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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20화 (20/225)

[20화]

가지고 있던 식량의 8할을 대가로 시현은 마트를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닐 수 있는 권리를 손에 넣었다.

남은 건 주인공인 정훈이 합류하는 시기까지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뿐이다.

자신이 참가자라는 사실까지 숨길 수 있었기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간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겠네. 한씨 남매와 연결 고리를 만들어 두고 싶기는 하지만……. 졸리니까 내일 해야겠다.’

들뜬 기분을 애써 감춘 시현은 배정받은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까지 오며 행해진 몇 차례의 전투에 지쳤는지 이나연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지친 건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육체에는 피로가, 정신에는 스트레스가 쌓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습격해 오는 악마의 존재가 밤잠을 설치게 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등을 맡기기에는 아직 이나연의 힘이 미약했다.

적어도 이곳에 있으면 자는 도중 악마의 송곳니에 찔려 죽는 일은 없을 터다.

‘이래서 세력이 중요한 거구나.’

자리에 누운 시현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아주 좋은 이불은 아니지만 그래도 포근함과 푹신함을 만끽할 정도는 됐다.

요 며칠 추위에 떨며 맨바닥에서 야영한 것을 생각하면 천국이 따로 없다.

눈을 감으니 절로 행복에 겨운 미소가 피어났다.

오늘 하루는 평소와 달리 좋은 꿈을 꾸며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습격! 습격이다! 후문 쪽의 바리케이드가 뚫렸어!”

“……망할.”

자로 잰 듯한 타이밍이었다.

“Re write의 독자들 중 내 편안함을 못마땅해하는 놈이 있는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타이밍에 악마가 쳐들어올 리 없지 않은가.

시현은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켰다.

“무기를 챙겨!”

“당황하지 마. 습격해 온 악마는 얼마 안 돼.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주변 사람들이 굉장히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제각각 무기를 들고 있었으나 장비 수준은 빈약했다.

기껏해야 목각이나 대걸레 자루를 부숴 만든 창이 전부.

그나마 괜찮은 건 식칼 정도다.

표정이나 굼뜬 움직임을 통해 그들이 악마를 두려워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도망치지 않았다.

놀라운 현상이다.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만 2층으로 올린 결과인가? 비인도적인 수단이지만 효과는 확실하네.’

시현은 이런 소란에도 깨어나지 않는 이나연의 뺨을 꼬집어 깨웠다.

“아파아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울상이 되어 뺨을 어루만지는 이나연을 대동한 채 1층으로 내려갔다.

상황 파악을 위해서다.

1층의 상황은 예상보다 처참했다.

“으아아아!”

“사, 살려 줘.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해 줘!”

악마와 싸울 만큼 용감하지 못한 1층의 생존자들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달아나고 있었다.

싸우려는 자들과 달아나려는 자들.

그들이 뒤엉켜 부딪치며 혼란을 빚어냈다.

‘급하게 완성해서 그런가. 아직 세력으로서 미흡한 부분이 존재하기는 하네.’

시현은 도망치는 자들의 경로를 통해 악마가 어디에 나타났는지를 파악했다.

마트의 외진 장소.

정육 코너에서 소수의 악마들이 날뛰고 있었다.

‘좀비가 둘, 검은 늑대가 둘. 그리고 무기를 든 성인 남성이 열일곱. 여성이 넷. 구원자는 없는 거 같은데.’

시현은 피아의 전력 차를 분석했다.

크게 문제는 없어 보였다.

머릿수의 차이가 클뿐더러 하나같이 약한 악마뿐이다.

지혜가 없어 무작정 돌진밖에 할 줄 모르는 좀비와, 빠르지만 내구가 약한 검은 늑대.

현재 인원으로 사상자 없이 처리 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악마들을 둘러싸고만 있을 뿐 누구 하나 앞장서는 자가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머릿수가 많다 해도 사람을 포식하는 악마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빠, 어쩔 거예요?”

이나연이 작게 속삭였다.

“보아하니 시작만 끊어 주면 알아서 싸울 거 같은데.”

마침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콘크리트 덩어리가 발에 치였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고 근접, 원거리 양면에서 활약할 수 있는 고마운 무기다.

그걸 주워 든 시현은 목표를 찾았다.

그런 시현을 만류하는 손이 있었다.

“너는 참가하지 않아도 돼.”

예의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였다.

‘분명 민성찬이라 했지?’

시현은 기억을 더듬어 어제 스치듯 소개한 남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래도 되나요?”

“그래. 리더의 지시니까 너는 구경만 하고 있어도 괜찮아. 아, 물론 나연 씨도요. 무서우면 제 뒤에 숨으셔도 됩니다.”

