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날이 밝기가 무섭게 정수혁이 찾아왔다.
“크흠,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그냥 아침 인사를 하러 온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눈동자가 쉬지 않고 시현을 훔쳐보고 있었다.
어젯밤 대화를 엿들었기에 정수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계속 지켜보면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에 시현은 필사적으로 슬픈 기억을 떠올렸다.
다행히도 그의 인생은 슬픈 일이 많았기에 금세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다시는 되찾지 못할 30억 같은 거 말이다.
‘오래 끌어 봐야 좋을 거 없지.’
대충 던져 두었던 짐을 챙긴 시현이 정수혁에게 접근했다.
어떻게 말을 붙일까 망설이고 있던 찰나 시현이 먼저 다가와 주니, 정수혁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신세를 졌습니다. 이제 떠나 볼까 합니다.”
“지금 떠나신다고요?”
이어지는 시현의 통보에 그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했다.
원작에서 정훈의 발목을 붙잡는 건 한씨 남매였다.
그러나 지금 마트에는 한씨 남매가 없다. 그렇기에 정수혁은 어떻게 시현을 붙잡으면 좋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시현은 미끼를 던졌다.
“그래도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받았는데 그냥 떠날 수도 없고. 제가 무언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그, 그렇다면 하나 부탁을 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어지간히 급했던 정수혁은 생각도 하지 않고 미끼를 물었다.
완벽하게 참지 못한 시현은 아주 살짝 웃고 말았다.
“네, 말씀하시죠.”
다행히도 정수혁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제가 오늘 만나 봐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 조금 위험합니다. 구원자라 하셨으니, 제 호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호위라…….”
오른손으로 입가를 가린 시현이 표정을 구겼다.
원하는 대답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고민하는 모습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망설이는 척, 끝에 시현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애태우던 정수혁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금방 준비를 해 오겠습니다. 주차장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는 부리나케 자신의 개인실로 향했다.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지금쯤 정수혁은 어제 이야기를 나눈 남성에게 엄청난 기세로 무전을 치고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성공적으로 약속을 잡았는지 주차장으로 접근해 오는 정수혁의 표정은 굉장히 밝았다.
두 사람은 제대로 굴러가는지 의심이 가는 낡은 차에 탑승했다.
정수혁이 운전을 할 줄 몰랐기에 자연히 운전대는 시현이 잡게 되었다.
“아이고, 호위뿐 아니라 운전까지 맡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상관없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시현이 액셀을 밟았다.
한차례 덜컹거린 차가 불안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수혁은 목적지가 정확히 어디인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교차로가 나올 때마다 어디로 가라고 안내했다.
그렇게 정수혁의 지시를 따라 달리는 길은 소름이 끼칠 만큼 익숙했다.
“도착했습니다. 차를 세워 주시겠습니까?”
“차를 세우라니……. 여기서 말씀이십니까?”
요청대로 브레이크를 밟은 시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줬다.
길이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LT쇼핑몰이었으니까.
“마침 오는군요.”
상체를 내민 정수혁이 손을 흔들었다.
무언가를 해내고 으스대는 살찐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안 좋아졌다.
저 멀리, LT쇼핑몰 입구에서 세 명의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익숙한 얼굴에, 이가 갈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어찌 저들의 얼굴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꿈에서도 잊어본 적 없는 얼굴이다.
‘이한울…….’
시현이 생명의 탑에서 만난, 신혈을 사용하는 참가자.
테스트라는 이유로 중형 악마인 머리지네를 불러들여 생존자들을 몰살시키고 끝내는 이서윤을 죽게 만든 남자.
그가 눈앞에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반드시 그날의 원한을 갚아 주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속에 용암이라도 들어앉은 듯 화가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이한울의 목에 칼을 꽂아 넣고 싶었다.
그런 시현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이한울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정수혁 씨, 아까 무전으로 한 그 거짓말. 진짜야?”
“거짓말이라니,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십니까.”
정수혁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렇잖아. 2주는 달라던 인간이 하루 만에 결과를 내보였으니 의심을 해 봐야지.”
“이게 제 실력입니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이한울은 정훈의 모습을 모방하고 있는 시현을 흥미롭다는 듯 훑었다.
그러다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한울이라고 합니다.”
“…….”
무방비하다.
지금의 이한울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의 심장을 도려내는 게 가능하다.
