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학교로 복귀한 시현은 가장 먼저 임진아의 Re write를 확인했다.
경쟁자를 제거해서 얻을 수 있는 원화, 늘어나는 구독자도 중요하지만 시현이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건 역시 Re write였다.
경쟁자가 게임에 참가한 이후의 이야기.
흥미로운 내용이라면 참가 이전의 내용까지 서술되어 있는 Re write는 정보의 덩어리다.
아쉽게도 정해수의 Re write의 경우 그다지 가치는 없었다.
하지만 임진아의 Re write는 뭔가 다를 거라는 묘한 기대가 있었다.
밑에서 세는 것이 빠르던 정해수의 랭킹과 달리, 임진아는 무려 20위권의 참가자 아닌가.
시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다.
임진아.
그녀는 참가자 중에서도 사전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한 케이스였다.
생존을 위한 물품은 물론이요, 원작을 몇 번이고 검토하며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나아가서는 어떻게 다른 경쟁자들을 밟고 상위권으로 올라설지, 고민하던 임진아는 약탈자들에게 눈길을 줬다.
‘극초반부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꼽으라면 단연 약탈자들만 한 세력이 없어. 걸리는 게 있다면 성향인데…….’
약탈자들의 성향은 명백한 악이다.
다른 생존자의 물자를 약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심할 경우에는 그들의 목숨까지도 악랄하게 이용했다.
물론 그들이 군림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2레벨 구원자가 등장하기 이전의 극초반뿐이다.
두 번째 아포칼립스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면 약탈자들은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나 임진아는 자신이 있었다.
원작을 통해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고 있다는 것은 곧 미래를 알고 있다는 말과 진배없다.
그녀는 약탈자들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성향이 악이면 어떻단 말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지옥 같은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한다.
미래를 알고 있으면 초반에만 반짝하는 약탈자들이 아니라 그 초반의 포텐을 이용해 남들보다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라면 할 수 있어.’
해야만 했다.
‘그 애를 위해서라도…….’
본게임이 시작되자 그녀는 철저하게 계획대로 움직였다.
심지어 운까지 따라 줬다.
그녀가 가진 건 최고 등급 중 하나라 말해지는 기냑의 낙인이었다.
그뿐이랴. 게임과 동시에 군주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되는 강소하를 만났다.
성공적으로 강소하를 영입하고, 다음 계획을 진행하던 도중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유령궁주 유설까지 만났다.
그날 임진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다.
후회는 없었다.
엄청난 재능을 자랑하는 경쟁자를 제거한 그녀는 결국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기냑의 축복을 손에 넣었다.
그 힘을 이용해 약탈자들 전원을 무릎 꿇렸다.
현실과 달리 소설 속에서 그녀의 인생을 표현하자면 승승장구요, 탄탄대로였다.
이한울,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임진아는 서울, 더 나아가 대한민국 땅에서 가장 선두에 선 참가자는 응당 자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약탈자들이랑 강소하, 그리고 유령궁주의 권능……. 음, 나쁘지 않네.”
신혈을 사용하는 이한울.
감히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남자였다.
원작의 지식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세력을 긁어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한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권왕 남지후.
천 번째 별 지현아.
야수의 군주 나설주.
칼의 군주 박화영.
그 외에도 원작을 읽었다면 누구나 ‘아!’ 하고 감탄사를 터뜨렸을 굵직한 인재들을 액세서리처럼 주르륵 달고 있었다.
심지어 회복 계열 중에서 최고라 불리는 시간 조작 능력을 가진 참가자 이설아와 천리안을 가진 정유환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초반에는 미미했으나 추후 범으로 성장할 명실상부 최고의 세력으로 병원까지 손에 넣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작은 둥지의 공략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임진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철저하고, 체계적이고, 경이로운 방법으로 많은 것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태양 앞에 반딧불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부터 너는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병원의 산하 세력으로 들어올 건지, 아니면 저항하다 죽을 건지. 세력의 성향이 워낙 달라서 차마 합병하자고는 못 하겠네. 아, 물론 우리 산하로 들어온다면 그에 따른 보상과 지원은 할 생각이야.”
