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구울의 팔>
상당한 강도를 가지고 있다.
금속을 제련할 때 섞을 경우 강도가 상승하며 ‘방탄’ 성능이 추가된다.
“…….”
RPG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드롭 아이템이건만, 청색으로 표시된 그것의 설명을 응시하는 시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아직 쓸 수 있는 제단도 없어서 있어 봤자 무용지물인데. 그렇다고 방치해 두면 약탈자들 손에 들어갈 거 아니야.”
드롭 아이템이 약탈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기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시현은 구울의 팔을 회수해 가방에 대충 쑤셔 넣었다.
“으아악!”
신호석의 비명이 들려왔다.
구울의 팔을 회수하는 그 짧은 사이 좀비들이 신호석에게 달라붙은 것이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신호석이었으나 결국 한계에 봉착했다.
상처를 입은 신호석이 비틀거리는 사이, 좀비 하나가 뒤에 있던 김다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당황한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나연의 옆에 붙어 있으라는 시현의 경고를 무시한 채 시현을 향해 달려왔다.
신호석보다 강한 시현에게 의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도중에 하반신이 없는 좀비에게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진 김다혜는 사색이 되었다.
그녀의 발목을 잡은 좀비가 당장이라도 그녀를 물어뜯으려 엉금엉금 기어왔다.
발목을 잡은 손에 발길질을 해도 좀비는 떨어지지 않았다.
“도, 도와주세요!”
눈물을 머금은 눈이 시현에게 향했다.
그러나 시현의 눈은 김다혜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어?”
멍한 표정의 김다현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시현의 뒤를 따라갔다.
약 50여 미터 되는 거리를 빠르게 돌파한 시현은 뒤에서 이나연을 덮치려는 좀비의 심장을 꿰뚫었다.
“괜찮아?”
“보시다시피 완전 멀쩡해요.”
자신이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지, 이나연의 얼굴에는 근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현은 인근에 있는 좀비들을 죄다 처단하고 위기에 처한 신호석까지 구하는데 성공했다.
구울과 비교하니 좀비를 사냥하는 건 어린애 팔 비트는 수준으로 쉽게 느껴졌다.
“허억……. 시, 시현이 형. 감사, 합니다.”
땀에 흠뻑 젖어 거친 숨을 토하면서도 신호석은 감사를 잊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두 사람을 구하고 나서야 시현은 김다혜에게 시선을 줬다.
절망하며 주저앉아 있는 그녀의 다리에 물어뜯은 상처가 생겨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늦었다.
“말이라도 잘 들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시현에게 있어 김다혜의 순위는 최하위다.
동시다발적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다면, 그녀에게 뻗어지는 도움의 손길은 가장 나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그녀의 다리에 난 상처다.
그녀는 시현을 향해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좀비들이 내는 소리가 시끄러워 뭐라 하는지 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입 모양을 통해 얼추 알 수 있었다.
‘살인자라……. 틀린 말은 아니지.’
이내 몰려든 좀비들이 김다혜를 덮쳤다.
그녀의 최후를 지켜본 시현은 등을 돌렸다.
“가자. 거의 다 왔어.”
시현의 지시에 일행은 머지않은 곳에 있는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좀비들이 몰려들고 있었으나 그보다 일행이 울타리에 접촉하는 게 더 빨랐다.
먼저 울타리를 구성하는 버스 위에 올라간 시현이 다른 인원을 하나씩 끌어 올려 주었다.
[으어어어!]
마지막까지 주위를 경계하던 신호석을 끌어 올렸을 때, 일행을 따라잡는데 성공한 좀비 무리가 열심히 버스를 두드렸다.
“됐다! 엄마, 우리 이제 살았어!”
“우리 아들, 고생 많았어.”
두 모자는 서로를 얼싸안은 채 방방 뛰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 두 사람을 응시하는 이나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생존에 대한 기쁨은 잠깐이었다.
김다혜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일행의 얼굴에 비참함이 맴돌았다.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똑바로 했으면…….”
특히 방어가 뚫린 신호석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원작에서는 김다혜를 못 죽여 안달이던 신호석이 그녀의 최후를 슬퍼하다니.
성공적으로 임태연의 의뢰를 달성한 셈이지만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다혜의 시신은 수습해 주고 싶은데.”
“저 기세면 뼈도 안 남았을 거야. 그리고…….”
시현은 처형장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줬다.
곧게 뻗은 망가진 도로의 좌우로 부서진 건물이 보였다.
누군가가 숨어 있기 딱 좋은 장소다.
“아직 우리도 안전한 거 아니야.”
“약탈자들!”
그제야 자신들을 위협하는 게 악마만이 아니란 걸 떠올린 신호석이 소리를 높였다.
시현은 달아나기 전에 주변을 살폈다.
‘왜 안 보이지?’
없다.
한시가 바쁜 상황인데 어디에도 임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예정에 없던 사고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배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시현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불안한 얼굴의 신호석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형?”
