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정수혁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의 시작 지점은 정훈이 활약할 첫 번째 무대가 되는 LT마트와 굉장히 거리가 가까웠다.
곧장 마트로 향한 정수혁은 원작의 지식을 토대로 위기를 여유롭게 돌파하며 생존자들의 존경을 샀다.
그러니 자연스레 생존자들 사이에서 그를 따르면 살 수 있다는 인식이 박혔다.
처음에는 한씨 남매도 그를 신뢰했다.
이대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순탄 대로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몇 개 저지르고 말았다.
생존자들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자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로 분류해 등급을 매긴 것이 그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 결과, 정수혁은 가장 손에 넣어야 할 한씨 남매로부터 미움을 사고 말았다.
어떻게든 그 실수를 만회하려 전전긍긍하고 있는 그에게 한 무리의 남녀가 접근해 왔다.
이한울 일행이었다.
마트를 수중에 넣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으나, 이한울은 선객이 있는 걸 보자 마음을 바꿨다.
그러곤 정수혁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일찌감치 마트에 눈독을 들이고 생존자들에게 존경을 사며, 세력을 구축한 정수혁을 유능한 인재라 판단한 것이다.
첫 번째 실수로 한씨 남매의 신뢰를 잃고 불안을 느끼던 정수혁은 이한울이 내민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이한울과 교류했고, 신혈과 레벨 서포터의 프로토타입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원작의 메인인 3인을 수중에 넣기에는 정수혁이라는 인간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거기에는 구원자로 각성하며 얻은 만능감이 일부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모욕한 한기훈에게 분개해 복수의 일환으로 한예인을 위험에 몰아넣었다.
한씨 남매에게 굴욕을 당하던 민성찬도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저 겁만 줄 예정이었다.
그 한예인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만 갖고 일을 저지른 것이다.
원작에서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며 활약한 주연급 등장인물 아니던가.
특히, 장판교의 장비처럼 외길에서 수많은 악마들을 막아 냈던 에피소드는 정수혁이 꼽는 명장면 중 하나였다.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예인이 성장한 후의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한예인은 죽었고, 그게 정수혁이 저지른 두 번째 실수다.
첫 번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
홧김에 저지른 일을 후회하던 정수혁은 정훈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번 도약을 꾀했다.
그게 시현의 농간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결국 레벨 서포터까지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현에게 무참하게 패배하고, 살해당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데드 엔딩을 맞이한 정수혁의 Re write였다.
대충 소설 한 권 분량에 걸쳐 한 남자가 멸망 후 세계에서 고군분투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시현이 원했던 특별한 정보는 없었다.
이한울의 약점이 될 만한 가치 있는 정보 말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붉은 문자를 치워 버리려던 찰나였다.
<경쟁자를 처치했기에 보상으로 425,000원을 획득합니다.>
<이는 참가자 정수혁의 가치를 치환한 것입니다.>
알람이 추가로 도착했다.
“오……. 이런 식으로 돈을 수급할 수 있구나.”
소지금을 확인해 보니 정확하게 42만 5천 원이 증가해 있었다.
블랙마켓의 상품 가격을 고려해 보면 푼돈일 뿐이지만 다른 참가자로부터 재화를 수급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블랙마켓의 상품은 눈이 돌아갈 만큼 고급품뿐이다.
아마 시현처럼 억 단위의 가치를 가진 물건을 가지고 게임에 참가한 이는 없을 터.
그렇다면 참가자들은 다른 경쟁자를 처리함으로써 재화를 얻어 물건을 구매하려 들 것이다.
이로써 참가자끼리의 신뢰는 더욱 형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축하합니다! 윤시현의 Re write가 보다 많은 구독자를 얻어 순위가 상승했습니다.>
또 하나의 알림이 도착했다.
축하 문구를 지우니 자연스럽게 ‘윤시현의 Re write’가 정면에 표시됐다.
일단 마트의 리더였던 정수혁을 처단해서 그런지 조회수와 구독자가 폭등해 있었다.