이한울은 웃으며 레벨 서포터를 내밀었다.
이야기의 극후반에나 등장하는 이건 또 어떻게 만든 건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거절은 불가능했다.
그것도 다 힘이 있는 자들이나 고를 수 있는 선택이다.
그녀는 이한울이 내미는 레벨 서포터를 받아들였다.
‘언젠가 집어삼켜 주겠어.’
“…….”
예상했던 대로.
임진아의 Re write를 통해 시현은 제법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쳐 죽어야 할 이한울에 대한 정보를 말이다.
그러나 허공을 응시하는 시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중2병 같은 별명을 달고 있는 등장인물은 하나 만나기도 힘들 텐데. 뭘 어떻게 하면 저렇게 주렁주렁 달고 있는 거야? 아, 하긴.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이상할 것도 없지.”
생명의 탑과 마트.
두 군데에서 허탕을 쳤다지만 설마 차이가 이 정도로 벌어져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총을 든 100명의 군인보다 한 명의 구원자가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한울은 현 시점에서 세계에서 순위권을 다투는 무력을 쥐고 있는 셈이다.
“반면 나한테는 나연이랑……. 서라 씨. 그마저도 한 명은 아직 확답을 못 받은 상태고.”
절망적이다.
개인의 무력은 누구나 부러워할 수준으로 앞서 달리고 있지만 세력으로 따지자면 보잘것없다.
좀처럼 오르지 않는 순위의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던 시현은 스크롤이 아직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 아래에는 임진아가 본게임에 참가하기 전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어째서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이 무지막지한 게임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스물하나.
임진아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이다.
이른 나이에 아기 엄마가 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남편은 일보다 그녀와 아이를 늘 우선시했고, 아이는 잔병치레 하나 없이 무럭무럭 커 갔다.
부유하지는 않아도 가정에 늘 웃음이 넘쳤다.
하지만 불행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라 했던가.
어느 겨울.
둘째를 가진 그녀가 좋아하는 닭발을 사들고 퇴근길에 오른 남편은 신호를 위반한 음주 운전 차량에…….
“지랄.”
욕설과 함께 표정을 한껏 찡그린 시현은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적색의 문자를 싹 치워 버렸다.
임진아의 과거?
그래, 충분히 가슴 아픈 이야기다.
행복한 미소만 짓던 젊은 엄마의 이성이 홱 돌아 버린 것도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세상에 자신만의 사연 없고 자신만의 드라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동정하되, 후회의 감정은 일절 없었다.
만약 다음에 참가자와 대립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시현 씨, 무슨 일 있어요? 눈빛이 사람 하나 잡아먹을 기센데.”
슬금슬금 다가와 배후를 잡은 민서라가 호랑이 흉내를 내며 말했다.
제법 고된 전투가 있었고, 많은 수의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표정은 아이처럼 밝았다.
‘밝은 척하는 거겠지.’
시현이 아는 민서라의 정신력은 그리 강하지 못하다.
“임진아의 Re write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뭐 건진 거 있어요?”
“건진 건 많은데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네요. 기껏해야 임진아와 이한울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랑, 이한울의 세력이 학교 정도는 가볍게 눌러 없앨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것 정도?”
“음……. 진짜 안 좋은 소식이네요.”
말과 달리 크게 아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시현과 그녀는 성향이 달랐다.
이서윤의 죽음을 두고 시현이 복수를 선택했다면, 민서라는 그런 아이가 더는 생기지 않게끔 행동하기를 선택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시현은 그에 대해 함구했다.
“그런데 서라 씨, 알아본다던 건 어떻게 됐나요?”
