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입을 꾹 다문 김다혜가 사나운 눈으로 시현을 노려봤고, 박선희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게 뻔히 보였다.
반면, 김다혜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으로 평소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난 또 뭐 대단한 거 묻는다고……. 원래 여기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은 열한 명이었어.”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충 감이 잡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초기.
김선희와 마찬가지로 멋모르고 약탈자들에게 보호를 요청한 생존자들은 수두룩할 것이다.
인원이 늘면 물자의 소모도 늘어나지만, 반대로 전력과 노동력 또한 증가한다.
때문에 약탈자들은 가리지 않고 생존자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생존자들 중 약탈자들의 악행을 받아들이지 못해 반기를 들거나, 반대로 약탈자들이 쓸모없다고 판단한 생존자들도 적지 않았다.
약탈자들은 세력의 견고함을 만들기 위해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 처형장을 만들었다.
그런 처형장에 수용된 인원이 고작 여성 두 명뿐일 리가 없다.
“좀비들은 매일 밤 습격해 왔고, 그럴 때마다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어. 우리도 나름 필사적으로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가만 둘러보면 처형장 안에는 저항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말라붙은 핏자국.
창문이나 틈새를 막고 있는 허술한 판자들.
망가진 가구.
버려진 남성용 의복.
그리고 어설픈 솜씨로 만든 무기들까지.
관심이 없어서 발견하지 못했을 뿐, 다른 생존자가 있었다는 증거는 곳곳에 남아 있었다.
“나랑 아줌마가 여자라서 다른 사람들이 신경을 써 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거야. 그 사람들이 없었으면 나는 죽었을 거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거짓을 포장하고 있는 건지.
김다혜라는 인물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니면 뭐 탈출에 도움이 될 만한 건장하고 힘 좋은 남자가 아닌 우리가 남아서 못마땅하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어째서 네가 나한테 시종일관 적개심을 보이는지는 모르겠는데. 잠시 진중한 대화 좀 할까?”
시현이 주먹을 말아 쥐며 웃자 흠칫한 김다혜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제야 눈앞의 시현이 좀비보다 강한 힘을 가진 구원자임을 떠올린 것이다.
겨우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을 확인한 시현은 언짢은 한숨을 토했다.
“네가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발판으로 살아남았다 해서 비판할 생각은 없어.”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죽은 사람들의 시체, 어디에 있어?”
그게 가장 궁금했다.
응당 있어야 할 시체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 자신보다 약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사람들의 시체 말이다.
“아, 그거라면…….”
“그거?”
시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좀비들한테 던져 줬어……요.”
“……왜?”
“배가 부르면 조금이라도 공격성이 낮아지지 않을까 했어요. 방에 놔두면 꺼림칙하기도 하고. 게다가 그냥 두면 좀비로 변할 수도 있잖아요.”
“이미 죽은 사람은 관계없어. 하수인으로 변하는 것도 숨이 붙어 있어야 가능한 거야.”
사실 이걸 가지고 크게 뭐라 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앞으로 그러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다혜의 사고방식은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죽었으면 그냥 시체일 뿐이잖아. 문제 있어요?”
그녀는 시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꾸했다. 그 눈에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 상대적으로 약자인 김다혜와 김선희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자들이다.
그런데도 저런 취급이라니.
속이 울렁거렸다.
시현은 김선희에게 시선을 줬다.
그런데 그녀는 김다혜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수치와 죄책감을 아는 건지 고개를 숙인 그녀의 두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김다혜 덕분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전혀 문제없어.”
그녀를 응시하는 시현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 *
“오빠! 11시예요.”
약속 시간이 되자 이나연이 시현을 흔들어 깨웠다.
죽을 만큼 피곤했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지 바로 눈이 떠졌다.
“딱 5분만 더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 된다고 한 사람은 오빠였는데요?”
“알아. 그냥 해 본 소리야. 읏차!”
몸을 일으킨 시현은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을 풀어 줬다.
어제 상당히 혹사시킨 까닭인지, 휴식이 충분하지 않은 게 원인인지, 물 먹은 솜이불처럼 팔다리가 무겁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원작에 전혀 묘사되지 않은 길을 걷느니 조금 피로하더라도 지금 움직이는 게 낫다.
다른 사람들도 일찌감치 일어나 출발 준비를 끝마쳐 둔 상태다.
마찬가지로 모든 준비를 마친 시현은 창가에 섰다.
어두운 밤, 전등 아래 모인 나방들처럼 바글거리는 좀비들이 보였다.