“망할.”
흑도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내뱉은 한마디와 동시에 그들이 나타났다. 약탈자들이.
“친구들, 만나서 반가워.”
* * *
“지루해……. 이놈의 세상. 차라리 망할 거면 확실히 망해 버리지. 이렇게 애매하게 망할 게 뭐람.”
컨테이너 박스 위에 드러누운 남자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살짝 흘린 눈물방울에 햇빛이 비쳤다.
“으아……. 영화 보고 싶다. 드라마 보고 싶다. 게임 하고 싶다. 소설 읽고 싶다.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싶다! 피자, 햄버거, 콜라…….”
남자의 입에서 욕망이 흘러나왔다.
하나같이 멸망한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아이처럼 발버둥 치다 지친 남자는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진즉 배터리를 다 쓴 스마트폰은 그저 고철덩어리일 뿐이지만, 이 안에 담겨 있는 멸망하기 전 세상의 흔적들을 떠올리면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언젠가 전기를 공급해 주겠다는 리더의 말에 희망을 품은 채, 남자는 오늘도 하루를 죽지 못해 연명하고 있었다.
탁. 탁.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숨을 헐떡이고 있는, 군복 입은 젊은 남자가 보였다.
계급장은 직선 하나, 파릇파릇한 이등병이다.
“대장! 보고드릴 게 있는데 제가 감히 대장의 휴식을 방해해도 되겠습니까?”
“안 돼.”
“히잉…….”
울상이 된 채 빡빡 깎은 머리를 긁어 대는 이등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농담이야. 말해 봐.”
“아, 넷! 어제 처형장에 진입했던 남녀가 처형장 안에 있던 배신자들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하려 합니다.”
“으음……. 될 거 같아?”
“네. 두 사람 모두 구원자로 추정되며, 특히 여성이 굉장히 강한 권능을 가지고 있어서…….”
“얼마나 강한데?”
“직선상의 좀비들을 싹 다 털어 버렸습니다.”
“오오.”
남자는 상체를 들어 올렸다. 조금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 상체를 일으킬 정도다.
“있잖아. 우리 역할은 처형장을 감시하다가 울타리 근처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거지?”
“맞습니다.”
“그런데 이번 배신자들은 어떻게 연락한 건지 모르겠지만 외부의 도움을 빌렸고, 그 외부 세력이 꽤나 강하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런 놈들이랑 싸우면 엄청 귀찮겠지?”
“귀찮다기보다는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지 말자.”
“……네?”
이등병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형장을 감시하고 배신자를 처형하는 것은 약탈자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일이며,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 게으름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형태로 빚어 낸 듯한 남자는 리더의 지시 따위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어려운 싸움이면 무지하게 귀찮다는 소리인데. 그냥 보내 주자. 그게 좋을 거 같아.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하러 오는 용기가 가상하잖아.”
“하지만 리더가…….”
“괜찮아, 괜찮아. 뭐라 그러면 내가 그랬다고 해. 리더도 별말 안 할 거야.”
“……알겠습니다.”
불만이지만 어쩌겠는가.
눈앞의 남자는 이등병의 직속상관이고, 먼 곳에 있는 리더보다 가까이에 있는 직속상관의 명령이 더 무게가 있는 법이다.
잠시 일으켰던 상체를 도로 눕힌 남자는 다시 게으름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 따분하다.”
그렇게 따분하면 해야 할 일을 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불만을 억지로 되삼킨 이등병이 감시를 위해 이 장소를 떠나려던 찰나였다.
“대장!”
새로운 누군가가 등장했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두툼한 체형의 남자.
이등병의 선임인 일등병이다.
그는 온몸에서 육즙을 흘리며 남자의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떴습니다.”
“뭐가? 설마 리더가 여기까지 단속이라도 나온 거야?”
“그게 아니라, 드롭 아이템입니다!”
“엥?”
“리더가 예의 주시하라고 말씀하신 처형장 안의 구울, 그놈을 침입자 놈이 쓰러뜨렸는데 드롭 아이템이 떴다고요! 대장이 게으름 부리는 동안에요!”
“아……. 젠장. 하필이면 그게?”
남자는 손으로 눈을 덮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더욱 전력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보고는 아무리 남자라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악마의 사체 따위에 전혀 관심 없지만. 그 인간이 다른 건 몰라도 드롭 아이템만큼은 반드시 회수하라 했으니…….”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소총을 들고 어깨에 걸쳤다.
“귀찮지만 가서 누가 가져가는지 얼굴 정도는 봐야겠지?”
“아니요. 회수까지 하셔야 하는 데요. 안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리더가 폭발할지도.”
“무슨 소리야.”
남자는 웃었다.
“임진아, 그 인간은 날 어떻게 못 해. 진철중을 몰아내는데 내 도움이 크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그 인간보다 강한데 뭘 어떻게 하겠어.”
* * *
임태연이 아니다.
