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너희도 기름 구하러 온 거야?”
자신의 차량에 기름통을 옮기던 남자가 시현 일행을 발견하고 웃는다.
흰 셔츠에 정장바지를 말끔하게 차려 입었으며, 호감형 얼굴에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추정됐다.
“네. 이 애들을 본거지까지 데려다줘야 하는데 차에 경유가 다 떨어져서요.”
“너 좋은 사람이구나. 이야~. 세상이 이렇게 변한 이후 다들 제 살길만 찾느라 급급하던데.”
활짝 웃은 남자는 들고 있던 기름통 하나를 시현에게 건넸다.
“일단 여기 하나. 모자라면 하나 더 가져가도 돼. 저쪽에 보면 내가 뽑아 놓은 휘발유랑 경유가 잔뜩 있으니까.”
실제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기름통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주유소에 있는 걸 전부 뽑아내기라도 한 건지 그 양이 범상치가 않다.
“저희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뭐 어때. 원래 내 것도 아닌 데다 내 차로 전부 싣고 갈 수 있는 양도 아니고. 얼마든지 가져가.”
“감사합니다.”
남자의 도움이 있었기에 시현은 어렵지 않게 경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손은 남겨 놔야 하므로 시현과 이나연이 한 통씩, 남학생들은 두 통을 손에 들었다.
그 대가로 시현은 남자가 기름통을 차에 싣는 것을 도왔다.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일찌감치 일을 끝낼 수 있었어.”
모든 휘발유를 차에 싣는데 성공한 남자가 땀을 닦으며 시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최지호라고 해.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둘 다 무사히 살아있어야 하겠지만.”
“윤시현입니다.”
기분 좋게 인사를 마친 남자가 옆에 세워 두었던 트럭의 운전석에 탑승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현은 남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최지호. 최지호. 왠지 익숙한 이름인데…….’
기억에 남아 있는 이름이다.
단순히 기분 탓으로 돌리기에는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형님! 빨리 돌아가죠.”
“이러다 팔 빠지겠어요! 이거 더럽게 무겁네.”
벌써부터 진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두 남학생의 보챔에도 시현의 다리는 못 박힌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 생각났다.”
가까스로 최지호라는 이름을 떠올린 시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화제.
그 끔찍한 단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최지호.
얼핏 보면 사람 좋아 보이는 순박한 인상의 남성이지만 작 중에서 그는 대규모 방화를 일으켰다.
화제로 인해 목숨을 잃은 생존자의 수만 해도 수백에 이르렀다.
떨리는 시현의 눈동자에 이제 막 시동을 거는데 성공한 트럭이 보인다.
‘지금이라면 막을 수 있어.’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서울시를 불바다로 만든 그 최악의 사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저 트럭만 잡는다면.
운전석의 최지호만 끌어내릴 수 있다면.
원작의 대화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아무리 구원자라 해도 달리는 차량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그 전에 잡아야 한다.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잠깐 기다…….”
타앙!
첫발을 내딛는 순간, 무언가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주유소 벽에 틀어박힌 그것의 정체는 총알이었다.
“움직이지 마! 너희는 포위됐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걸까.
군복을 입은 약탈자들이 주유소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수가 족히 열은 되어 보인다.
“미친! 저것들은 뭐야!”
최지호는 액셀을 밟아 부리나케 달아났다.
순식간에 트럭이 멀어져갔다.
한 순간 폭풍을 사용할까도 했으나, 그랬다가는 모든 정신력이 고갈되고 만다.
시현을 총탄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외피 역시 정신력으로 유지됨을 감안하면 폭풍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결국 시현이 할 수 있는 건 뜬 눈으로 멀어져 가는 트럭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대장! 트럭이 도망갑니다!”
“놔둬.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강소하. 두 번째가 윤시현이다. 그 외에는 아무래도 좋아.”
2층짜리 건물의 옥상 위에 선 남자가 차가운 눈으로 시현을 내려다 봤다.
“강소하가 보이지 않는군. 강소하는 어디에 있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트럭을 떠올리며 시현은 이를 갈았다.
어쩌면 대화제를 미연에 막을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자연히 그 분노는 약탈자들에게 향했다.
“그런 것보다 네 목숨이나 걱정해.”
“……주제를 모르는 놈이군. 쏴라!”
그들은 시현을 향해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으아아아악!”
“수, 숨어!”
외피에 보호를 받지 못하는 나머지 일행은 기겁하며 주유소 안으로 대피했다.
반면 시현은 오롯이 선 채 총알들을 몸으로 받아 냈다.
팅팅!
수많은 총알이 외피에 막혀 바닥에 떨어진다.
“대, 대장. 총이 안 통하는데요?”