“말씀드리니까 선생님도 혼란스러워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막 ‘그럴 리가 없는데?’ 이러면서 동공이 떨리는데. 진짜 약탈자들과의 전쟁이 없을 거라 믿고 있던 눈치였어요.”
“그것참…….”
이상한 일이다.
약탈자보다 무력 면에서 한참 뒤처지는 학교의 리더 이은철은 대체 무슨 확신이 있어 전쟁이 없을 거라 확언했고,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무능한 인간이 아니다.
필시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날도 늦었는데 주무세요.”
“네, 시현 씨도 잘 자요.”
웃으며 손을 흔든 민서라가 하품을 하며 숙소로 향했다.
시현도 숙소로 찾아가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경비 인원을 제외한 모두가 잠든 시간이기에 낮과 달리 복도는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왜 밤의 학교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공포영화의 무대로 주로 쓰였는지 알 수 있었다.
“낮에 유령을 봐서 그런지 괜히 긴장되네.”
침을 삼킨 시현은 창문이 없어 유난히 어두운 계단에 도달했다.
구원자들의 숙소로 배정된 3층으로 향한 시현의 눈길이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했다.
‘잘못 들었나?’
아주 희미하지만 무언가 소리가 들린 거 같았다.
누군가 잠결에 내는 소리였다면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비명 소리 같았는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선 시현은 문고리를 잡았다.
옥상으로 연결되는 문은 잠겨 있었지만 지금의 시현이라면 어렵지 않게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옥상과 면학실은 출입 금지 구역이다.
“으음…… 어쩐다.”
“뭘 어쩐단 겁니까?”
배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개인가 계단 밑에서 커피를 손에 든 남자가 시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며, M자로 심하게 벗겨진 앞머리와 앙상하게 마른 몸, 알이 두꺼운 안경 등이 먼저 눈에 띈다.
목소리는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메마르다.
“누구십니까?”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 옥상은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만.”
“사람 소리가 들린 거 같아서요. 확인만 해보려 했습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힐끗 옥상 문을 응시하는 남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사람 소리요? 잘못 들으셨겠죠.”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 면학실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았다.
시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학교에는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 두 군데 존재한다.
옥상과 면학실.
그곳에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한 인물은 한 사람뿐이다.
등장인물인 이은철을 학교의 리더 자리에 앉혀 놓은 참가자 왕근식.
‘말인즉, 이 남자가 왕근식이라는 거지?’
듣기로는 옥상과 면학실에서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도대체 학교의 리더라는 유리한 자리를 내버리면서까지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 것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윤시현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오래되어 잘 돌아가지 않는 자물쇠를 억지로 비틀어 열며 입을 열었다.
“왕근식입니다. 혹시 몰라 말해 두는데. 옥상에는 절대 들어가지 마십시오. 연구 자료가 상할 수도 있으니까.”
“무슨 연구를 하고 계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솔직히 답을 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잠깐 보고 가실래요?”
그냥 으레 던진 말이었건만, 뜻밖에도 왕근식은 시현을 면담실로 초대했다.
면학실 내부에는 원래의 목적을 알 수 없을 만큼 심하게 개조되어 있었다.
시현으로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즐비했다.
제법 넓은 규모를 자랑하는 면학실이지만 하얀 커튼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커튼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비밀의 공간 같았다.
“위험한 물건도 있으니 함부로 만지지 말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보다 제가 뭘 연구하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왕근식이 살짝 웃더니 면담실을 반으로 나누는 하얀 커튼을 걷었다.
굉장한 비밀이라도 숨어 있을 줄 알았던 비밀의 공간에는 몇 개인가 침대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침대 위에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아니, 묶여 있었다.
“…….”
미간을 찌푸린 시현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핏빛 칼날의 손잡이에 감아 놓은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현의 경계 태세를 제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왕근식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주사기를 가져가 침대에 묶여 있는 사람의 팔에서 피를 뽑아냈다.
