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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33화 (33/225)

[33화]

“수상하네요. 자고로 비밀이 많은 자는 믿는 게 아니라 했어요.”

평소와 달리 이야기를 하는 데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자신만 쏙 빼놓고 비밀 이야기를 한 까닭에 잔뜩 토라진 것이다.

그러나 참가자와 관련된 진실을 알려 주기에는 설명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심지어 등장인물의 시선에서 볼 땐 한없이 믿기 어려울 터.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이나연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하여 시현은 얼버무리기를 선택했다.

“나연아, 그렇게 입고 다니면 안 추워?”

“그럴 리가 있나요. 얼어 죽을 거 같아.”

이나연이 하얗게 입김을 토하며 말했다.

대놓고 화제를 돌렸지만 속아 주겠다는 눈치다.

“이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요 며칠 사이에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잖아요. 한국 날씨 왜 이러나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두꺼운 옷을 준비할걸 그랬네요.”

이나연이 입고 있는 외투는 겨울용치고 상당히 얇은 편이었다. 때문에 이나연은 가녀린 제 몸을 끌어안은 채 덜덜 떨었다.

귀와 코끝이 빨갛고 턱이 바르르 떨렸다.

“목적지가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우리도 잠시 어디에 들렀다 가자.”

“어디요?”

“의류 매장.”

이나연의 크고 맑은 눈동자에 감격이 차올랐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뚱한 표정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오빠, 제가 격하게 사랑한다고 말했나요?”

솔직한 성격의 이나연은 함박웃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마침 머지않은 곳에 제법 규모가 있는 의류 매장이 있었다.

상태가 멀쩡하지는 않지만 잘 찾아보면 쓸 만한 겨울용 외투 몇 개 정도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에헤헤.”

의류 매장으로 가는 길에 그녀의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옷이랑 화장에 관심이 많았지.’

정수혁을 속이기 위해 잠시 스마트폰을 바꿨을 때 확인한 앨범에는 옷과 화장에 관련된 사진이 가득했다.

악마와 싸우고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사람과 싸우고 습격당하고.

최근 일정이 그런 것뿐이었기에 이나연이 받은 스트레스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끔은 이런 식으로 풀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을 한 채 의류 매장에 도착한 시현은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을 마주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앗! 오빠, 앞에 이상한 게 있어요!”

같은 것을 발견한 이나연도 소리를 높였다.

의류 매장 바로 옆 건물을 웬 대규모 노란색의 안개가 뒤덮고 있었다.

살을 에는 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는 데도 안개는 흩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광경이며,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원작의 지식을 토대로 시현은 노란 안개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마비 안개이니까 가까이 가지 마. 조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온몸이 마비된다.”

“넵.”

이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충실하게 지시를 이행했다.

호기심을 품어 봤자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나연은 어째서 그런 지식을 알고 있느냐는 식의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말해 주겠거니 하고 기다릴 뿐이다.

“마비 안개가 여기에 있다는 건 근처에 리퍼가 있다는 증거야. 안전을 위해서라도 다른 매장으로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리퍼요?”

“에일리언처럼 생긴 악마인데, 마비 안개를 덫처럼 이용해 사냥감을 사냥하는 놈이야.”

“그런데 저렇게 뻔히 보이는 함정에 당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뻔한 함정에는 짐승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어지간한 바보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시현은 알고 있었다.

저 덫은 짐승이 아닌 인간을 노리고 만든 덫인 것을.

“예상 외로 있어. 아니지, 알면서도 당한다고 해야 하나? 리퍼의 함정은 상당히 간사하거든.”

“알면서도 당하다니. 그게 무슨……. 아! 저 무슨 뜻인지 알 거 같아요.”

대답하는 이나연의 음성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시선은 시현이 아니라 마비 안개의 중심부로 향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봤기에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일까.

호기심에 마비 안개의 중심부로 시선을 준 시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안개의 중심부에 쓰러져 있었다.

“아……. 으…….”

얼핏 시체처럼 보이지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신음 소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망할.”

원하지 않던 전개에 두통이 일었다.

마비 안개 안에 있는 남학생이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리퍼가 시현과 이나연을 사냥감으로 점찍었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남학생을 돕기 위해 마비 안개 속에 들어간 순간, 기다렸다는 듯 리퍼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안개 내에서 리퍼와 교전을 벌이게 되면 자연히 신체는 많은 양의 산소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버티지 못하고 숨을 들이쉬게 되면 지천에 깔린 마비 안개가 호흡기로 들어와 전신을 마비시킬 것이다.

