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넓은 쇼핑몰 내부에는 불투명한 흙탕물이 가득했다.
“이래서 여기에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이 탁한 물속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한기훈이 질색하며 말했다.
물의 깊이는 장신인 한기훈의 무릎에 닿을 정도다.
악마 중에는 물속에서 살아가는 놈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 정도로 탁한 물은 놈들이 모습을 숨기고 있기에 제격인 장소다.
“내가 앞장설 테니 두 사람은 조심해서 따라와.”
물러날 생각은 없는지 한기훈이 앞장서서 물로 들어갔다.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시현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를 따라 신발을 벗기 시작하는 이나연을 시현이 만류했다.
“물속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신발을 벗어? 그러다 큰일 난다.”
불투명한 물속에는 아포칼립스 당시 만들어진 잔해 따위가 숨어 있다.
맨발로 걷다가는 십중팔구 상처가 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더러운 물에 우글거리는 세균도 고려해야 한다.
구원자인 시현이야 축복으로 인해 날카로운 유리도, 세균도 걱정할 것 없다지만, 아직 각성하지 못한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멸망한 세상에서 생존자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질병이다.
“오빠는요?”
“나는 구원자. 그것도 2레벨. 외피 보유.”
“사기야. 치사해. 저도 각성시켜 줘요.”
시현을 바라보는 이나연의 시선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준비를 마친 시현이 먼저 물에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물은 미지근했으며, 감촉도 그리 좋지 못했다.
신발을 신고 뒤따라 물에 들어간 이나연은 울상이 되었다.
“이거 발에서 냄새 엄청 나겠죠?”
“응, 오늘은 조금 멀리 떨어져서 잤으면 좋겠어.”
“씨이, 괜히 따라온다고 했나 봐.”
그녀는 훌쩍이면서도 주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두에 선 한기훈이 손전등으로 어둠을 밝혔다.
하지만 탁한 물속은 밝아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악마가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눈으로 봤을 때는 이미 늦어.’
시현은 시각보다 청각에 집중했다.
세 사람이 내는 물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를 잡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2레벨 구원자가 되며 증폭된 감각은 아주 희미하게 들려온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풍덩.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무언가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잠깐.”
시현의 지시에 이나연은 바로 걸음을 멈췄다.
몇 걸음을 더 나아가던 한기훈도 두 사람이 따라오지 않자 멈춰 섰다.
“대체 무슨 일인…….”
한기훈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시현은 물속을 향해 식칼을 내리꽂았다.
[키에에엑!]
비명 소리가 울리며 물보라가 솟구쳤다.
탁하던 물에 붉은 액체가 퍼졌다.
손끝에서 거센 저항이 느껴졌으나 시현은 오히려 더욱 힘을 가해 칼을 내리눌렀다.
저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손잡이를 타고 느껴지던 저항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한 시현이 식칼을 들어 올렸다.
가벼운 무게감과 함께 무언가가 딸려 왔다.
“으엑.”
이나연이 질색하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딸려 나온 게 끔찍한 외견의 물고기였기 때문이다.
농구공만 한 크기에 오물 같은 점막이 전신을 두르고 있으며, 머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알은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몸통에 붙어 있는 짧은 팔다리는 설치류의 것을 닮았다.
크게 벌어진 입안에 엿보이는 이는 사람의 것을 떠올리게 했다.
물고기라기보다는 실험이나 방사능 오염을 통해 만들어진 끔찍한 혼종 돌연 변이에 가까운 모습이다.
“깜짝 놀랐네. 시현이 너 어디 야생에서 살다 왔냐? 철수를 간단하게 때려눕히기에 예사 놈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한기훈은 감탄했다.
그리고 시현의 감각이 짐승에 가깝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미리 악마의 접근을 알고 대처했다고는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났거든요.”
그렇게 말한 시현은 손전등을 이용해 물속이 아닌 쇼핑몰의 천장을 비췄다.
“…….”
“…….”
빛에 의해 드러난 광경에 한기훈과 이나연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천장에는 시현이 죽인 물고기 악마의 동족들이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다.
대충 봐도 족히 100은 넘어 보였다.
그 중 열심히 머리를 돌려 대던 악마 하나가 일행을 발견하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더니 빠른 속도로 헤엄쳐 왔다.
[키에에엑!]
악마가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악마의 접근을 알고 있다면 대처 역시 가능하다.
빠악!
타이밍을 맞춰 휘두른 이나연의 야구 방망이가 악마를 정확하게 때렸다.
악마는 저 멀리 날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야, 장외 홈런이네.”
