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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28화 (28/225)

[28화]

“시현아, 이제 해도 되는 거지?”

“얼마든지.”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기훈이 주먹을 날렸다.

얼굴에 정통으로 꽂힌 주먹에 정수혁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한기훈의 분노가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부터 축적해 오던 분노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그는 미친 사람처럼 눈을 뒤집고 주먹을 휘둘렀다.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진 주먹이 정수혁의 신체를 연타했다.

“그만, 그만해!”

결국 견디지 못한 정수혁이 권능을 사용했다.

그의 주변으로 얇은 막이 펼쳐졌다.

퉁! 퉁!

한기훈의 주먹이 막을 때릴 때마다 진동이 일었으나 깨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제길! 뭐가 이렇게 단단해!”

이를 악문 한기훈이 더욱 힘을 가했으나 달라질 건 없었다.

보호막 안에서 호흡을 고르던 정수혁은 시현의 눈치를 봤다.

2레벨 구원자인 시현이 끼어들면 자신의 승산이 희박하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시현에게서 끼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수혁은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그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다른 생존자들이 사용하는 마트용 식칼이 아닌 무겁고 형태가 잡힌 정글용 단검이었다.

상대가 무기를 꺼내자 한기훈도 긴장을 높였다.

한기훈이 자랑하는 무기는 강인한 두 주먹.

하지만 아무리 주먹이 강해 봤자 날붙이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외피를 두를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시현은 차분하게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봤다.

가장 변수로 작용하는 건 정수혁이 사용하는 권능이었다.

방어막은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에 사용자를 지켜 주지만, 반대로 안에 있는 사용자의 공격도 차단해 버린다.

그러나 정수혁은 자신의 권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정수혁은 자신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 권능을 없앴다.

막이 사라지고 정글용 칼이 한기훈의 가슴팍을 스쳤다.

고통을 인내한 한기훈이 반격했으나 정수혁은 황급히 장막을 다시 만들었다.

“이게……!”

약 올리듯 치고 빠지는 정수혁 때문에 한기훈은 바짝 약이 올랐다.

그러나 한기훈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저 장막을 깨부수기 위해 더욱 큰 힘을 쏟아 낼 뿐이었다.

전력을 다한 한기훈이 지칠 때 즈음 정수혁은 장막을 없애고 공세로 전환했다. 그러다가도 반격이 오면 수세로 전환했다.

비겁하지만 단순한 한기훈을 상대로는 상당히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역시…….’

이렇게 될 거라고 어렴풋이 예측하고 있던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험이나 실력보다는 지식의 차이였다.

순수하게 주먹으로만 치고받는 거라면 한기훈의 압승일 것이다.

그러나 정수혁은 참가자다.

원작을 읽고 지식을 축적한 정수혁은 구원자의 근본이 되는 축복과 권능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으아아아아!”

권능이 정수혁만의 특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한기훈도 권능을 사용했다.

그가 휘두르는 주먹에 붉은빛이 맺혔다.

한기훈이 구원자로 각성하고 처음으로 사용하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선보인 적 없는 권능이다.

문제는 싸움을 지켜보는 시현도, 그를 상대하는 정수혁도 한기훈의 권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집중의 일격인가. 그렇다면…….”

정수혁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있는 힘껏 휘두른 한기훈의 주먹이 보호막에 닿으려는 순간, 정수혁이 보호막을 없앴다.

“미친……!”

의도치 않게 허공에 주먹질을 한 한기훈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거기까지가 정수혁의 노림수였다.

“막상 싸워 보니 그 한기훈도 별거 아니군.”

비릿한 미소를 지은 정수혁이 한기훈의 목을 노리며 칼을 휘둘렀다.

지금 상황만 보면 누구라도 정수혁의 승리를 점쳤을 것이다.

하지만 한기훈이 누구인가.

원작에서 주인공의 오른팔로서 이야기의 끝까지 활약을 선보이는 인재다.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진정한 종말이라 불리는 그 시기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예인이의 원수도 못 갚고 뒈질 것 같으냐!”

이를 악문 한기훈이 정수혁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과정에서 팔뚝이 칼에 베이며 피가 흘렀다.

“미친…….”

믿을 수 없다는 듯 붙잡힌 손을 응시하는 정수혁을 향해, 한기훈이 반대쪽 주먹을 뻗었다.

예의 붉은 기운이 실린 집중의 일격이었다.

