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이게 뭐예요?”
드러난 제단에 이나연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째서 이런 물건이 마트의 한복판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에 시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상점.”
손등으로 제단을 툭툭 건드리면서 말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이 대리석의 정식 명칭은 공물의 제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구원자들은 자연히 제단을 상점으로 부르게 된다. 그편이 간편하고 뜻이 통하며 정겹기 때문이다.
“상점이요?”
이나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진짜 상점이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원자 전용 상점이라 할 수 있겠네.”
토큰은 여러모로 사용처가 많은 재화다.
무기나 방어구는 어디까지나 기본 중의 기본에 불과하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식량, 구조물.
나아가서는 회복 물품이나 도핑 물약, 부적,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제품까지, 실로 다양한 것들을 구매하는 게 가능하게끔 해 주는 재화가 바로 토큰이다.
하지만 구원자라 해서 누구나 토큰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토큰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공물의 제단을 확보해야만 한다.
제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수의 생존자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며, 그들을 보호해 줄 안전한 장소도 확보해야 한다.
제단의 주인은 영역의 지도자로 인식되어 주기적으로 토큰을 회수할 수 있지만, 이익이 있는 만큼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외부의 공격에서 제단을 지켜 내지 못하면 축복이 일부 회수되며, 권능의 성능이 영구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때문에 대부분은 제단의 제작을 기피하며, 제작한다 해도 공개하지 않고 숨겨 놓기 마련이다.
‘숨겨 놓으려면 제대로 숨길 것이지. 기껏 숨긴 장소가 침대 밑이라니…….’
조소를 흘린 시현은 제단 위에 손을 얹었다.
화악!
그러자 강렬한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우아아! 깜짝 놀랐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지!”
예고도 없는 서프라이즈에 이나연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화들짝 놀란 건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로 효과가 화려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엉거주춤한 자세의 시현을 보며 이나연이 영 미덥지 않다는 시선을 보냈다.
“오빠가 왜 놀라고 그래요?”
“나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란 말이야.”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시현은 방 안을 살폈다.
벽, 바닥, 천장, 가구.
방 안에 존재하는 면이란 면에 죄다 빛나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시현은 그 중 정면에 있는 문자를 읽었다.
<구원자 윤시현. 현재 소지 중인 토큰 : 176개.>
<구원자 이나연. 현재 소지 중인 토큰 : 12개.>
그것은 제단의 영역 안에 있는 두 구원자의 지갑 상황을 알려 주는 친절한 안내문이었다.
이제 막 구원자가 되었으며, 시현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한 이나연이 보유한 토큰은 차마 눈 뜨고 못 봐 줄 만큼 처참했다.
안타까움마저 생길 정도다.
“와아…….”
그런 시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눈을 빛내며 방 안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게 다 뭐예요?”
“말했잖아, 상점이라고. 여기서 다양한 물품을 구매할 수 있어. 악마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사도 좋고, 네 몸을 지키기 위한 방어구를 사도 괜찮고.”
“저도 물건을 살 수 있어요?”
“당연하지. 너도 구원자잖아. 여기 보이는 것들은 죄다 카탈로그고, 구매를 결정하면 제단을 통해 실물이 구현될 거야.”
물론 그녀가 보유한 토큰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시현은 카탈로그를 살폈다.
그것을 구성하는 글자의 색은 알록달록했다.
흰색, 녹색, 파란색, 노란색, 적색 등 총 다섯 가지 색이 존재하며, 순서대로 흰색이 가장 많고 적색이 가장 적었다.
이는 곧 상품의 등급을 의미한다.
그중 시현은 적색의 카탈로그에 시선을 줬다.
<권능의 창 ― 토큰 2,000개, 9위 메달.>
<지배의 안장 ― 토큰 10,000개, 2위 메달.>
<엘릭서 ― 토큰 800개.>
<란자모프의 법의 ― 토큰 1,500개, 10위 메달.>
“더럽게 비싸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말도 안 되는 가격 측정이다.
1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나름 열심히 벌어들인 토큰이 겨우 200개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가장 저렴한 물건인 엘릭서가 무려 800개나 토큰을 요구했다.
엘릭서가 소모품임을 감안하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금액이다.
그뿐이랴.
메달이라는 특수한 재화까지 요구했다.
평범하게 토큰만 가지고 있어서는 구매할 수 없다는 소리다.