그의 숨통을 끊어 낼 수 있다.
손이 근질거렸고, 본능이 속삭였다.
당장 눈앞의 악마를 죽여 버리라고.
이자프의 권능 또한 이한울을 처단해야 할 악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이 속삭였다. 지금은 인내해야 할 때라고.
‘어차피 이한울의 심장을 도려낸다 해도 이설아가 권능으로 시간을 되돌릴 거야. 이한울을 죽이려면 먼저 이설아를 처리해야 해.’
그러나 이설아를 처리한다 해도 문제다.
남아 있는 이한울과 남지후.
거기에 정수혁까지.
기습으로 하나를 죽이고 시작해도 무려 세 명의 구원자와 싸워야 한다.
아무리 시현이 외피를 가진 2레벨 구원자라지만 위험한 싸움이다.
더군다나 눈앞의 3인이 아직까지 2레벨에 도달하지 못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예정에 없던 만남인지라 정보가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참아야 할 때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서윤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음……. 사람 참 무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네.”
이한울이 멋쩍게 웃으며 내밀었던 손을 회수했다.
내리깐 눈으로 시현을 응시하는 눈빛이 그리 곱지는 않다.
“손을 다치신 분한테 악수를 청하니, 당연히 거절당하지.”
이한울을 밀어내고 이설아가 다가와 시현의 손을 잡았다.
어찌나 주먹을 강하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눈이 마주치자 슬쩍 웃은 그녀가 권능을 사용했다.
“역행.”
기묘한 감각과 함께 시현의 손바닥 위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흘렸던 피가 상처로 되돌아가더니 벌어졌던 상차가 다시 붙었다.
“감사합니다. 굉장한 능력을 가진 구원자셨군요.”
“별말씀을.”
마음에도 없는 감사의 말이 그리도 기뻤는지 이설아는 환하게 웃었다.
그걸 보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고 판단했는지 이한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정훈 씨, 혹시 앞으로 예정이 없으시면…….”
“이한울 씨! 제가 부탁한 물건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가만히 지켜보던 정수혁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런 정수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한울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한숨을 토한 이한울은 제대로 정수혁을 상대해 주었다.
“그런데 정수혁 씨, 당신이 홧김에 저지른 일 때문에 한예인이 죽은 거 알고 있어?”
“네? 그게 무슨…….”
“할 수 있다고, 맡겨만 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신혈을 줬는데. 그걸 이용해서 한다는 게 고작 한예인을 죽게 만드는 일이라니. 실망이 커.”
여전히 이한울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 속에 감춰진 적개심이 상당했다.
오늘 처음으로 한예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정수혁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한예인이 죽다니……. 제가 조금 심술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 한예인이 죽을 리가 없잖아요.”
“죽었어. 계속 마트를 감시하던 남지후가 확인까지 마쳤어.”
이한울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언제 뽑아 든 것일까.
예리한 주머니칼이 정수혁의 목덜미에 들이밀어졌다.
“굉장히 후회돼. 그때 아저씨와 협상을 하는 게 아니었어. 아저씨를 믿고 마트를 맡겨 두는 게 아니라, 아저씨를 죽이고 마트를 우리가 차지해야 했어.”
“…….”
“우린 마트 따위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어. TO는 열 개지만, 거기에 누굴 넣을지 판단하는 건 나야.”
정수혁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었다.
그는 명백하게 눈앞에 있는 이한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풍만한 몸 전체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안타깝기까지 한 모양새다.
그래도 정수혁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한울은 새빨간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정수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웃으며 정수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애완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아무래도 정훈 씨가 나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정수혁 씨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어.”
마지막 경고를 남긴 이한울이 정수혁을 밀어냈다.
겨우 이한울에게서 벗어난 정수혁은 애써 웃으며 시현에게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정수혁의 턱이 격하게 떨리고 있는 게 추위 때문만은 아니리라.
“정훈 씨가 계셔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트에 머무르며 앞으로도 도움을 좀 주신다면……. 물론 그에 따른 보수는 얼마든지 마련하겠습니다.”
“바람이 차니 일단 돌아가시죠. 가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현이 운전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긍정적인 답을 얻은 정수혁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언제 공포에 떨었냐는 듯, 원하는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말이다.
시동을 걸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이한울이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차후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네, 반드시 다시 만나죠.”
무사히 보내 주는 건 오늘만이다.
