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하얀 종이로 곱게 포장해 놓은 것의 정체는 불쾌한 냄새를 내는 작은 환약이었다.
“이게 뭔데?”
“청심환이요.”
권수학은 시현뿐 아니라 민서라, 그리고 이재현에게도 환약을 하나씩 건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하나를 입에 넣었다.
“얼마 전에 근처 약국에서 운 좋게 구한 건데. 실수하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라면서요. 그러니까 꼭 드시고 하셨으면 해서요.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제가 형한테 못할 짓을 한 것도 있고 해서 구해 온 건데…….”
“그래?”
횡설수설하는 권수학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린 시현은 손바닥 위에서 환약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딱히 긴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쓴 것은 질색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비릿한 냄새가 났다.
“이거라도 있으니 다행이네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이재현은 환약을 집어 삼켰다.
출처가 권수학이라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걸 감수하고라도 시현과 민서라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앙금이 남아 있기에 권수학에게는 감사 한 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음……. 난 괜찮아.”
민서라는 약을 반납했다.
“어어?”
설마 돌려받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권수학은 크게 당황했다.
“물론 누나가 이런 일에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데…….”
“네가 주는 건 별로 먹고 싶지가 않네.”
“…….”
웃는 얼굴의 민서라는 대놓고 면박을 줬다.
그러자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물든 권수학은 고개를 숙였다.
소리 죽여 웃던 시현도 환약을 반납했다.
“이유는 같음.”
“아니, 두 분이 그렇게 나오시면 냉큼 받아먹은 제가 뭐가 돼요?”
당황한 이재현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나 이재현 이상으로 당황한 건 권수학이었다.
“혹시 그때 일 때문에 그런 거라면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수학아, 네가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알겠어. 사실 난 너를 이해해. 오죽 무서웠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누나…….”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건 별개야.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야. 너랑 나랑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
“…….”
용서를 구하는 권수학을 단호하게 거절한 민서라가 등을 돌렸다.
민서라의 저런 면모를 처음 보는 권수학과 이재현은 놀란 토끼처럼 눈만 깜빡거렸다.
민서라에게 저런 면이 있다는 건 시현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마냥 착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네.’
그녀가 호구처럼 권수학을 용서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제법 마음에 드는 선택이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브리핑하겠습니다. 목적은 교단에서 최대한의 정보를 뽑아내는 것. 하지만 최우선은 안전입니다.”
시현의 말에 가뜩이나 냉랭하던 분위기가 보다 타이트하게 조여졌다.
다소 과한 감이 있었으나 풀어져 있다가 위험에 처하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리 천리안이 없다 해도 교단의 경비 수준은 낮지 않습니다. 도중에 발각되거나 발각될 것 같은 위기에 처했을 경우, 전원 약속한 루트로 피난합니다. 여기까지 문제 있으신 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즉, 아무 문제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시현이 유령을 이용해 정찰을 시작했다.
벽과 천장을 마음대로 관통할 수 있는 데다 반투명한 유령은 특히 어둠 속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한 특징을 이용하면 경비를 서는 생존자들의 눈을 피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유령들은 안전한 루트를 파악해 시현에게 보고했다.
[으흐흐흐.]
[이히히히!]
보고라 해 봤자 음침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손짓, 발짓을 해 대는 게 전부지만 말이다.
시현은 유령의 안내에 따라 본격적으로 잠입을 시도했다.
마침 하늘에 떠오른 달도 가느다란 시기였다.
짙은 어둠이 저들의 시선에서 일행의 모습을 확실하게 감춰 줄 것이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시현은 병원 앞에 도착했다.
문과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다.
그러나 잠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유령을 안에 집어넣은 후 실체화시켜 잠금 장치를 풀면 끝이다.
너무도 손쉽게 창을 넘어 병원 안에 들어간 시현은 왠지 맥이 빠짐을 느꼈다.
“이게 뭐야. 엄청 힘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몇 배는 쉬워서 깜짝 놀랐네요.”
“시현 씨의 능력이 사기라 그래요. 다른 구원자라면 첫 번째 감시망에서 바로 걸렸을 걸요?”
뒤따라 병원에 들어온 민서라가 기가 막힌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왠지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제 권능은 쓸 기회조차 없었고…….”