장난스럽게 웃은 한기훈이 박수를 쳤다.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겁을 먹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한기훈의 턱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일단 물이 없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물고기 악마의 힘은 약하지만 그것들이 모이고 모이면 무시할 수 없는 위험으로 둔갑하게 된다.
일행의 포지션이 조금 바뀌었다.
두 사람은 군소리 없이 앞장서 걷는 시현의 뒤를 따랐다.
도중에 무언가에 뜯어 먹힌 흔적이 역력한, 물을 먹어 퉁퉁 불은 시체를 발견했다.
누구도 시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눈빛에 두려움이 맺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쇼핑몰 내부가 전부 물에 잠겨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1층을 제외하면 물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2층에 진입한 일행은 본격적으로 물자의 탐사를 시작했다.
“쩝……. 이거 비싸서 꿈도 못 꾸던 게임기인데. 여기 있는 그래픽 카드는 출시한 지 얼마 안 되는 신형이잖아!”
전자 제품 코너에서 한기훈은 아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 입맛을 다셨다.
부모를 따라 온 쇼핑에서 원하는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게임기를 꼭 끌어안고 있는 게 덩치에 어울리지 않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지금, 게임기를 포함한 전자 제품은 의미 없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걸 알기에 한기훈은 눈물을 삼키며 게임기를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반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일까.
이나연은 의복 코너에서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이것도, 저것도 예쁘고 귀여워…….”
전자 제품과 달리 옷은 전기가 없다고 사용하지 못하는 물품이 아니다.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나연이 선뜻 옷가지에 손을 내밀지 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옷들이 활동성보다는 착용자의 아름다움을 부각시켜 주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꾀죄죄한 얼굴에 예쁜 옷을 걸친다 해도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악마와 싸워야 하는데, 치마나 굽이 높은 구두 같은 경우는 방해만 될 뿐이다.
두 남녀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행은 식품 코너에 도착했다.
“으엑.”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코를 막았다.
식품 코너에서 역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가 모조리 끊긴 까닭에 식품이 상하며 발생하는 냄새였다.
그나마 겨울이라 기온이 낮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접근조차 꺼려졌을 것이다.
“그래도 멀쩡해 보이는 것들이 많아서 다행이야. 자, 각자 흩어져서 가방에 먹을 걸 가득 넣어 오자고.”
가장 신이 난 한기훈이 앞서 달려 나갔다.
남겨진 시현도 이나연에게 준비한 가방 하나를 넘겼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지르고. 긴장 풀지 마. 뭐가 숨어 있을지 몰라.”
“넵! 조심할게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이나연은 과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과자를 좋아하는 건지 그 뒷모습이 퍽 활기차 보였다.
‘야채류는 농사를 짓기 전까지는 구하기 힘드니까, 될 수 있으면 확보해 두고 싶어.’
시현은 야채와 과일 코너에서 제법 긴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투자한 시간에 비해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기껏해야 썩지 않은 구황 작물 몇 개를 건졌을 뿐이다.
“아, 복숭아 먹고 싶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시던 시현의 귓가에 이나연의 비명이 꽂혀 들었다.
“……!”
시현은 들고 있던 가방을 내던지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달렸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수의 악마인가? 아니면 다른 생존자?’
뭐가 되었건 아직 각성하지 못한 이나연에게는 위협적이었다.
“시현아!”
가는 도중에 한기훈과 합류할 수 있었다.
비명을 듣고 놀란 건 매한가지인 듯 표정에 다급함이 엿보였다.
더욱 속도를 높인 두 사람은 이나연의 비명이 들려온 장소에 도착했다.
“어? 두 사람, 왜 그렇게 표정이 험악해요?”
“……?”
걱정과 달리 이나연은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주변에 악마나 다른 생존자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왜 소리를 지른 거야? 장난이었다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설마 장난이었겠어요? 제가 엄청난 걸 발견했거든요. 빨리 이쪽으로 와 봐요.”
시현은 이나연을 따라 쓰러져 있는 진열대 너머로 들어섰다.
슬쩍 둘러본 시현은 여기가 초밥을 판매하는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서, 시현은 이나연이 비명을 지른 원인을 목격했다.
“…….”
시현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우아아아아!”
한기훈은 함성을 내질렀다.
가장 안쪽에 있는 상당한 규모의 수조.
그 안에 몇 마리인가 물고기가 살아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꽤 오래 굶었을 텐데 상당히 통통하네. 누군가 성심성의껏 돌본 것처럼.’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육류는 가장 빨리 상하기 때문에 구하기가 쉽지 않다.
비록 눈앞에 있는 게 생선이기는 하지만 굉장히 만나 보기 힘든 신선한 고기라는 건 변함이 없다.