예쁘장한 외모의 나연이 마음에 들었는지 민성찬은 멋진 모습을 보여 주려 했다.

“……아, 네.”

그러나 이나연은 그에게 흥미의 파편조차 보이지 않았다.

왼쪽 귀로 흘러 들어간 민성찬의 목소리가 그대로 오른쪽 귀로 빠져나왔다.

‘하긴, 내가 악마와 싸우다가 죽기라도 하면 추가 식량을 확보할 수단이 없어질 테니까 신경 쓰였겠지.’

마트의 리더인 정수혁이 노리는 것은 시현이 언급한 대량의 식량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호의를 쌓아 자연스럽게 정보를 얻어 내려는 속셈이리라.

그러나 정수혁에게 정보를 공개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시현이 보자면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는 셈이었다.

어찌 되었건 간부로 추측되는 민성찬의 강제성 띤 허락도 얻었겠다, 시현은 안전한 곳에서 주어진 혜택을 누렸다.

[우어어어…….]

생각이란 게 없는 좀비는 머릿수가 모자라더라도 개의치 않고 공격에 나선다.

“흐이익!”

대걸레 창을 겨누고 있던 교복 차림의 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친다.

그로 인해 포위망이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은 늑대 두 마리가 달려들었다.

“마, 막아!”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학생을 지키려 했으나 겁을 먹은 건 그들 역시 마찬가지.

입만 떠들어 댈 뿐 움직임 자체는 둔했다.

‘저대로라면 다 죽겠군.’

예상과 달리 저들은 머릿수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민성찬이 가만히 있으라 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시현은 콘크리트 덩어리를 쥔 손을 뒤로 쭉 당겼다.

왼발로 강하게 땅을 딛고 크게 손을 휘두르려는 그 순간.

“저리 비켜!”

우렁찬 외침과 함께 근육이 과다하게 부푼 남성이 뛰어들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진 시현은 난입한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퍼억!

[깨갱!]

남자가 휘두른 주먹에 검은 늑대가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군다.

“악마들은 내가 처치할 테니 방해하지 말고 물러나!”

남자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그 외침 덕에 악마들의 시선이 일제히 남자에게 향했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주하는 전차처럼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쓰러져 있던 늑대의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린다.

[크아아앙!]

등을 보인 남자를 노리고 두 마리째가 뛰어오른다.

하지만 남성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 고릴라야! 혼자 멋대로 뛰쳐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협동심을 기르라고!”

호리호리한 여성의 화려한 올려 차기가 검은 늑대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때렸다.

그녀는 묶었던 머리를 풀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갈색으로 물들인 단발이 흩날렸다.

“드, 드디어 돌아왔다!”

“한씨 남매다!”

1층의 생존자들은 열광했다.

지금까지 겁먹은 얼굴로 달아나던 모습이 거짓이라도 되는 양 사람들은 그들을 응원했다.

두 남녀가 악마들을 처리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다.

‘저 사람들이 그 한씨 남매라 이거지?’

그들을 지켜보는 시현의 눈이 반짝였다.

한기훈과 한예인.

그들 남매는 원작의 주인공인 정훈의 곁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인 검증된 인재들이다.

30대 초반인 한기훈의 경우, 헬스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다.

순둥순둥한 인상이지만 근육질의 거구에서 나오는 위압감을 통해 ‘분노 조절 장애’를 ‘분노 조절 잘해’로 만드는 능력자다.

5살 터울의 동생인 한예인은 근육이 탄탄하게 자리한 몸매와 날렵한 움직임을 가진 현역 킥복싱 선수다.

원작에서 두 사람은 정훈이 합류하기 전까지 마트의 생존자들을 이끌었다.

만약 정수혁이 없었다면 마트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비교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후우……. 다들 수고했다.”

전투는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강한 힘을 가진 남매가 선봉에 서자 눈치만 보던 다른 생존자들도 악마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악마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단 하나의 사상자도 없이 승리를 쟁취했다.

좀비들은 생포된 채 2층으로 끌려갔다.

“대체 그 인간은 저것들로 뭘 하려는 건지…….”

한기훈은 끌려가는 좀비를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지켜봤다.

시현 역시 좀비에게 시선을 줬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기훈과 달리 시현은 정수혁이 좀비를 이용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얼추 알 수 있었다.

아주 잠깐 표정에 경멸이 스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헬창 한기훈! 어떻게 사람이 저런 괴물을 주먹으로 때려잡을 수가 있지?”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1층의 거주자들이 그들 남매를 격하게 칭송했다.