“형, 이 정도면 솔직히 우리는 그냥 짐짝 아니에요? 나도 이제 2레벨 구원자고. 해서 도움이 좀 될까 했는데.”
창틀을 넘어오던 이재현도 자존감을 상실한 얼굴이었다.
제일 마지막에 병원으로 들어온 권수학은 어째서일까. 굉장히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빨라……. 너무 빨라…….”
“빠르면 좋지 뭘 그래?”
“네? 아, 하하. 그렇죠. 빠르면 좋죠. 저는 그냥 너무 급하게 행동하다가 위험해질까 봐.”
“그렇게 겁이 많은데 그때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낸 건지 모르겠네.”
“…….”
이재현의 도발에 권수학이 벌레라도 씹은 듯 표정을 구겼다.
당장이라도 욕설을 토할 얼굴이지만 그는 몸을 떨기만 할 뿐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병원의 복도에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분위기다.
[이히히히!]
심지어 옆에서 무의미하게 터져 나오는 유령의 웃음소리가 더욱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주둥이 닫아.”
[이힛.]
그래도 말을 잘 듣는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이죠.”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다. 언제까지 떠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시현은 유령들을 풀었다.
벽, 천장, 바닥을 뚫고 사방으로 흩어진 유령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였다.
[키히히히!]
[쿠후후후!]
유령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설명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시현도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위층에 사람이 있다고? 어느 정도?”
유령은 두 팔을 최대한 크게 부풀렸다.
“많이? 아,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엄청 많아?”
끄덕끄덕.
“뭐하고 있어?”
[크후후후!]
“잠을 자고 있다고?”
끄덕끄덕.
“그렇다면 이 근방은 생존자들의 숙소라고 생각하면 되나?”
도리도리.
“그것만 있는 건 아니라고? 그러면 뭔데? 모여서……. 가방은 왜 가리켜? 아, 먹을 거! 먹을 게 잔뜩 있는 창고도 있다 이거지?”
끄덕끄덕!
이런 식으로.
간단한 건 손짓, 발짓으로 설명하고 난해한 부분은 시현이 예,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정보를 모아 나갔다.
“아무래도 이 부근은 생존자들의 숙소와 식량 창고로 사용되는 듯한…….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유령과 마주 보고 쭈그려 앉아 도란도란 의사소통을 하는 시현을, 민서라는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요. 그냥. 되게 노력하시는구나 싶어서요.”
“어쨌든 이 근방에는 뭐가 없는 거 같으니 안쪽으로 이동하죠.”
유령 군대라 해도 제한이 없는 건 아니다.
그가 부릴 수 있는 유령의 수에 한계가 있으며 술자인 시현으로부터 유령을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날 수 없다.
생각보다 넓은 대학병원 전체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시현이 발로 뛰어다닐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서관은 유령으로 조사하도록 해요. 그리고 동관은 제가 이 애를 보낼게요.”
드디어 활약할 때가 왔다고 판단한 민서라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권능, 황금의 요정을 꺼냈다.
화아악!
어둡던 병원 안이 빛으로 물드는 순간이었다.
“아.”
* * *
일행은 거의 달아나다시피 하며 서관에 이르렀다.
“죄송해요.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사고만 쳐서 죄송해요.”
거하게 사고를 친 민서라는 주인에게 잔뜩 혼이 난 강아지처럼 풀이 죽었다.
혼이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괜찮습니다. 보아하니 병원 바깥의 경비는 철저하지만 생활 공간인 안쪽의 경계는 느슨한 거 같으니까요.”
실제 병원에 진입한 이후 경비 인원은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천라지망을 연상케 하는 외부 경비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다.
낮이었다면 모를까. 자체 발광하는 민서라의 권능은 사용하기 힘들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두 배로 일해야겠네.’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처리하기 위해 시현은 유령들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령들은 제각각 정보를 가지고 귀환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민서라와 이재현.
두 사람과 머리를 맞대 유령들의 언어를 해석하며 조금씩 교단의 정보를 수중에 넣었다.
서관을 모두 조사한 후에는 동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시현은 얼추 병원 전체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만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 중에는 제법 괜찮은 것도 존재했다.