정통으로 안면에 공격을 허용한 정수혁이 나뒹굴었다.

코뼈가 함몰되어 흉하게 일그러진 코의 양쪽 구멍으로부터 쉴 새 없이 피가 흘렀다.

“으아아아아!”

자신의 피를 본 정수혁은 아이처럼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정수혁은 극도로 흥분했다.

“나, 나는 못 죽어! 내 인생을 다시 써야 하는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죽어!”

발악하던 정수혁이 주머니에서 신혈이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있는 힘껏 내던진 유리병이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유리병에 담긴 신혈을 가지고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고, 자신이 위험에 처한 순간 그것을 사용하리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던 시현은 몸을 던졌다.

유리병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 멋진 슬라이딩으로 안타를 아웃으로 만들어 내는 야구선수처럼 시현은 유리병을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됐다!’

이로써 정수혁의 비장의 수는 봉인했다.

원통해하고 있을 정수혁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린 시현은 경악했다.

‘주사?’

놀랍게도 신혈은 정수혁이 가진 최후의 수가 아니었다.

광인처럼 웃고 있는 정수혁은 검붉은 액체가 담긴 주사를 자신의 팔에 꽂았다.

정체 모를 액체가 바늘을 타고 정수혁의 체내로 삽입되었다.

“으아아아!”

자신의 두툼한 몸을 끌어안은 정수혁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 자식, 제 몸에 뭘 주사한 거야?”

경멸 어린 시선으로 정수혁을 응시하던 한기훈이 끝장을 내기 위해 주먹을 뻗었다.

그의 솥뚜껑만 한 주먹이 정확하게 정수혁의 안면에 꽂혔다.

정수혁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이는 공격을 가한 한기훈이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는지 한기훈은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채 끈적이는 타액을 쏟고 있었다.

“이, 이게. 이게 2레벨 구원자의 힘인가? 크하하하하!”

만능감에 젖어 폭소를 터뜨리는 정수혁의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과 귀에서 피가 흘렀다.

“……2레벨? 아까 주사한 게 원인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조금 전 한기훈의 일격으로부터 정수혁을 보호한 건 외피였다.

구원자의 레벨을 강제로 끌어 올리는 약품이라니.

아주 떠오르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레벨 서포터인가. 원작에서도 언급은 있었지만 한참 나중에나 등장하는 물건인데? 심지어 시간의 부족과 부작용으로 인해 개발이 폐기되는 바람에 단서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걸 참가자 중 누군가가 만들어 낸 건가?’

만약 그렇다면 놀라운 재능이 아닐 수 없다.

원작에 등장하는 극소량의 정보를 토대로 레벨 서포터라 불리는 약품을 만들어 내다니.

분명 현실에서도 천재라 불렸을 것이다.

그런 인물이 어째서 이 게임에 참가했는지, 어째서 정수혁의 편에 서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반드시 정수혁과 그 배후인 이한울을 처리해야 하는 시현으로서는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커헉!”

천만다행히도 완성품은 아닌지 정수혁이 심각한 부작용 증세를 보였다.

피를 토하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본인은 모르는 듯했으나 정수혁은 죽어 가고 있었다.

그를 강인하게 만들어 준 세포는 빠른 속도로 붕괴하고 있었다.

가만히 방치하기만 해도 1시간 내로 죽음에 이를 것이다.

정수혁은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한기훈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정수혁에게 접근한 시현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어어?”

경악한 정수혁이 손목을 빼내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같은 2레벨일 텐데 어째서? 설마 3레벨?”

“그건 아니지만……. 난 두 개의 낙인을 가지고 있거든.”

자신의 여유를 증명하기 위해 시현은 활짝 웃었다.

시현은 2레벨 구원자이지만 가지고 있는 낙인은 두 개다.

낙인은 개화 시 구원자의 신체 능력을 극도로 발달시킨다. 그리고 시현은 두 번 낙인을 개화시켰다.

같은 2레벨이라 해도 차이가 없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성향이 악인 존재를 한정으로 경이로운 능력을 보이는 권능까지.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성인 남성과 초등학생 정도로 힘의 차이가 있었다.

제압하는 건 간단하지만, 한기훈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실래요? 보시다시피 예기치 못한 사고가 있었습니다만.”

시현이 한기훈에게 의견을 구했다.