설사 이한울이 싫다 해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힘이,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했다.
* * *
마트로 복귀하는 차 안에는 짙은 침묵이 깔려 있었다.
“저……. 정훈 씨?”
어떻게든 시현과 친해져야 하는 정수혁이 계속해서 말을 붙였으나 시현은 철저히 무시로 일관했다.
결국 정수혁도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시현이 결국 침묵을 깨뜨렸다.
“내려.”
“……네?”
갑작스러운 반말과 섬뜩한 목소리, 싸늘한 눈빛에 놀란 정수혁이 되물었다.
그리고 당황해서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도 안식처인 LT마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압구정역 1번 출구임을 나타내는 표지판만이 꺾인 채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정수혁이 움직일 기미가 없자 시현이 한숨을 쉬며 운전석에서 내렸다.
한 바퀴 돌아 조수석 문을 연 시현은 정수혁의 뒷덜미를 잡고 강하게 당겼다.
“으억!”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지른 정수혁이 바닥을 굴렀다.
코를 부딪쳤는지 코피를 철철 흘리는 그의 두 눈에 분노가 담겼다.
“정훈 씨!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실 거짓말을 하나 했는데, 난 정훈이 아니야.”
시현은 진심을 담아 웃었다.
시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수혁에게 신혈을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것.
목적을 이루었으니 굳이 피곤하게 정훈을 연기해 가며 정수혁을 속일 필요가 없어졌다.
두르고 있던 권능을 해제한 시현은 본래의 얼굴을 되찾았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정수혁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너는 윤시현……. 설마 너 구원자였냐!”
“게다가 참가자이기도 하지.”
정수혁의 눈동자가 이미 한계까지 확장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커질 여유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정수혁은 눈동자가 빠져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사과가 들어갈 만큼 쩍 벌어진 입의 크기는 정수혁이 느끼는 감정을 대변해 주었다.
“마, 말도 안 돼. 아니, 그렇다면 정훈은 어디에?”
“그야 나도 모르지. 나도 한 번 만나 보고 싶기는 하네.”
어깨를 으쓱이는 시현의 너스레에 정수혁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마도 정수혁은 목표 달성이 코앞에 있다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속임수였다는 걸 깨달았는데, 어찌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빌어먹을 자식! 대체 왜 나를 속인 건데! 무슨 원한이 있다고!”
“네가 한예인을 죽였잖아. 나 역시 한씨 남매의 영입을 노리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다 말아먹었어. 이걸 어떻게 책임져 줄 건데.”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노려보자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어떻게든 이 장소에서 벗어나려 머리를 굴리는 게 훤히 보였다.
그는 시현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같은 구원자임에도 말이다.
며칠 전 무력으로 생존자들을 위협하던 강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구원자와 생존자 간의 싸움은 구원자의 압승으로 끝이 난다.
애초에 싸움이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구원자와 구원자의 싸움은 피지컬과 권능의 상극, 이해, 그리고 센스 따위로 결정된다.
정수혁은 이길 수 있는 싸움만을 원했다.
다른 생존자들이 목숨을 걸고 포박한 악마의 숨통을 끊어 놓기만 하면 되는, 그런 편한 싸움 말이다.
반대로 자신이 조금이라도 상처 입을 가능성이 있는 싸움은 극도로 두려워했다.
“내, 내가 안 했어! 나한테 악마를 끌어들이는 능력 따위는 없다고!”
그는 비열한 거짓말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퍼억!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다 판단한 시현이 정수혁을 걷어찼다.
“꾸에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정수혁의 비대한 몸이 한참을 굴러 울타리에 부딪쳤다.
“말했잖아. 나 역시 너와 같은 참가자라고. 네가 이한울에게 받은 신혈을 사용해서 악마들을 불러 모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정수혁은 믿기 힘들다는 듯 떨고 있었다.
“이 힘, 말도 안 돼……. 설마 2레벨 구원자?”
“…….”
시현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한 긍정을 드러내는 법이다. 바로 지금처럼.
“아직 각성을 마친 생존자도 많지 않은 마당에 2레벨이라니, 그게 가능한 거냐고!”
그렇지 않아도 저조하던 정수혁의 투쟁심이 완전히 바닥을 쳤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지하철역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어딜 가시려고.”
지금 이 순간만 벼르고 있던 한기훈이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