물론 적색 카탈로그의 상품들은 하나같이 경이로운 물건들뿐이다.
블랙마켓의 물건 정도는 아니라도 정상적으로는 하나를 구하기도 벅찬 보물들이었다.
평범한 구원자는 몰라도, 가치를 아는 참가자라면 누구나 눈을 뒤집고 손에 넣으려 할 것이다.
‘저런 거 하나만 있으면 생존 난이도가 확 내려갈 텐데.’
탐나기는 하지만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구매할 수 없는 물건들이다.
그렇다고 너무 높은 목표만 바라보며 무작정 저금을 하기에는 현재 시현의 장비 상태가 너무 빈약했다.
언제까지고 식칼과 회칼, 야구방망이로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에 시현은 다른 색의 카탈로그를 살폈다.
그중 몇 개인가 회색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영단 ― 토큰 50개(매진).>
<생명의 부적 ― 토큰 80개(매진).>
매진된 물건들은 회색 글씨로 표시되는 모양이었다.
‘생명의 부적은 가지고 싶었는데, 아쉽네.’
생명의 부적은 생명에 지장이 있을 치명적인 상처를 1회에 한해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즉, 여벌 목숨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므로 토큰 3개 값은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매진된 물건은 다시 보충되지 않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카탈로그를 탐색하던 시현은 사전에 생각해 두었던 물건과 괜찮다 싶은 물건 몇 개를 구매 목록에 담았다.
<축복이 담긴 단검 — 15개.>
날이 쉽게 상하지 않으며 권능을 보다 쉽게 받아들인다. 외피를 보다 쉽게 찢는다.
<불씨가 담긴 외투 — 30개.>
온도 조절이 가능하다. 외피에 소모되는 정신력을 감소시킨다.
<흑도 — 35개.>
타격력 상승. 결코 부러지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경험의 부적 — 40개.>
악마를 처치할 때 얻는 경험의 양을 아주 조금 상승시킨다.
외상을 빠르게 치료한다.
시현이 노리는 물건은 이 정도였다.
“나는 쇼핑 끝. 나연이 너는 어때?”
“저 같은 거지는 아이쇼핑밖에 권한이 없었어요. 심지어 실물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재미있지도 않았고요.”
눈앞에 펼쳐진 신비로운 광경에 눈을 빛내던 여성은 오간데 없었다.
풍선처럼 부푼 두 뺨만이 그녀가 느끼는 불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가 가진 토큰 12개로는 즐거운 쇼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비라면 가장 저렴한 게 토큰 25개는 요구했으니까.
시현은 침울해진 이나연을 달래 주기 위해 구매를 확정 지었다.
잘그락.
둔탁한 동전 소리가 나며 시현의 소지 금액이 1로 바뀌었다.
사라진 토큰은 제단 위에 놓였다.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은색의 동전들은 빛과 함께 녹아내리더니 모이고 분리되어 각각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졌을 때 제단 위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단검, 검은색의 긴 목검 두 자루, 카키색 야상 등 시현이 구매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웠던 글자들이 사라지고, 제단은 제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침묵했다.
그러자 거울 앞에 선 시현은 구매한 물건들을 장비했다.
외투를 두르고 흑도와 단검은 허리춤에, 치료제는 가방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몇 배는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좋아요?”
이나연의 말이 있고 나서야 시현은 자신이 바보같이 웃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딱히 지금의 기분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연하지. 이건 저렴한 초반용 장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능을 가지고 있거든. 이 옷의 경우 숨겨진 기능으로 전격 내성이 담겨 있고, 흑도의 경우 재고가 딱 두 개밖에 없는데 전부 수중에 넣었잖아. 이만하면 엄청 이득이지.”
“그런데 왜 목검이 두 자루예요? 이도류 같은 건가?”
이나연이 당연한 질문을 해 왔다.
“이도류는 양손잡이라도 어려워.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아야 하거든.”
“그러면……. 아아! 비상용이구나. 부러졌을 때를 대비한.”
“흑도는 타격형 무기 중에서 유일하게 부러지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그러면 대체 뭔데요?”
이나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여우처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작게 웃은 시현은 들고 있던 흑도 하나를 이나연에게 건넸다.
“받아.”
“……혹시 선물?”
“응.”
그에 이나연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흑도를 끌어안았다.
말이 좋아 선물이지, 악마와 더 악착같이 싸우라고 등 떠미는 거나 다름없건만, 이나연의 두 눈에는 감동의 물결이 가득했다.