갈팡질팡하던 한기훈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네 손을 빌려 복수에 성공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

힘없이 내뱉은 한기훈이 압구정역의 입구에 등을 보인 채 쭈그려 앉았다.

머리를 싸매는 행동에서 깊은 좌절감이 엿보였다.

그를 위해서라도 정수혁을 곱게 끝내 준다는 선택지를 뇌리에서 지워 버렸다.

시현은 잡고 있던 정수혁의 손을 놓아줬다.

그러더니 매정하게 한마디를 고했다.

“발버둥 쳐.”

“히익!”

기겁하며 멀어진 정수혁이 권능을 펼쳤다.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두르자 정수혁의 방어막이 유리창처럼 와장창 깨져 버렸다.

“……어?”

정수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흩날리는 방어막 파편을 응시했다.

“더 발버둥 치라고.”

음산한 음성이 귀에 꽂히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두 번째 방어막을 펼쳤다.

하지만 방어막은 생성과 동시에 파괴됐다.

“끝이야?”

“으아아아아!”

새로이 방어막을 형성하는 정수혁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지간히 겁을 먹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주사기를 꽂아 넣을 때 느꼈던 만능감은 오간데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방어막에 손바닥을 얹은 시현이 손끝에 힘을 줬다.

손가락이 방어막을 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대로 방어막을 쥐어뜯으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는 정수혁의 다리 사이가 축축해졌다.

“바, 방어……. 우웨에에엑!”

새로이 권능을 사용하려던 정수혁이 구토를 시작했다.

과도한 권능의 남발로 인해 정신력이 고갈된 것이다.

그는 달아나려 했으나 현기증으로 인해 재차 주저앉고 말았다.

몸을 떨고 있는 건 비단 추위나 피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 살려 줘. 제발 부탁이야.”

급기야 무릎까지 꿇고 빌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 땀 등 온갖 분비물을 흘려 대는 몰골이 추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는 시현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나는 아무 잘못 없어. 애초에 한씨 남매가 내 말을 듣지 않은 게 잘못이라고!”

“…….”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우리는 주인공이야. 이 소설의 주역이라고! 그런데 고작 NPC 따위가…….”

빠직.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기에, 정수혁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줬다.

시현의 다리가 손등을 짓밟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손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끄아아아아!”

뒤를 이어 파도처럼 찾아온 고통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눈물을 쏟으며 잘못을 빌기도 했다.

그러나 시현은 멈추지 않았고, 달아나려 바닥을 기는 정수혁의 다리를 짓밟았다.

만족하지 못하고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다른 쪽 다리까지 으스러뜨려 놓았다.

이길 수 없다. 무슨 수를 사용하더라도 눈앞의 남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 판단한 정수혁은 과도한 고통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시현은 정수혁을 조금도 편하게 해 줄 생각이 없었다.

“일어나.”

시현은 정수혁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커허어억!”

강제적으로 정신을 차린 정수혁은 공포에 떨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느끼는 공포감을 더욱 배가시키기 위해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춘 시현이 슬그머니 웃었다.

악마의 미소가 저러할까.

정수혁은 졸도했다.

* * *

원작보다 몇 배는 빠르게 마트의 세력을 형성하고, 그곳을 지배하던 정수혁이 죽었다.

수십에 달하는 사람들을 이끌던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허무하고 추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리더를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마트를 제압해 수중에 넣을 때다.

당연하지만 가장 선두에 서야 할 인물은 정수혁을 처리한 시현이어야 한다.

문제는 시현이 마트를 제압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의 흥미는 눈앞의 붉은 문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참가자 정수혁의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정수혁의 Re write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정수혁이 소지하고 있던 토큰 36개를 노획합니다.>

시현이 직접적으로 얻은 이익은 두 가지나 됐다.

한 번에 36개나 되는 토큰을 얻은 것은 어깨춤이라도 출 만큼 기쁜 일이다.

하지만 토큰보다 더 관심 가는 항목이 있었다.

‘정수혁의 Re write를 열람할 수 있다고?’

참가자들은 모두 저마다의 소설을 작성하고 있었다.

시현도 그랬고, 정수혁도 그랬다.

시스템 상 다른 사람의 소설은 열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정수혁이 죽은 지금 시현에게는 그의 소설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줬던 행보가 거기에 담겨 있을 것이다.

열어 보지 않고 배길 리가 없었다.

시현은 붉은 문자를 조작해 정수혁의 Re write를 열람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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