 동료이자 차후 권왕이라 불리게 될 구원자가 등장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