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오…… 빛난다.”
맥 빠지는 이나연의 감상대로 한기훈의 낙인이 빛을 발했다.
원작의 주인공 정훈이 가장 신뢰했고, 최후의 순간까지 정훈과 함께 싸웠던 구원자가 드디어 각성한 것이다.
낙인에서 뿜어지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기훈은 자신의 신체에 일어난 변화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손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다가 있는 힘껏 검은 늑대의 사체를 가격했다.
그 단단하던 두개골이 함몰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인간을 초월했음을 자각했다.
“어때, 시현아. 네가 건 조건은 달성했어. 이제 내 손으로 예인이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거지?”
나지막한 음성에서는 희열이 느껴졌고, 주체 못 할 만능감 또한 함께하고 있었다.
구원자가 되기 전부터 한기훈의 신체 능력은 남달랐으니까,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할 것이다.
“흐음…….”
시현은 고민했다.
그가 보기에 한기훈이 구원자로서의 신체 능력이나 권능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급증한 힘을 섬세하게 다루는 방법, 권능의 사용법, 정신력의 한계 등 익숙해져야 할 것이 산처럼 많다.
하지만 동생의 복수에 눈이 뒤집힌 한기훈이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알겠습니다.”
고민 끝에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선택은 한기훈의 몫이다.
불안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건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남은 건 구상해 둔 작전을 시행하는 것뿐이다.
* * *
해가 저물 무렵, 예정대로 작전이 시행되었다.
시현은 연기자의 권능을 사용했다.
<연기를 시작합니다. 연기 대상 : 정훈>
그의 변화는 조용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어디 보자.”
폐차의 백미러에 얼굴을 비춰 본 시현은 만족스러웠다.
그곳에 비친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무어라 특징짓기도 힘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변한 것은 비단 얼굴뿐만이 아니다. 골격, 살집, 근육량,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이게 원작의 주인공. 정훈의 얼굴이라 이거지…….’
왠지 모를 감개무량함에 시현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역시 수많은 세력들을 안에서부터 붕괴시킨 최고의 빌런 정해수의 권능다웠다.
갑자기 지독한 두통이 그를 덮쳤다.
“……크흑.”
시현은 신음이 새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았다.
무려 다섯 배에 달하는 소모 값으로 인해 그의 정신이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생기 넘치는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며칠 밤을 새운 것처럼 피폐한 몰골만이 남았다.
‘차라리 잘 됐어.’
원작대로라면 지금의 정훈은 양친의 죽음을 확인하고 정신적으로 몰려 있을 시기다.
생기발랄한 모습보다는 지금처럼 죽기 직전의 몰골이 정수혁을 속이는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시현은 걸음을 내딛었다.
멀리 보이던 LT마트의 후문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후문 주차장의 폐차 뒤에 교묘하게 몸을 숨긴 시현은 내부의 상황을 살폈다.
슬슬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판단한 건지 악마들이 짓밟고 지나간 1층을 몇몇 생존자들이 수복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정수혁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민성찬이 있었다.
“빨리 움직여! 특히 핏자국은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청소하라는 리더의 명령이 있었다. 우리가 먹은 만큼 일하자고.”
민성찬은 생존자들을 진두지휘하며 악마로 인해 무너진 잔해를 치우거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정수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겁쟁이가 밖으로 돌아다닐 리가 없으니, 필시 2층의 가장 구석지고 안전한 곳에서 게으름을 부리고 있을 것이다.
그를 끌어내기 위해 달리 특별한 수단은 필요치 않다.
그저 한마디만 해 주면 스스로가 버선발로 뛰쳐나올 것이다.
저벅.
“누, 누구냐!”
일부러 낸 발소리에 놀란 민성찬이 무기를 들었다.
권력자 옆에 붙어서 입만 산 남자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감이 좋다.
악마가 나타난 걸까 싶었는지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는 폐차 사이에서 등장한 게 악마가 아니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거기 멈춰. 안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손님을 받지 않는다.”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괴물들에게 쫓기느라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습니다.”
내뱉는 목소리는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침울해질 정도였기에 민성찬이 움찔거렸다.
가끔 근처에만 있어도 주변 사람들을 우울하게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지금의 시현이 딱 그랬다.
“거참, 안 된다니까 그러네. 우린 지금 식량도, 물도 부족한 상태라고.”
“식량이나 물은 저도 가진 게 많지 않아 나눠 드릴 수 없지만…….”
시현은 발에 치이는 주먹만 한 콘크리트 파편을 주워들었다.
그러곤 힘을 주자 콘크리트 파편은 작은 부스러기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민성찬의 턱이 빠질 듯 벌어졌다.
“무력으로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신세 지는 동안에는 힘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미친. 어떻게 돼먹은 괴력이야? 아니, 설마 리더랑 같은……. 자, 잠깐 기다려 봐!”
대기를 요청한 민성찬이 부리나케 마트 안으로 달려갔다.
어찌나 급했는지 도중에 몇 번이고 바닥을 굴렀다.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으니 정수혁에게 보고를 하러 간 것이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반응이 있었다.
제가 두른 지방만큼이나 두툼하게 옷을 껴입은 정수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달리 정수혁은 굉장히 긴장한 상태였다. 동시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기도 했다.
“그쪽도 구원자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신세를 지고 싶으시다고요.”
“부탁드립니다.”
“저희 세력에 구원자가 늘어나는 건 저 역시 환영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 아시다시피 아무나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쪽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정훈이라고 합니다.”
“……!”
이는 마트에 자리 잡은 정수혁이 간절하게 바라던 이름이었을 것이다.
정수혁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그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동그란 얼굴에 기쁨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 그렇군요. 정훈…… 정훈이란 말씀이시죠?”