반면, 함께 전투를 벌인 2층의 거주자들은 혀를 차며 수고했다는 인사조차 생략하고 등을 돌린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그래그래. 다들 수고했어. 혹시 다른 놈들이 냄새를 맡고 올지 모르니 후딱 후문 쪽 바리케이드를 정돈하자고.”

“네!”

한기훈의 말에 1층의 생존자들은 득달같이 후문으로 향했다.

그가 선보인 리더십이 못마땅했는지 가뜩이나 험악한 민성찬의 인상이 더욱 흉악해졌다.

이쯤 되면 악마도 오줌을 지리며 달아날 상판이다.

“저 사람들만 보내면 위험하니까 내가 따라갈게.”

한예인이 바리케이드를 수리하러 나간 생존자들의 뒤를 쫓았다.

남겨진 한기훈은 주위를 둘러보다 민성찬을 발견하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반가움보다는 적개심이 도드라지는 미소였다.

“민성찬, 우리가 없는 동안 1층 생존자들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마트 내부까지 악마가 침입해 오는 걸 보고만 있었나? 누가 보면 너희가 초대한 줄 알겠어.”

불량배처럼 껄렁거리며 다가오는 한기훈을 향해 민성찬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1층 놈들이 꽥꽥거리면서 방해만 안 했어도 벌써 처치했을 거다. 그보다 약속한 식량은?”

혀를 찬 한기훈은 등에 지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았다.

배낭 안에는 편의점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먹을 것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됐냐? 이걸로 1층 생존자들에게도 공평하게 분배해라.”

“걱정 마라. 리더께 보고드릴 테니까.”

비열한 웃음을 지은 민성찬이 콧노래를 부르며 식량을 챙겼다.

그 모습이 못마땅했던 한기훈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이죽거렸다.

“리더는 개뿔.”

“그게 무슨 뜻이지?”

고개를 치켜든 민성찬은 목소리를 깔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부릅뜬 눈이 험악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험악한 인상과 맞물린 그의 으름장은 여러 사람을 상대로 효과를 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 나름이지, 거침없는 한기훈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 작자는 리더가 아니라 악랄하고 비열한 개새끼지. 사실 민성찬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우리 사이에 좀 더 솔직해지자고.”

“네가 리더를 모욕하고도 무사할 거 같아?”

“무사하지 못하면 어쩔 건데. 그러다 한 대 치겠다. 어?”

당장이라도 주먹이 오갈 분위기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싶었던 이나연은 슬그머니 시현의 뒤로 피했다.

‘아……. 그런 거구나.’

잠자코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파악하던 시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시현은 정수혁이 원작의 지식을 이용해 마트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마트의 상황은 생각보다 재미있게 꼬여 있었다.

정수혁이 손에 넣은 건 정확히 절반에 불과했다.

그는 마트 2층의 생존자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아마 독점한 식량이나 물자 따위를 지급할 때 우대해 주는 조건으로 그들의 환심을 샀겠지.’

반면, 1층의 생존자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으며, 그들을 대표하고 있는 한씨 남매 역시 수중에 넣지 못했다.

지금은 따로 분류하지 않지만 추후 생존자는 두 분류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생존파.

이미 세계는 멸망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 악마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생존자들이다.

그들은 용감하지만 수가 적다.

다른 하나는 구조파.

세상이 붕괴했다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악마를 피해 숨어 있으면 언젠가 정부 차원에서 구조가 올 거라 믿는 생존자들이다.

그들은 식량과 잘 곳을 원하지만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당연하지만 사람이라면 구조파보다 생존파의 가치를 높이 살 수밖에 없다.

정해수 또한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씨 남매가 구조파인 1층 생존자들의 편을 들어 줬다.

두 사람의 무력은 어중이떠중이와 격이 다르다.

때문에 지금의 마트는 1층과 2층.

두 세력 간에 가까스로 균형이 맞춰지고 있는 형태다.

“그나저나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지?”

주먹을 주고받을 생각은 없었는지 눈을 돌린 한기훈이 시현에게 관심을 줬다.

불쾌한 기색을 여실하게 드러내면서도 민성찬은 한기훈의 질문을 무시하지 않았다.

“잠시 머물다 갈 손님으로 들였는데, 리더께서 세력원으로 넣어 주셨다.”

“1층?”

“2층.”

“흐음…….”

호기심 가득한 한 쌍의 눈이 평가라도 하듯 시현을 훑는다.

친해질 기회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화사한 미소로 무장한 시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윤시현입니다. 앞으로 이곳에 머물게 됐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한기훈이다. 나이 차이도 나는 거 같은데 형이라 불러. 내가 말 놓는 게 불만이면 너도 말 놓고.”