그 후에 어떻게 될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너무 위험해. 그냥 지나가는 게 상책이기는 한데…….’

그러기에는 남학생의 눈이 마음에 걸렸다.

눈빛에 담긴 간절함에 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냥 지나치면 꿈에 나올지도 몰랐다.

“젠장.”

이래서다. 사람이 저토록 뻔하디뻔한 리퍼의 함정에 걸려드는 이유가 바로 이 동정이라는 감정 때문이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늘 그렇듯 이나연은 시현의 의견을 물어왔다.

설사 그게 죽음의 구렁텅이로 뛰어드는 행위라 해도 시현이 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원작의 그녀가 그러했듯이.

시현의 궁극적 목표는 게임의 승자가 되어 현실로 되돌아가는 것.

소설 속 등장인물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는다면 그보다 억울한 죽음도 없을 것이다.

리퍼는 강하다. 심지어 뚜렷한 약점이 없는 적이기도 했다.

정면으로 맞붙었을 때 승산은 한없이 낮다. 혼자였다면 안타깝지만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현의 곁에는 에르의 권능을 가진 이나연이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희박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일단 내 신체 능력은 일반적인 2레벨 이상이고, 나연이의 도움도 받을 수 있어. 가능성은 충분해.’

어렵기는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

남학생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은 시현은 본격적으로 작전을 구상했다.

“일단 저 친구를 먼저 구해야겠어. 도와줘.”

“제가 뭘 하면 돼요?”

“사실 저 안개 자체가 리퍼의 능력이거든. 네 권능이라면 잠깐 동안은 저걸 걷어 낼 수 있을 거야.”

“……아!”

그제야 자신이 구원자로 각성하며 얻은 권능이 무엇인지 떠올린 이나연이 밝게 웃었다.

“드디어 제가 나설 차례군요.”

“신호는 네가 줘. 그 대신 조준 잘 해야 한다. 실수로 에임이 흔들리면 저 친구의 머리는……. 여기까지만 말할게.”

“……절대 실수하지 않도록 할게요.”

비장한 각오를 마친 이나연이 흑도를 들고 안개 뭉치 앞에 섰다.

그러곤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흑도를 든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갑니다!”

일갈과 함께 그녀가 정면을 향해 흑도를 내질렀다.

매서운 찌르기가 행해진 직후, 흑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칼날과도 같은 바람이 쏘아졌다.

칼날 바람은 노란 안개를 갈기갈기 찢으며 전진했다.

그러다 남학생의 머리 위까지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주 미세한 차이로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죽을 거라 생각했는지 그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글썽거렸다.

무사의 대가로 남학생의 머리에 커다란 땜빵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후아! 아슬아슬했다!”

가까스로 자신의 공격이 남학생의 머리를 찢어발기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녀는 크게 안도했다.

“잘했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준 시현이 앞으로 내달렸다.

에르의 권능이 만든 길을 따라간 시현이 쓰러져 있는 남학생을 들어 올렸다.

그때 바람에 흩어졌던 안개가 재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고고고.

동시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리퍼가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안개 속에서 리퍼와 교전할 생각은 없었다.

시현은 달아났다. 점점 강해지는 진동과 빠르게 가까워지는 노란 안개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제법 건장한 남학생의 무게 탓에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칫.”

혀를 찬 시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호흡을 멈췄다.

동시에 이나연이 만든 바람의 길이 완전히 닫혔다.

눈앞이 노랗게 물들었다.

‘남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지 않도록 주의하며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이나연이 점점 가까워졌다.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온몸이 어서 빨리 산소를 공급하라고 시현을 다그쳤다.

시현은 이를 악물고 몸을 던졌다.

노란색으로 물들었던 세계가 일순간에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허억!”

시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산소가 이리도 맛있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됐다!”

시현보다 먼저 이나연이 기쁨의 환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아직 싸움은 끝난 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키에에엑!]

괴물의 고성이 들려온다.

사냥에 실패한 것으로도 모자라 미끼까지 잃어버려 분노한 리퍼의 외침이었다.

소리는 발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강한 진동과 함께 땅이 불쑥 솟아났다.

두꺼운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리퍼는 네 개의 붉은 눈에 시현을 담았다.

놈이 굉장히 분노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게 리퍼…….’

소설에서나 봤을 뿐 실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중형 악마인 리퍼는 원작에서도 꽤나 잦은 빈도로 등장했다.

길쭉한 팔다리와 꼬리, 공룡을 닮은 몸통.

길고 뾰족한 가시가 돋아난 척추는 등가죽을 뚫고 솟아났으며, 길고 가는 꼬리의 끝에는 마비 안개를 사출하는 기관이 달려 있었다.