하지만 시현의 표정은 구겨진 종잇장처럼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시현 씨, 표정이 왜 그래요? 반찬으로 오이 무침이 나왔을 때 제 동생이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네요.”
“그 때 동생 분이 무슨 심정이었는지 알 것 같네요.”
정보는 많이 얻었다.
제법 유용한 정보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결정적인 정보, 즉 이한울의 약점이 될 만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뿐이랴.
반드시 이곳 어딘가에 있을 거라 확신했던 레벨 서포터에 대한 정보도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걸 발견하면 반드시 신호를 달라고 명령했으니, 번역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했을 리도 없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너무 조용했다.
말은 문제없을 거라 했지만 민서라의 권능 때문에 어느 정도 소란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없고.
위층에는 사람이 잔뜩 있는데 이상하게 1층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피난 명령이라도 내린 것처럼.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숨이 턱 막히는 게 어디선가 이런 느낌 받아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버지에게 사기를 친 사기꾼 놈과 대화를 나눌 때, 딱 이런 느낌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이 수월하게 잘 풀리고 있는 거 같은데. 막상 뜯어보면 실속은 없는 그런 느낌. 마치 보여 주기 식의…….’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민서라의 음성이 시현의 집중을 흐트러뜨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사람이 하나 사라져 있었다.
보이는 건 이재현과 민서라, 두 사람뿐이었다.
“권수학은?”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에 갔어요.”
“…….”
저 멀리, 어두운 복도를 달리는 권수학의 뒷모습이 보였다.
일행에게 비릿한 냄새가 나는 청심환을 건네며 어설픈 미소로 횡설수설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 * *
“사과는 무슨.”
어두운 화장실 구석에 앉은 권수학은 초조함에 손톱을 씹었다.
안 좋은 습관이란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안 하면 내가 죽을 거야. 용서? 그딴 거 해 줄 리가 없잖아.”
권수학은 며칠 전 있었던 마트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2층의 구석에 숨어 있던 권수학은 바닥의 균열을 이용해 1층에서의 전투를 훔쳐보고 있었다.
2레벨 구원자가 된 일행은 하나같이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현만큼의 능력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아니, 그 누구도 시현만큼 망설임 없이 적을 죽이는 이는 없었다.
두려웠다.
저런 인간이 감히 약탈자들을 끌고 온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전투가 끝나기 전에 뒷문을 이용해 달아나던 권수학은 생각했다. 살해당할 거라고.
만약 저 인간이 멀쩡하게 살아서 학교에 복귀한다면, 틀림없이 자신을 죽이려 들 거라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딱히 내가 아니었더라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누구나 그랬을 거야.”
지독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권수학의 시선은 손목시계에 고정되어 있었다.
11시 59분.
이제 1분 남았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거야!”
그는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왼쪽 팔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손톱이 피부에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그럼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에 열이 올라 뇌세포가 싹 다 녹아 버린 건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30초…….”
“30초?”
“흐어어어어억!”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권수학은 비명을 질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축축하게 물기가 남아 있는 화장실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는 천천히 화장실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고장 난 기계처럼 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화장실 입구를 누군가가 가로막고 있었다.
관리를 잘해 다부진 몸을 가진 20대 초반의 남자.
총기로 무장한 약탈자들을 칼 한 자루로 썰어 버리던 괴물.
윤시현.
그가 하나뿐인 출입구를 떡하니 틀어막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심증인데.”
반쯤 내리깐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마치 살을 에는 겨울바람 같았다.
“너 뭔가를 꾸미고 있어?”
“히끅!”
정곡을 찌르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된 모양이다.
시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뭔지 몰라도 그만둬. 깔끔하게 죽여 없애려다가 서라 씨랑 이은철 씨를 봐서 참고 있는데. 네가 반성은 안 하고 뒤에서 수작질을 부리면 내가 손이 근질거리잖아.”
무뚝뚝하게 토해 내는 그 말이 칼날이 되어 전신을 도륙하는 듯했다.
지독한 공포가 육신을 지배했다.
바지가 축축해졌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끼며, 권수학은 가까스로 한마디를 토해 냈다.
“이미 늦었어…….”
“으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밤의 병원에 울려 퍼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