“시작하겠습니다.”
시현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확연히 무거워졌다.
아무리 이나연이 길을 만들고 시현이 앞장선다지만 저 많은 좀비 무리를 뚫고 지나가는 일 아닌가.
다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갑니다!”
무거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외침과 함께 이나연이 창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멋들어지게 착지에 성공한 이나연을 향해 좀비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으어어어!]
[어어어…….]
어젯밤 처형장의 문을 두드리던 놈들과 동일 개체가 맞나 싶을 만큼 둔하고 느리다.
그래도 수적으로 볼 때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긴장할 법도 하건만, 이나연은 담담하게 권능을 발현했다.
“최대한 넓고 길게……!”
그녀가 크게 팔을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부채꼴로 쏘아진 칼바람이 일대를 휩쓸었다.
굉음을 동반한 칼바람은 좀비의 살과 뼈, 피를 고루 분리해 마구잡이로 흩어 놓았다.
뻥 뚫린 길 위에 붉은 비가 쏟아졌다.
“흐에엑.”
힘이 빠진 이나연이 비틀거렸다.
어제처럼 쓰러져 골골거릴 정도는 아니지만 더 이상 전투에 참가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지금부터는 온전히 시현의 몫이다.
“살고 싶다면 저기 보이는 초록색 버스를 향해 이 악물고 달려.”
이나연을 따라 창문에서 뛰어내린 시현은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달렸다.
폭풍이 뚫어 놓은 길 위로 좀비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검은 기류를 휘감은 시현의 흑도는 일격으로 좀비들의 머리를 붕괴시켰다.
“엄마, 다혜야. 우리도 가자.”
머뭇거리는 두 여성의 등을 신호석이 떠밀었다.
약속대로 김선희가 쓰러진 이나연을 부축했다.
혼자서는 다소 힘겨워 보였기에 김다혜 역시 김선희를 거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걸음은 상당히 느렸다.
힘이 빠진 사람을 부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목적지인 울타리는 여전히 멀었고, 반대로 모여드는 좀비의 수는 빠르게 늘었다.
시현은 일행의 주변을 크게 돌며 좀비들을 상대했다.
‘어디에 있지?’
일격에 하나씩 좀비들의 목을 쳐 내면서도 시현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기껏해야 좀비다. 그러니 아무리 수가 많아 봐야 2레벨 구원자인 시현의 상대는 못 된다.
그럼에도 시현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어디에 분명 있을 터다.
원작에서 김다혜가 김선희를 죽게 만든 원인.
그녀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이레귤러. 돌연변이가.
[캬아아아아!]
“왔나.”
시현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흑도를 휘둘렀다.
까앙!
처음으로 시현의 공격이 막혔다. 그보다는 몸으로 버텨 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캬악. 캬아아아!]
필사적으로 팔을 휘두르는 악마는 주변에 널려 있는 좀비와 비슷하지만, 명백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놈은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것처럼 심각하게 말랐으며, 머리가 크고 네 갈래로 갈라진 주둥이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선이 가는 건 덩치로, 허리를 굽히고 있음에도 크기가 2미터에 육박했다.
“히익!”
시현과 대치하고 있는 구울을 발견한 김다혜가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형! 그놈은 대체…….”
“신경 쓰지 말고 달려!”
다행히도 구울은 눈앞의 시현에게 집중하느라 일행에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좀비의 변종인 구울. 설마 이런 놈이 있을 거라고는 김다혜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원작에서 김다혜가 세운 작전은 간단했다.
권능을 통해 언제든 몸을 뺄 수 있는 신호석이 좀비들을 유인하고, 그 틈을 타 방비가 허술한 장소로 도망간다는, 한 사람에게 부담을 강요한 작전.
그 작전은 성대하게 실패했다.
성공 직전이었으나 예정에 없던 구울이 나타나며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이다.
구울로부터 위협을 받은 김다혜는 무의식적으로 앞서 달리는 김선희를 잡아당겼다.
그렇게 해서 김선희는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원작과 조건이 다르다.
이나연이 길을 터 줬으며, 몰려드는 좀비를 앞장서 처리해 주는 시현이 있고, 신호석도 있다.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멀어지는 일행을 잠시 눈으로 쫓던 시현이 본격적으로 구울과 전투를 개시했다.
‘변종이라 해도 중형에 비하면 한참 약해.’