“오늘은 파티다!”
“와아!”
소풍 전날의 아이처럼 들뜬 한기훈이 소리를 지르고 이나연이 화답했다.
시현도 함께 웃었다.
오늘은 제법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곧바로 돌아가서 모두와 생선을 나눌 거라던 예상과 달리, 한기훈은 그 자리에서 식사 준비를 했다.
“확보한 식량을 가장 먼저 맛본다. 그 정도 메리트도 없으면 누가 식량을 구하러 위험한 밖을 나다니겠어?”
“그거 참 마음에 드는 수칙이군요.”
마트 내를 돌아다닌 한기훈이 휴대용 버너를 가져오자 기다렸다는 듯 이나연이 기타 요리 도구를 가져왔다.
시현은 사용할 수 있는 조미료를 챙겨 왔다.
누가 정해 준 것도 아닌데 너무도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이었다.
식욕은 인간을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요리는 누가 하죠?”
시현의 질문에 한기훈은 슬그머니 이나연에게 시선을 줬다.
자신이 요리할 수 없음을 알림과 동시에 그녀에게 기대를 걸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게요. 누가 하죠?”
그녀 역시 슬그머니 시현에게 시선을 줬다.
이로써 두 사람 모두 요리와 친하지 않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좋아. 오랜만에 실력 좀 발휘해 볼까.”
자신만만하게 웃은 시현이 식칼을 꺼내 쥐자 두 사람의 안색이 단번에 환해졌다.
자취를 시작한 이후 시현은 제 먹을 것을 스스로 준비해야만 했다.
때문에 일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요리 실력은 어지간한 가정주부 수준이다.
시현이 요리를 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상황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시현은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생선 요리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와……. 오빠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거 칭찬이냐?”
“그럼요. 최상급 칭찬이에요.”
별이라도 박아 놓은 듯 이나연의 눈이 빛났다.
“먹어도 돼요?”
“얼마든지.”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나연과 한기훈의 젓가락이 요리 냄비로 쇄도했다.
제법 큼지막하던 생선은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 보는 식사다운 식사인 줄 모르겠네. 밥이 있었으면 두 그릇……. 아니, 세 그릇은 뚝딱 해치웠을 거야.”
감동의 눈물을 훔친 한기훈은 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맛있어……. 너무 맛있어요.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생선 요리는 처음 먹어 봐요.”
이나연은 생선의 뼈까지 씹어 삼킬 기세로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 시현의 요리 솜씨가 그 정도까지 뛰어나지는 않다.
그러나 며칠 동안 통조림으로 식사를 해결해 온 이나연에게는 최고급 호텔 주방장이 내놓은 요리보다 혀를 즐겁게 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시현은 웃고 말았다.
자신이 만든 요리를 이토록 맛있게 먹어 주니 만든 사람으로서 보람이 느껴졌다.
시현도 본격적으로 생선 요리를 즐겼다.
아무래도 환경적으로 열악해서 그런지 집에서 해 먹던 것보다 맛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동이 느껴졌다.
하얀 쌀밥이 너무도 그리웠다.
“정말 잘 먹었어요.”
결국 세 사람이 냄비를 싹 비우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족한 듯 배를 두드리던 이나연이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해 왔다.
그 순간.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토큰 한 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음?”
예기치도 못한 청색의 문자가 떠오르며 시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째서 토큰이 생긴 거지? 겨우 요리를 해 줬다고 토큰을 줄 만큼 선행의 기준이 낮지는 않을 텐데?’
토큰은 악마로부터 누군가를 구출했을 때나, 필요한 물자를 지원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현이 한 일이라고는 요리를 만들어 함께 먹은 것밖에 없다.
이 행위가 토큰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민하고 있으려니 한기훈이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고맙다, 시현아. 덕분에 요 며칠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조금 풀린 거 같아.”
‘……아, 스트레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가 대두됐다.
사람의 정신력은 강철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신은 빠르게 마모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스트레스다.
아무리 식량과 필요한 물자가 확보됐다 할지라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인간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된다.
손익을 떠나 이상 행동을 취하게 되며, 심각한 경우 집단에 해를 끼치거나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원작의 그 김우식도 스트레스로 자살했어. 구원자로서 생존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란 건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났다고 생각하니 한숨도 함께 늘었다.
간만의 육식으로 스트레스가 풀렸는데, 고민거리가 늘어 말짱 도루묵이 된 느낌이다.
그런 시현의 눈앞에 두 번째 메시지가 나타났다.
<루스의 낙인을 흡수하여 회복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어?”
시현은 또 한 번 당황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