10위였던 순위도 한 단계 올랐으며 댓글도 상당히 늘었다.
—정수혁, 무능한 놈이 아등바등하는 꼴이 귀여워서 구독하고 있었는데. 뭔가 아쉽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윤시현은 경쟁자를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생각보다 잔혹하게 죽이더라. 그새 담금질이 된 건가?
—그래서 오히려 괜찮다고 생각해. 정수혁은 죽어도 싼 놈이었고.
댓글을 통해 어찌된 영문인지 대략적이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정수혁의 Re write를 구독하던 독자 중 일부가 시현의 소설로 옮겨 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매주 조회수에 따라 토큰이 지급된다 했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단기간에 많은 토큰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흑도랑 외투를 동시에 노려봐도 괜찮을 거 같은데. 한 번이라도 좋으니 상점을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돈을 쌓아만 두고 쓰지를 못하고 있으니 자연히 욕심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떠올린 시현은 정수혁이 사용하던 정글 칼을 확인했다.
그의 예상대로 평범한 무기가 아니었다.
표면을 휘감고 있는 희미한 백색의 빛.
신의 축복이 담긴 무기다.
축복이 담긴 무기는 오로지 상점에서만 얻을 수 있다.
즉, 정수혁이 상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드디어 토큰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니, 기분 좋은 열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 * *
정리를 마친 시현은 1층의 생존자들과 함께 마트로 복귀했다.
선두에는 한기훈이 있었다.
예상대로 2층 생존자들은 돌아온 1층의 생존자들을 보더니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들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마트의 리더로 군림하던 정수혁이 자리를 비웠기에 민성찬이 대표로 일행을 맞이했다.
그에 한기훈이 싸늘하게 노려보고는 그를 지나쳤다.
명백한 무시에 민성찬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붉어졌다.
2층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통로인 에스컬레이터 앞에 선 한기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바리케이드를 내려쳤다.
쾅!
굉음과 함께 그중 일부가 파손됐다.
모두가 놀랐지만 민성찬이 가장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한기훈! 이게 무슨 짓이지? 지금 외출 중인 리더가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이름을 꺼내면 한기훈이 알아서 굽힐 거라 생각했는지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꼴 보기 싫은 미소다.
그런 민성찬의 미소를 단번에 지워 없앨 마법의 말이 있었다.
“정수혁은 죽었다.”
“이건 또 뭔 헛소리야? 뭐 잘못 주워 먹었냐?”
내뱉듯 읊조린 한기훈의 말을 농담 따위로 치부한 민성찬이 조소를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민성찬뿐만이 아니라 마트의 생존자들은 정수혁이 가진 초월적인 힘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랬기에 두렵던 악마보다 더한 힘을 보여 준 그가 죽었다고는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앙에 가까운 그들의 믿음을 깨부수기 위해, 한기훈은 미리 챙겨 두었던 정수혁의 신분증을 던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정수혁의 신분증을 확인한 민성찬은 언제 나불댔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다른 생존자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1층 생존자들에게 정수혁은 얄미운 존재였지만, 2층 생존자들에게는 자신들을 챙겨 주는 고마운 존재였으니까.
“리더는 왜 갑자기 죽은 거야? 설마 악마들에게 당한 건가?”
“그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뭘 어떻게 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뭉쳐서 잘 살아남아야지. 사실 정수혁 없이도 우리는 잘해 왔어. 힘을 얻었다고 정수혁이 우리를 대신해 악마랑 싸워 준 건 아니잖아.”
“하지만 모두를 통솔해 줄 리더는 필요하잖아요.”
콰앙!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폭음에 소란이 가라앉았다.
그런 폭력적인 소리의 중심에는 한기훈이 있었다.
그는 정면을 향해 주먹을 뻗고 있었다.
견고하던 바리케이드는 약 10미터 전방에서 산산조각이 난 채 나뒹굴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깨달았다.