듣기만 해도 힘이 빠지고 늘어지는 인사와 함께 등장한 인물은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남자치고는 굉장히 긴 머리카락은 어설프게 묶어 놨으며, 운동과는 사이가 안 좋은지 깡말랐다.
총구를 잡은 채 소총을 질질 끌고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하품을 해 대는 남자가,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뭐지? 분명 처음 보는 건데, 왠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영문 모를 감각이었다.
“너 이 새끼!”
남자가 입고 있는 군복에 박힌, 약탈자들을 상징하는 표식을 확인한 신호석이 눈을 뒤집으며 급발진했다.
신호석의 기분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를 처형장에 가둔 게 약탈자들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분노를 쏟아 내도 좋을 때가 아니다.
시현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자세를 낮추는 신호석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진정해.”
“하지만 형! 약탈자 놈들이 엄마를…….”
“위를 봐.”
“위?”
그제야 앞만 보던 신호석이 시야를 넓혔다.
도로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 몇 명인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소총으로 무장한 자들은 총구를 시현 일행에게 겨누고 있었다.
약탈자들이다.
그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기면 시현을 제외한 전부가 벌집이 되고 말 것이다.
“너무 열 내지 마. 나도 구원자랑 싸우는 거 싫어해. 땀도 나고, 귀찮잖아.”
서 있는 것조차 귀찮았는지 남자는 적당한 곳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우리 적당히 타협하자. 내가 너희를 여기서 무사히 내보내 줄 테니까. 그거 주라.”
남자의 손끝이 시현에게 향했다.
“네가 메고 있는 가방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그거.”
그제야 남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남자의 눈은 시종일관 가방에 담겨 있는 구울의 팔에 꽂혀 있었다.
“이거?”
“응, 그거. 얌전히 넘겨줄래? 우리 리더가 그런 거 엄청 좋아하거든.”
시현은 웃고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저 실실 웃고 있는 남자의 존재다.
원작에서 제 어머니와 김다혜를 위해 좀비들을 유인했던 신호석은 뒤늦게 울타리를 넘던 도중 약탈자들과 조우했다.
권능을 사용해 간신히 그들을 따돌리는데 성공하지만, 저렇게 강렬한 특징을 가진 남자와 마주쳤다는 묘사는 없었다.
원작이 뒤틀렸다.
때문에 시현은 남자가 참가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생각이 바뀌었다.
외형, 말투, 행동거지 등 이 모든 것을 따져 보았을 때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소하.”
“엥?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역시…….”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딱 그 꼴이다.
어째서 약속 장소에 임태연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타나지 않은 게 아니다. 예정에 없던 강소하의 존재 때문에 나타나지 못한 것이다.
시현은 입술을 씹었다.
강소하.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비단 시현뿐 아니라 원작을 읽은 참가자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꿰고 있을 것이다.
구원자가 단신으로 대형을 상대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갖게 되면, 해당 구원자는 이름 앞에 별명이 하나 붙게 된다.
검제, 현자, 예언가 등등.
그런 낯부끄러운 칭호 말이다.
심지어 시스템이 지정해 주는 칭호이기에 거부권도 없다.
하지만 수많은 구원자 중에서도 군주의 칭호를 갖는 이는 많지 않다. 고작해야 여덟 명.
수많은 구원자 중 무력 면에서 상위 여덟 사람만이 군주의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시현의 눈앞에 있는 강소하가 그 중 하나다.
나태의 군주.
이게 강소하라는 인물에게 거론되는 호칭이다.
물론 지금이 아니라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 강소하를 약탈자들이 가져갔단 말이지. 원작에 없는 전개야. 그렇다면 약탈자들의 리더도 바뀌었다 보는 게 타당하겠지. 진철중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초반에만 반짝 악명을 떨치다가 구원자들이 외피를 갖추게 되면 조금씩 약해지면서 결국 완전히 도태되고 마는 세력, 그게 바로 약탈자들이다.
하지만 지금의 약탈자들은 원작을 알고 있는 참가자, 그리고 군주 중 하나인 강소하까지 소유하고 있다.
위험도가 단숨에 껑충 뛰었다.
—뭐여. 저놈 새끼가 왜 저기 있어?
—원작과 전개가 이런 식으로 뒤틀리니 신선하네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고 싶은데, 누구 소설을 보면 되나요? 추천 좀!
—음……. 누구 소설인지는 아는데 너무 좀 그래서 추천하기가 영 껄끄럽단 말이지.
난리가 난 댓글들이 멋대로 튀어나오며 생각을 방해했다.
혼란 속에서도 시현은 집중과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
‘그 강소하라면 거절하는 순간 주저하지 말고 방아쇠를 당기라고 명령할 거야. 협상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놈이니까. 하지만 구울의 팔을 약탈자들에게 넘겨주면 안 돼. 다른 수를 찾아야 해.’
어디 빈틈이 없을까 싶어 눈을 굴리던 시현은 저 멀리, 강소하의 한참 뒤편 바위 쪽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임태연을 보았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