“오빠, 제가 격하게 존경한다는 말 했었나요? 안 했으면 지금 할게요.”
“오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끌어안으려 드는 이나연을 억지로 밀어낸 시현은 Re write의 규칙을 열람했다.
즐거운 쇼핑을 끝마쳤으나 아직 한 가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있었다.
바로 메달의 존재다.
‘메달을 확보하는 방법은 분명 규칙에 나와 있던 거 같은데…….’
그의 기억은 잘못되지 않았다.
17. 상위권 10위 내의 참가자가 사망할 경우, 특수 재화인 메달이 드롭 됩니다.
“망할.”
절로 한숨이 나오는 규칙이다.
해석하자면 ‘최고급 장비를 얻고 싶다면 10위 내의 랭커를 죽여라!’나 다름없는 소리다.
현재 시현의 순위는 9위로, 싫은 건 아니지만 마냥 기뻐하기에도 뭣한 순위다.
메달을 원하는 참가자라면 눈을 뒤집고 그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악마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다른 참가자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시현은 1위부터 10위, 그리고 곧 순위권에 들어올 가능성이 충분한 20위까지의 참가자 이름을 차례대로 훑었다.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 언제, 어디서라도 조우하면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현재 1위는 한소현. 그러고 보니 사도로서 데뷔했다고 전에 댓글에서 본 거 같은데. 그리고 이한울은 그새 2위까지 올라갔네. 반면…….’
익숙한 이름이 하나 보였다.
민서라.
현재 순위는 10위다.
시현은 그녀의 인격을 떠올렸다.
단언컨대 그녀만큼 신뢰할 수 있는 참가자도 드물 것이다.
메달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이상, 민서라의 몸값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순위권에 자리하고 있으며, 같은 아픔을 겪은 그녀라면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테니까.
다행히도 민서라가 있는 장소는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않았다면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쉽게 학교를 떠나 시현의 손을 잡아 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도 시도는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면 다음 목적지는 학교로 잡고, 출발은…… 정훈을 만난 다음에 결정해야겠네.”
정훈.
원작이 뒤틀리지 않았다면 그와의 만남이 머지않았다.
앞으로 사흘 후, 정훈은 마트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시현은 기다렸다.
하지만 사흘이 지났을 때, 마트에는 어떠한 방문자도 없었다.
* * *
“가는 거냐?”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있으려니, 한기훈이 다가왔다.
그는 시현이 떠나는 걸 만류하지 않았으나 퍽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디로 갈 거야? 목적지나 알아 두자.”
“학교로 갈 겁니다.”
“학교 어디? 야, 대한민국에 학교가 한두 개냐?”
상대가 참가자였다면 학교라는 단어만으로 충분했겠지만, 등장인물인 한기훈은 아니었다.
시현이 추가 설명을 보탰다.
“서울외고요. 거기에 계신 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외고라……. 나랑은 평생 인연이 없는 장소네.”
“저도요. 공부랑은 안 친했는데.”
“하하하! 어찌 되었건 항상 몸조심하고,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와라. 도와줄 테니까.”
어깨를 두드린 한기훈은 등을 돌렸다.
한기훈과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훈 씨도 저와 같이 가시겠습니까?”
안 될 걸 알면서도 시현은 동행을 제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한기훈이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라고 하지만, 그건 차차 고쳐 나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한기훈은 고개를 저어 시현의 제안을 거절했다.
“미안하다. 제안해 준 것은 기쁘지만 여기 남아서 예인이가 구하고자 했던 사람을 지켜 주고 싶어. 그래도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네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와줄 테니까.”
예상했던 답이었다.
한기훈은 이제 만날 수 없는 한예인의 흔적이 다수 남아 있는 마트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시현은 마트에서 영입 대상이던 3인을 전부 놓치고 만 것이다.
그와 이별하고 오토바이에 올라 탄 시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속 쓰리네.”
“뭐가요?”
개인 짐을 챙긴 이나연이 뒷좌석에 올라타며 물었다.
그래도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나연을 보고 있자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든든해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가 마트의 주차장을 떠났다.
불어오는 맞바람을 가르며 시현은 핸들을 돌렸다.
텅 빈 도로를 달려 성수대교에 진입한 시현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어? 저게 뭐야?”
한참을 달리던 시현은 도로 위에 놓인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의심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