한기훈이 정수혁과 비슷한,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다시피 나도 너희의 전 리더와 같은 힘을 얻었다. 너희들을 악마로부터 지켜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한기훈이 입을 열었다.
평소 친해지기 쉬운 동네 형 같은 이미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순둥순둥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사람들을 훑는 눈이 살기등등했다.
누가 봐도 보호를 약속하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한기훈의 입에서 나온 말을 쉬이 믿지 못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단 조건이 있다.”
“조건?”
“아무리 정수혁의 명령이 있었다지만 너희가 2층으로 가는 길을 틀어막았기 때문에 예인이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대가를 치러 줘야겠어.”
그는 대가라는 단어를 특히 힘주어 발음했다.
그제야 한예인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음을 깨닫자, 당황한 2층 생존자들이 반발했다.
“그,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맞아! 그 정도 수의 악마가 쳐들어왔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애초에 리더의 지시였다고!”
몇몇 이들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층의 생존자들을 받아들이고 좁은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응전했으면 모두가 살아남았을 거라고.
아무리 명령이 있었다지만 실질적으로 1층의 생존자들을 죽음으로 떠민 건 자신들이란 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1층의 생존자들은 차별을 받아 왔었지. 이제는 너희들 차례다.”
“그건…….”
“불만 있는 놈은 지금 튀어나와. 지금까지 그러했듯 나를 향한 불만은 예인이가 상담해 줄 거다. 나는 상담 같은 거 잘 못하거든.”
“…….”
반발하려던 생존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한예인은 죽었다.
그래도 그녀와 상담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지금의 한기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섣부르게 자극했다가는 그의 분노에 온몸이 터져 나갈 것이다.
“그래, 우리에게 어느 정도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겠어. 조건이 뭐가 되었건 수용하도록 하지.”
2층의 생존자들을 대표해 민성찬이 의견을 표했다.
여기서 쫓겨나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터, 개똥밭을 구르더라도 이승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리더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미안하다. 한예인에 대한 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민성찬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렇기에 민성찬은 자신의 뒤통수를 응시하는 한기훈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만약 알았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달아났을 것이다.
그게 민성찬이 저지른 인생 최후의 실수였다.
“그 전에 하나 더 민성찬, 너처럼 악마를 불러들이는 짓거리에 협력한 놈은 용서 못 한다.”
“……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성찬의 머리에 한기훈의 주먹이 꽂혔다.
온 힘을 다한 일격에 민성찬이 바닥에 처박혔다.
더 이상 민성찬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이 꺾여 즉사한 것이다.
그러자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울렸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시선에도 한기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마트는 내 관리하에 둔다. 불만이 있다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아.”
그 외침은 상처 입은 맹수의 포효를 떠올리게 했다.
* * *
“정말 괜찮을까요?”
정황을 지켜보던 이나연이 속삭였다.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한기훈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생이 죽은 후 한기훈은 변했다. 사람은 사소한 계기로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건 좋은 변화가 아니다.
원작에서의 한기훈은 바보 같은 면이 있지만 공정하려 노력하고 늘 밝으며 생존자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는 존재였다.
사실 전투력에서는 한예인 쪽이 더 높지만, 이런 면모 때문에 정훈은 한기훈을 더 높이 샀다.
하지만 지금의 한기훈은 폭력적이고 분노에 차 있으며 감정적이다.
원작에 등장하는 그 한기훈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차라리 오빠가 리더가 된다고 하셨으면……. 아저씨도 양보했을 텐데.”
“마트에 장기간 머물러 있어 봤자 우리에게 하등 도움 될 게 없어.”
마트는 생존에도, 성장에도 그리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시현은 그날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 1개월 7일 5시간 1분.>
2개월 남짓하던 시간이 이제는 거의 반밖에 남지 않았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지 않으면 남은 시간이 0에 달하는 순간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마트는 오래 머무를 장소가 못 된다.