마름모 모양 머리의 끝에 돋아난 가시는 개체마다 개수가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허리를 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기가 3미터에 달했다.

끔찍한 외형 탓에 보기만 해도 공포에 질려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묘사가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빳빳하게 굳어 있는 이나연을 보아하니 그 묘사도 거짓은 아닌 듯했다.

미끼를 이용한 사냥에 실패한 데다 식량으로도 쓸 수 있는 미끼를 빼앗기기까지 했다.

리퍼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일단 마비 안개에서 끄집어냈으니 다행이기는 한데……. 그래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게 아쉽네.”

리퍼는 덫을 놓고 사냥감을 기다리는 악마다.

그렇다고 리퍼의 전투력이 약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뚜렷한 약점도 없는 놈이 외피도 두껍고, 신체를 둘러싼 갑각도 튼튼하다.

덩치에 비해 근력도 강하고 민첩하며 지능까지 뛰어나다.

단언컨대, 중형 중에는 가장 까다로운 악마일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 리퍼와는 빈번하게 마주치게 될 거야. 그러니까 한 번 싸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시현은 구해 온 남학생을 이나연에게 넘겼다.

“나연아, 이 친구 좀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줘.”

“알겠어요.”

호언장담하는 시현을 이나연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무한한 신뢰의 눈빛으로 답한 이나연이 남학생을 등에 업었다.

“끄응……. 무거워.”

남학생의 체중이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나연은 속도를 높여 리퍼의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보석처럼 붉은 리퍼의 눈동자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담았다.

리퍼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시현은 흑도로 바닥을 가볍게 때렸다. 그럼에도 리퍼는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자신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이는 하나의 사냥감과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 먹잇감 둘.

결국 양적 우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리퍼가 달아나는 두 사람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내가 꼭 ‘네 상대는 나다!’ 같은 진부한 대사를 쳐야겠어?”

빠각!

야구공 크기의 콘크리트 파편이 리퍼의 머리를 때렸다.

[키에에엑!]

리퍼가 괴성을 내질렀다.

외피 때문에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리퍼의 분노가 시현에게 향하기에는 충분했다.

번득이는 눈동자에 강한 적개심이 타올랐다.

시현의 의지 또한 타올랐다.

[키아아아!]

포효한 리퍼가 땅을 박찼다.

기본적으로 사족 보행을 하는 리퍼이지만 어느 정도 속도가 붙자 앞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들어 올린 앞발은 시현을 붙잡기 위해 뻗어졌다.

예상했던 공격 패턴이기에 시현은 몸을 크게 회전시켜 리퍼의 앞발을 회피했다.

동시에 회전력을 더한 일격을 옆구리에 먹였다.

흑도 전체에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제법 둔중한 소리가 났으나 리퍼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외피 역시 멀쩡했다.

‘리퍼의 공격 수단은 앞발과 이빨, 그리고 긴 꼬리.’

잡다한 소음 속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포의 몸이 기묘하게 틀어지는 것을 확인한 시현은 급하게 자세를 낮췄다.

그런 시현의 머리 위로 채찍 같은 꼬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굽혔던 다리를 펴며 얻은 추진력을 이용한 찌르기가 리퍼의 눈을 노렸다.

까앙!

이번에도 시현의 공격은 외피에 가로막혔다.

[…….]

시현의 공격이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리퍼는 방어를 내버리고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두 다리와 꼬리, 그리고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하면 몸이 반으로 토막 날 것 같은 커다란 이빨.

공격 수단이 무려 네 개나 된다.

쉼 없이 쏟아지는 연계 공격을 시현은 막거나 피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두 개의 팔로 전부 막아 내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퍼억!

리퍼의 꼬리가 결국 시현의 관자놀이를 때리는 데 성공했다.

외피 덕에 부상은 면할 수 있었으나 강한 힘에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

시현은 두 번째 무기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힘껏 내지른 단검이 리퍼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역시 외피에 막히고 말았다.

찢어진 외피의 일부가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겨우 이 정도야?”

싸구려긴 하지만 그래도 축복이 담긴 무기로, 외피를 찢는데 특화되어 있다.

때문에 어느 정도 충격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참이나 기대에 못 미쳤다.

‘싸구려는 그 이유가 있구나. 역시 강한 일격이 필요해.’

시현이 가진 권능은 객관적으로 봐도 강력하다.

문제는 이나연의 권능처럼 일격 필살형이 아니라 지속적인 전투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강화형이라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처럼 권능을 사용해도 상대방의 신체 능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어지간하면 그건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나…….’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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