“별로 신경 안 씁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그보다 싸움을 잘할 것 같지도 않은데 2층 거주라니, 제법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나 봐?”

“식량을 조금.”

“그래?”

한기훈이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근육질 팔에 목을 감긴 시현도 불가피하게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저항할 마음도 없었지만 말이다.

한씨 남매와 정수혁.

누가 봐도 가치가 있는 쪽은 전자다.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그 친구는 우리 쪽 사람이다.”

민성찬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한기훈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은근슬쩍 압박을 줬다.

“그냥 잡담을 조금 나누려고. 앞으로 같이 살게 됐는데 친해지면 좋잖아. 안 그래? 설마 같은 식구끼리 말도 못 나누게 하려는 거야? 에이. 그 위대하신 리더가 그렇게 쪼잔할 리가 없지.”

“……리더께 보고하겠다.”

“얼마든지. 빨리 가서 일러바쳐라.”

혀를 내밀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 한기훈은 시현과 이나연을 데리고 마트의 정문으로 향했다.

굳게 잠긴 문 앞에는 온갖 기물들을 쌓아 올린 2차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져 있었다.

혹시 밧줄이 풀린 곳은 없나 꼼꼼하게 바리케이드를 점검한 한기훈이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과 편의점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이나연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쪽은?”

“이나연, 나이는 스물이야. 오빠랑은 남매 같은 사이.”

“그래.”

아무리 말을 놓으라 했다지만, 이나연은 띠 동갑에 가까운 한기훈에게 서슴없이 말을 놨다.

본인이 말한 게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한기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기 마트에 왜 온 거야?”

“이유가 달리 있나요. 저 괴물들을 피해 도망치다 보니 여기로 흘러들어 온 거죠.”

“그러냐. 하필이면 골라도 여기를 고르다니, 운이 없었네. 다른 좋은 곳도 많은데.”

한기훈은 담뱃갑을 거꾸로 들고 흔들었다.

그러나 텅 빈 곳에서 담배 개비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한숨을 토한 한기훈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까 태운 게 끝이었나. 망했네. 내 인생은 이제 끝이야.”

마침 시현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 한 갑.

그것을 본 한기훈의 눈동자에 격한 감동이 몰아쳤다.

“드릴까요?”

화폐 대용으로 쓰기 위해 들고 다니던 습득물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한기훈의 호감을 사기 위해 사용하는 거라면 아깝지도 않다.

“오오! 정말 고맙다. 넌 내 은인이야. 격하게 사랑한다!”

고작해야 담배 한 갑이다.

하나 한기훈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한기훈은 마치 세상을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행복해했다.

흡연자의 그러한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시현은 연기가 닿지 않는 곳까지 물러났다.

“식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지?”

“네, 마트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일부를 지불했습니다.”

“일부?”

“사실 조금 많기는 하더군요. 8할이었나?”

“그 돼지 새끼…….”

한기훈의 음성에 짙은 혐오감이 묻어났다.

원작에 나온 것처럼 한기훈의 성품은 올곧으며 정의로웠다.

이처럼 강한 무력과 올바른 인성을 갖춘 인재는 많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한기훈을 영입하고 말겠다는 욕구가 강해졌다.

정수혁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나저나 그것들이 일부만 받고 만족했단 말이야? 거참, 이상하네. 그놈들은 네 배를 가르고 네가 가진 전부를 앗아 갔을 놈들인데.”

“그게 무슨 뜻이죠?”

“어제 점심 즈음에 어린 여자애를 데리고 합류를 요청한 남자가 있었어. 정수혁은 너랑 똑같은 조건으로 그 남자를 받아들이고, 그날 악마와의 전투에 내보냈다.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같이 온 여자애는 1층으로 보내 버렸지.”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시현은 알 수 있었다.

어제 느낀 끓는 듯한 분노를 한기훈은 아직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 민성찬에게 일부러 시비를 건 것도 이 분노가 원인일 것이다.

“식량만 받고 버렸다 이거군요.”

그가 느끼는 분노에 시현은 공감을 표했다.

정수혁.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력한 생존자들을 위험천만한 1층에 방치한 정수혁이 선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시현이라 해서 구조파로 구성된 1층의 생존자들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밥값은 못할지언정, 밥을 축내기만 하는 자들이니까.

하지만 정수혁은 정도가 심했다.

식량만 빼앗고 사람은 죽음으로 몰아넣다니, 금수만도 못 한 행위다.

‘Re write의 등장인물들을 단순한 소품 정도로 취급하지 않고서야 그런 선택은 못하지.’

시현은 무의식적으로 이나연에게 시선을 줬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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