“괜찮아. 계속 쏴! 리더가 한 말 기억 안 나? 아무리 외피라도 열 명 정도가 집중 사격하면 깰 수 있다고 했잖아!”
지휘관 격으로 보이는 남자의 외침에 병사들은 의기양양해져서 연달아 방아쇠를 당겨 댔다.
확실히 2레벨 구원자의 외피는 열 명 정도가 집중적으로 사격하면 금방 깨뜨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시현이 단순한 2레벨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저기……. 대장, 열 명이 집중 사격하면 깰 수 있는 거 맞죠?”
“부, 분명 그랬는데…….”
의기양양하던 약탈자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아무리 총을 쏴도 외피가 깨질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탄창을 벌써 두 번은 갈아 끼웠는데도 말이다.
시현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총탄들을 귀찮은 소나기 정도로 취급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병사들이 보기에 그 모습은 사신, 혹은 악귀와도 같았다.
“으, 으아아아!”
결국 가장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와 동시에 시현은 달렸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구들을 죄다 지나쳐 달아나는 병사의 목 뒤에 칼을 꽂아 넣었다.
“하나.”
“커헉! 컥!”
병사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피를 잔뜩 머금은 단검을 회수한 시현은 살벌한 눈으로 약탈자들을 훑었다.
그리고 읊조렸다.
“딱 하나만 살려 준다.”
* * *
‘참가자가 개입하며 원작의 대부분이 뒤틀려 버렸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존재해.’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개입하고, 그게 아니라면 방치한다.
대화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문자 그대로 서울 일대를 불바다로 만드는 에피소드지만 거기에 개입한다 해서 참가자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없다.
막으려면 막을 수 있지만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참가자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도 다른 참가자들보다 앞서야 한다.
대화제를 막기 위해 행동하면 그만큼 경쟁자들에게 뒤처지게 된다.
그렇기에 참가자는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며, 원작과 변화 없이 대화제는 발생할 것이다.
최지호에 의해.
“무슨 고민을 그렇게 깊게 해요?”
걱정이 담긴 이나연의 음성이 상념을 깨운다.
“아, 혹시 아까 그 소위가 한 말이 신경 쓰여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자연히 주유소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현은 대화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기회를 놓치게 만든 약탈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겁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가 죽어 갔다.
딱 한 사람.
그들을 지휘하던 대장만은 살려 보냈다.
현재 시현의 곁에 강소하가 없음을 약탈자들의 리더인 임진아에게 알려 조금이라도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다.
학교에서 해결해야 할 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장이라는 놈은 은혜도 모르는지 표독스러운 눈으로 시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왜 나를 살려 보내는지 모르겠지만, 리더가 직접 움직이신 이상 네가 오래 살아남지는 못할 거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저주의 말이지만 시현의 마음에는 요만큼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형님, 도착했어요.”
운전석에서 들려오는 김선빈의 목소리에 시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줬다.
김선빈의 말대로 정면에 학교의 모습이 보였다.
개조된 차량을 알아본 건지 몇 명의 학생들이 나와 정문의 바리케이드를 치웠다.
정문으로 진입한 차량은 운석이라도 맞은 듯 구멍이 뻥 뚫린 운동장 옆 주차장에 재주 좋게 주차시켰다.
“여기가 공부 잘하는 사람들만 모인다는 특목고군요. 그것도 외국어……. 공부를 잘해 본 적이 없는 저와는 인연이 없는 곳이네요.”
먼저 차에서 내린 이나연이 감상을 읊었다.
뒤따라 내린 시현도 두 번째 대형 에피소드의 무대가 되었던 학교의 풍경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남쪽에 주차장이 있고, 북쪽에 농구장이 있으며 동쪽으로 기역자 모양의 본교사가 자리하고 있다.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대부분 대파된 것에 반해 본 교사는 멀쩡했다.
“형, 엄마가 조금 피곤하신 거 같은데 먼저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선생님한테 보고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제 어머니를 등에 업은 신호석이 말했다.
그의 말따나마 요 며칠 동안 겪은 일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꽤 부담이 되었는지 그의 어머니는 조금 전부터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이 세상에서는 감기조차 우습게 볼 수 없다.
때문인지 신호석의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그래, 수고 많았어.”
“고생은 형이 가장 많이 하셨죠. 형 덕분에 저희가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허리를 직각으로 접어 감사를 표한 신호석이 본관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지만, 학교에 머무시는 동안 제가 최선을 다해 모실게요.”
이미 사전에 합의가 끝난 건지 김선빈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안내했다.
두 사람을 동반한 김선빈이 향한 곳은 학교의 5층에 있는 대강당이었다.