[캬아아아아!]
묶여 있던 사람이 난동을 부렸다.
그제야 시현은 깨달았다. 묶여 있는 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수인이다.
“이게 대체 무슨…….”
“멍청하다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하고 있는 연구는 하수인을 사람으로 되돌리는 연구입니다. 경멸하실지 모르지만 그를 위해 하수인을 상대로 실험을 하고 있죠.”
그는 자신의 이상을 말했다.
하수인이 되어 버린 인간을 구하기 위해 하수인을 이용한 생체 실험.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현재로서는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 * *
“너 미쳤어?”
최지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황한 나머지 팔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괜찮다니까. 자, 나 가만히 있을 테니 방아쇠 당겨!”
눈앞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중 하나인 인체 비례도처럼 두 팔과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선 이재현이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라 닦달하고 있었으니까.
두 손에 들고 있는 K2 소총에는 탄창이 장착되어 있었다.
장전되어 있는 탄환은 당연하지만 실탄이다.
“미쳤어. 이재현,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너 그게 여자 친구한테 할 소리야?”
“나 진짜 괜찮다니까? 굉장한 걸 보여 주고 싶어서 그래.”
“싫어. 난 못 해.”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침부터 신이 나서 한다는 소리가 저따위 정신 나간 소리라니,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끔찍한 악몽 말이다.
“어휴, 저 병신. 앞뒤 다 떼어 먹고 그따위로 말하면. 어? 지희가 아이고 그러십니까? 하고 쏘겠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신호석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그거 잠깐 줘 봐.”
“어?”
그렇게 반강제로 최지희에게서 소총을 넘겨받은 신호석이 이재현을 조준했다.
“자, 잠깐……!”
최지희가 말릴 틈도 없었다.
신호석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이재현은 피하지 않았다.
총알은 정확하게 이재현의 미간에 꽂혔다.
“아악!”
비명을 지른 최지희가 제 눈을 가렸다.
눈물이 찔끔 흘렀다.
“아하하하!”
눈앞이 새까만 와중에 이재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분명 머리가 뚫렸는데 어떻게 사람이 웃을 수 있단 말인가.
당황한 최지희가 손 틈 사이로 슬쩍 이재현을 흘겼다.
유쾌하게 웃고 있는 이재현은 멀쩡해 보였다.
미간에서 자그마한 무지개색의 파편이 떨어져 나왔다.
“봤지? 나 이제 2레벨 구원자야. 그러니까 어디 가서 총 맞아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이 하고 싶었어.”
“이, 이, 이…….”
“이?”
“이 나쁜 놈아!”
냅다 달려든 최지희의 주먹이 이재현의 명치에 꽂혔다.
외피 덕에 고통은 없었지만 화들짝 놀라 넘어진 이재현의 머리에 다시 한번 최지희의 주먹이 꽂혔다.
“야, 넌 하나밖에 없는 남자 친구를 뭐 이리 사정없이 패냐?”
“맞을 만한 짓을 하니까 패지.”
“아니, 나는 그냥 여러 번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 확실하게 증명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맞을 만했지.”
옆에서 신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기등등한 최지희의 시선이 신호석에게 꽂혔다.
가만 생각해 보면 판을 깐 건 이재현이지만 실행한 건 신호석이다.
증오로 가득한 시선을 피해 눈깔을 굴리던 신호석은 운동장 한쪽의 벤치에 앉아 있는 권수학을 발견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이가 갈렸다.
‘비겁한 새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미끼로 쓴단 말인가.
일이 좋게 풀려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최지희와 눈을 마주치며 웃는 친구를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염치도 없는 새끼.’
자신이었다면 부끄러워서라도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인간은 부끄러움이란 걸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권수학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재현, 최지희에게 향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눈동자는 항상 최지희를 쫓고 있었다.
‘더러운 새끼.’
시선을 느낀 권수학이 신호석에게 시선을 줬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