그럼에도 시현이 마트를 목적지로 삼았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한씨 남매와 정훈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확립하고 가능하다면 완벽한 아군으로 포섭하는 것.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마트에 머무르고 있는 진짜 이유이자 목표였다.
하지만 시현은 목표 달성에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한예인은 죽었고, 한기훈은 변했어. 정서적으로 너무 불안해.’
지금의 한기훈은 감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끝마치지 못했기에 들끓는 분노와 슬픔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중이다.
저런 상태의 한기훈에게는 믿고 등을 맡길 수 없다.
이제 믿을 건 정훈뿐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결국 요 며칠간 마트에서 지내는 동안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술 생각이 절실하게 났다.
‘원작을 알고 있으면 뭐 해. 다른 참가자들 때문에 제대로 써먹을 수가 없는데.’
Re write의 원작은 어찌 보면 이 세계의 미래가 기입되어 있는 예언서라 할 수 있었다.
그 지식을 잘만 활용하면 다른 생존자들보다 몇 배는 빠르게 앞서가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부족한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너무 많은 게 문제다.
수많은 참가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원작의 지식을 활용하려다 보니 많은 것들이 본래의 흐름에서 탈선했다.
생명의 탑에서 자그마한 세력을 일궈 냈을 이채연은 자취를 감췄다.
수많은 구원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정해수는 시현의 개입으로 인해 각성하기도 전에 사망했다.
마찬가지로 빌런이 되었어야 할 이나연이 지금은 시현의 옆에 있다.
이야기의 주역으로 절망에 허우적거리던 많은 이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었던 한씨 남매 역시 정수혁의 개입으로 인해 미래가 바뀌었다.
앞으로도 참가자의 개입이 있을 때마다 예정되어 있던 미래가 바뀔 것은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원작을 지침서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
원작은 어디까지나 참고서일 뿐, 더 이상 행동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트에서 볼일이 끝나면 바로 서울을 빠져나가려 했는데, 조금 계획을 바꿔야겠어.”
“어디로 가려고 했는데요?”
“인천이나 강원도. 거기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게 성장할 세력들과 그들이 모인 연합이 탄생하거든. 서울은 사건 사고가 많은 장소라 가치가 조금 떨어져.”
“마치 미래를 보고 오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보고 왔다면 어쩔래?”
“아하하! 오빠, 농담 엄청 못 하시네요.”
이나연은 배를 잡고 웃으며 시현의 말을 농담 정도로 치부했다. 나름대로 진실을 말한 건데 말이다.
‘인천의 시청, 강원도의 군부대. 전부 누군가가 먼저 손길을 뻗쳤을 거야. 부산도 있기는 하지만, 거기는 너무 멀어.’
시현은 이나연을 영입하고 마트를 기웃거리느라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이제 와서 원작을 따라가 봤자 선구자들이 단물만 빨아 먹고 버린 것이나 주워 먹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과 경쟁하며 모든 것을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
최고의 인재 중 하나였던 한기훈이 망가진 것처럼 말이다.
“어디로 갈지는 천천히 생각하고, 일단 챙길 것부터 챙기자.”
시현은 2층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정수혁의 개인실로 향했다.
개인실은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한층 더 지저분해져 있었다.
“으악, 이거 완전 돼지우리가 따로 없네요. 끔찍해라.”
시현을 따라 들어온 이나연이 질색했다.
그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감을 표한 시현은 방 안을 살피다 침대로 향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침대 외에는 의심되는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침대 위에는 부스러기가 남아 있는 과자 봉투 따위가 굴러다녔다.
“아무리 이런 시국이라지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지저분하게 살 수가 있을까.”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과자 봉투를 대충 구석에 던져 둔 시현은 두꺼운 겨울용 이불과 침대 시트를 걷어 냈다.
하지만 드러난 것은 푹신푹신한 매트리스가 아니었다.
백색의 아름다운 대리석 제단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제단에 새겨진 문양은 정수혁의 신체에 새겨져 있던 낙인과 일치했다.
“찾았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