“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있나요. 아하하하!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뭣하니 안으로 들어오시죠!”
정수혁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정중하게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거래처의 높으신 분을 만나는 말단 영업 사원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윤시현의 이름을 댔을 때와 정반대되는 극진한 대우다.
오죽했으면 정수혁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민성찬이 제 두 눈을 의심했을 정도다.
“자자, 이쪽으로 오시죠.”
정수혁은 시현을 2층으로 안내했다.
“자리는 이쪽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라고 판단한 걸까.
그가 안내해 준 자리는 시현이 사용하고 있던 그 자리였다.
기막힌 우연에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건가 싶어 움찔하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면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정수혁이 슬며시 운을 뗐다.
물론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뽑아내야 하니까.
그러나 지금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원작의 정훈을 연기해야 한다.
악마에게 동료들과 친구를 잃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정훈을.
“죄송합니다만 내일로 미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먼 길을 와서 피곤하군요.”
시현은 최대한 음울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당장이라도 옥상에서 뛰어내릴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누군가를 연기하는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다.
혹시 들키는 건 아닐까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런 시현의 노력 덕분인지 정수혁은 조금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많이 피곤하실 거 같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제야 원작의 전개를 떠올린 정수혁이 적극적인 어프로치를 멈췄다.
말이 많다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면 편히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한 정수혁이 멀어졌다.
혼자 남겨진 시현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리고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는 문제없어. 중요한 건 이제부터인데…….’
정훈의 모습을 한 채 마트에 잠입하는 건 어디까지나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미 반이나 목적을 달성한 시현은 내일 일도 순조롭게 잘 풀어 나가리라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 * *
늦은 밤, 살며시 눈을 뜬 시현은 문득 생각했다.
‘귀찮아’라고.
시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수혁에게 신혈을 제공한 이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를 위해 세운 계획은 다음과 같다.
정훈의 겉모습을 모방해 마트에 숨어들어 정수혁으로부터 신뢰를 산다.
그런 후, 그 신뢰를 적극 활용해 신혈의 획득 방법을 알아낸다.
간단하지만 성공률은 지극히 높은 작전이었다. 그만큼 정훈이라는 이름이 갖는 파급력은 컸다.
일정은 대충 4일에서 1주일 사이로 잡고 있었다.
하지만 고요함 속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억울한 감이 있었다.
‘고작 정수혁 따위에게 귀중한 시간을 1주일 가까이 뺏겨야 한다니.’
암만 생각해 봐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
시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조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시간을 단축시켜야겠어.’
그러곤 주변을 살폈다.
밤이 내린 마트 내부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다.
생존자들의 대부분이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악마의 침입을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그조차도 경계 범위는 1층에서 외부 주차장까지다.
즉, 2층에 한해서는 경계를 서는 생존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돌아다니는 게 가능했다.
물론 잠들어 있는 생존자들을 깨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신발까지 벗은 시현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그렇게 마트의 최심부에 있는 정수혁의 개인실로 향했다.
‘정수혁에게 신혈을 제공한 사람의 정보가 마트에 남아 있다면, 분명 정수혁의 개인실 어딘가에 있을 거야.’
만약 개인실에서 신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만 있다면 굳이 귀찮게 정수혁이 신뢰를 사느라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없어진다.
부디 정수혁에 관련된 정보를 가지고 있기를 바라며, 시현은 개인실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시현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자정이 넘었는데 아직도 잠들지 않은 건지 정수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벌써 마트에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다른 참가자 때문에 원작이 뒤틀렸겠죠 뭐.”
정수혁은 흥분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누구와 대화하는 거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현은 기둥 뒤에 절묘하게 몸을 숨겼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내밀어 개인실 내부를 확인했다.
작은 촛불 하나로 밝혀 놓은 방 안의 침대에 앉아 있는 정수혁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정수혁과 대화 중이던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시현은 정수혁이 무전기를 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까지 시간을 줘야 하는데.]
기계음 섞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공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주인공 보정이라도 받는 걸까.
아무래도 황금 같은 타이밍에 방문한 모양이다.
시현은 두 남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못 해도 2주는 줘야 합니다.”
[늦어. 그때면 다른 참가자 놈들도 하나둘 마트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할 거야.]
“저를 한번 믿어 주세요. 반드시 정훈의 호감을 사서 그를 저희 팀으로 영입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할게. 나는 네가 정훈의 호감을 살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아.]
필터링이 전혀 없는 화법에 정수혁은 침묵했다.
거울에 비친 정수혁의 표정은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가관이었지만, 그는 참았다.
“결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결과? 결과아아아? 제 성질 못 죽여서 한씨 남매와 척을 진 놈이 결과로 보여 준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그걸 어떻게……. 설마 지금까지 감시하고 계셨던 겁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리가 널 어떻게 믿겠어. 악마와 싸우는 게 무서워서 마트 안에만 처박혀 있는 널.]
“그, 그래도 한 번만 더 믿어 주세요. 계획이 있습니다. 신혈을 한 병만 더 보내 주신다면…….”
드디어 시현이 원하는 단어가 정수혁의 입에서 나왔다. 예상대로.
정수혁과 대화 중인 무전기 너머의 남성이 마트의 1층에 뿌려진 신혈의 공급자였다.
[하다못해 정훈의 얼굴을 한 번 봐야겠어. 네가 우리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정훈이라면 저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생존자들을 경계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날짜는 최대한 빠르게 잡아 줬으면 좋겠군.]
그 말을 끝으로 무전기가 침묵했다.
무전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정수혁은 한숨과 함께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다 분을 이기지 못한 건지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이 어린놈의 새끼가!”
“…….”
새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는 정수혁을 지켜보던 시현은 살그머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이다.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렸다.
‘그렇단 말이지…….’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