중형과 달리 다른 평범한 소형 사이에 끼어 있기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존재조차 모르고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방심하고 있던 2레벨 구원자도 기습적인 일격에 목숨을 잃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올 정도다.
그러나 그 존재를 알고 있다면 대처하지 못할 것도 없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주마. 그렇지 않아도 좀비들이 주는 경험치가 너무 짜다 느끼고 있었거든.”
[캬아아아!]
갈라진 턱을 양쪽으로 펼치며 사납게 포효한 구울이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 단검으로 손목을 내려쳤다.
까앙!
“크윽……. 더럽게 단단하네. 역시 이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만한 소재야.”
공격한 건 이쪽인데 역으로 피해를 입었다.
단검을 쥐고 있는 손이 저릿저릿한 게 꼭 강철을 때린 느낌이다.
어디까지나 소형의 변종이기에 외피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무식하게 단단하다.
축복이 담긴 무기에 이자프의 권능을 두르고 있는 데도 유효타란 느낌은 없었다.
[카아아악!]
구울이라 해도 지능 수준은 좀비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의 안위는 살피지 않고 눈앞의 먹잇감을 잡기 위해 팔을 휘두르며 이를 들이민다.
마구잡이식 공격이지만 속도와 힘이 좋다 보니 제법 위협적이었다.
시현은 구울의 팔을 쳐 내며 차분하게 기회를 노렸다.
2레벨 구원자가 되며 상승한 동체시력이 구울의 빠른 공격을 눈으로 쫓을 수 있게 해 준다.
더불어 우월한 신체 능력 또한 구울의 공격을 버텨 낼 수 있게 해 준다.
고작 수 초 남짓한 시간에 여러 차례 공방이 오갔다.
얼추 보면 호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성의 유무는 커다란 차이를 낳았다.
[카아아악!]
구울의 손톱이 시현의 소매를 찢었다.
하나 귀중한 외투에 상처가 생겼음에도 시현은 웃었다.
큰 공격 후에는 빈틈이 생겨나는 법, 구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흡!”
힘을 집중하여 내려친 흑도가 구울의 어깨를 때렸다.
그 결과 크게 비틀거리던 구울의 오른쪽 팔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탈골된 것이다.
칼날마저 막아 낼 만큼 단단한 피부 탓에 착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구울의 약점은 타격이었다.
단단한 피부가 충격까지 흡수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구울은 피부와 뼈 사이에 있어야 할 근육 조직이나 지방층이 없다.
때문에 피부에 닿은 충격은 고스란히 뼈에 전달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빠악!
이어지는 구울의 공격을 간발의 차로 회피한 시현이 왼쪽 손목을 내려쳤다.
완전히 으스러진 것인지 손목이 덜렁거렸다.
반면,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흑도는 멀쩡하기만 했다.
“됐다.”
두 개의 팔을 못 쓰게 되었으니 더 이상 구울은 시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후의 전투를 일방적이었다.
시현은 구울의 주변을 돌며 마구 흑도를 내려쳤다.
부러진 팔을 휘두르거나 단단한 머리로 방어하는 등 구울도 나름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팔, 다리에 이어 흉골, 견갑골, 빗장뼈에 이어 요추까지, 하나씩 뼈를 부러뜨릴수록 구울의 전투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구울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멀쩡한 턱만 딱딱거리고 있었다.
“허억……. 허억…….”
시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땀이 비처럼 흘렀다.
한 번 공격할 때마다 전력을 쏟아 넣으니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그러나 편히 앉아서 쉴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주변에는 아직 좀비들이 즐비하며, 신호석이 막 좀비 두 마리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배후에서 좀비 셋이 일행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저놈들이 합류한다면 신호석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위기에 처한 신호석을 돕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눈앞에서 재 가루와도 같은 검은 파편이 흩날렸다.
시현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아주 잠깐이지만 신호석의 위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구울의 시체를 확인했다.
강력한 생체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악마는 기본적으로 짐승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죽으면 사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짐승과 달리, 악마의 사체는 사망 이후 빠른 속도로 부패되어 검은 재가 되어 버린다.
개체에 따라 다르지만 늦어도 1주.
빠른 경우에는 수 초 내로 부패가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사체의 일부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지금처럼.
‘이런 미친. 드롭 아이템이라니…….’
식은땀을 훔치는 시현의 눈동자에는 구울의 팔이 담겨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으하하하! 이놈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운도, 악운도 강하다고밖에는 볼 수가 없겠네요. 그래서 더 흥미로운 법이죠.
낄낄거리는 댓글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