거기에는 이불 한 장에 의지한 생존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 체온을 나누며 추위를 버티고 있었다. 수용한 인원수가 많아 물자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여기가 대강당이에요. 외부에서 흘러 들어오는 생존자들을 위해 제공되는 공간이죠. 만약 여러 사람이랑 부대끼는 게 불편하시다면 제가 부탁드려서 공간을 따로 만들어 볼게요.”
“됐어. 그것보다 그 선생님인가 하는 분을 만나고 싶은데.”
시현의 목적은 어딘가에 있을 민서라와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신호석, 김선빈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에 못지않을 만큼 선생님이란 참가자에게 흥미가 생겼다.
게다가 민서라의 존재는 사전에 두 사람에게 물어 확인을 마쳤다.
성향이 선으로 치우쳐져 있는 민서라와 대립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역시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까 호석이가 선생님께 보고 드린다고 했으니까 아마 조만간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이러면서 나타나실 거예요.”
김선빈이 누군가를 익살스럽게 흉내 내며 말했다.
조급할 이유가 없었기에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다른 곳을 좀 돌아봐도 돼?”
“물론이죠! 저희 학교는 들어오는 것, 나가는 것, 돌아다니는 것. 모든 게 자유로우니까요.”
김선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와 달리 학교는 폐쇄적인 세력이 아니다.
참가자의 개입이 있었지만 거기까지 건드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 하지만 옥상하고 면학실은 접근 금지예요.”
“옥상?”
시선이 자연히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향했다.
계단에는 출입 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누군가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표지판 외에도 옥상은 열쇠로 잠겨 있었다.
“선생님의 친구 분이 사용 중이신 공간인데, 중요한 연구를 하고 계시대요. 다른 사람이 방해하는 거 엄청 싫어하셔요.”
“친구? 무슨 연구를 하는데?”
“무슨 연구를 하는지는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참가자의 친구라면 필히 참가자일 터, 생각보다 학교에 속한 참가자의 수가 많았다.
저렇게 철통같이 보안을 유지하려는 이유가 뭔지 호기심이 생겼다.
어찌 보면 오지랖이라 할 수 있겠으나 상대가 참가자일 가능성이 높은 이상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일단 알겠어. 그러면 거기 두 군데 빼고 다른 곳 안내 부탁해.”
“그러면 지금부터 학교 투어를 개시하겠습니다!”
힘차게 외친 김선빈은 시현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외부인들에게 대강당을 내준 학생들은 대체로 본인의 교실이나 2층의 강의실을 숙소로 쓰고 있었다.
그 외의 공간은 대개 창고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창고는 비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물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계획 없이 무턱대고 외부의 생존자를 받아들인 결과이기도 하다.
애초에 학교라는 자체가 생존을 위한 물자가 구비되어 있는 장소가 아니다.
하나 특이한 점은 학교 내부에 전기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토큰을 사용해 발전기를 먼저 구매한 건가…….”
토큰은 꼭 장비를 구매할 때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세력을 위한 물자를 구매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기 강화도 벅찰 마당에 생존자들을 위해 토큰을 사용하다니……. 호구가 여기 있었네.”
말은 그렇게 해도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만나 보지도 못한 학교의 리더를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등장인물을 소품 취급하던 정수혁과는 다르다.
만약 부족한 물자까지 풍족해진다면 학교는 이 지옥과도 같은 세상의 오아시스가 되어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여기 1층으로 내려가시면……. 어라?”
1층으로 시현을 안내하던 박세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곳에서 상당한 수준의 소란이 감지된 까닭이다.
무슨 일일까 싶어 1층의 정문으로 향한 시현은 그리운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녀왔어.”
자신을 둘러싼 학생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며 미모의 여성이 웃고 있었다.
시현은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오랜만에 만나는 데도 어제 헤어진 것처럼 기억이 선명하다.
민서라다.
그녀가 학생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사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둘러싸고 있는 학생들도, 그들을 대하는 민서라도 굉장히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그런 민서라의 뒤에는 쭈뼛거리는 어린 남자아이 둘과 몰골이 말이 아닌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민서라는 그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 중계동 초등학교에서 데리고 온 생존자들이야. 이쪽은 애들의 담임선생님.”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딱히 지시를 내리거나 하지 않아도 학생 중 누군가가 솔선수범해서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
“그리고 조금 먼 곳에 있는 편의점에서 구한 식량. 나중에 팀을 꾸려서 한 번 더 가도록 하자. 운이 좋으면 더 많은 물자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와아아!”
학생들의 환호가 학교를 가득 채웠다.
지금의 그녀에게서 참가자로 우승을 거머쥐어야겠다는 의지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생활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여간 특이한 사람이다.
“어?”
그제야 시현을 발견한 민서라가 눈을 크게 떴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