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둥지에서 엄청난 수의 이빌 보아를 죽였다.
거기에 더해 중형 악마인 메탈 웜까지.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라고 기대했지만 빗나가면 아쉬울 거 같아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시현은 꿈에 그리던 2레벨의 구원자가 된 것이다.
보다 향상된 신체 능력도 주목할 만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장막.
외피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자라 할지라도 결국은 사람.
총기에 심장이나 머리가 뚫리면 즉사한다.
하지만 외피가 있다면 적어도 평범한 공격에 목숨을 잃는 일 따위는 없게 된다.
구원자가 2레벨부터 제대로 된 취급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운이 좋았어.’
동면 중인 대량의 이빌 보아와 독을 사용하면 손쉽게 사냥할 수 있는 중형 악마 메탈 웜.
경험치의 덩어리인 그것들을 노리고 다른 참가자가 방문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행운을 손에 넣은 건 시현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한데, 아직 행운의 파도는 끝나지 않았다.
—99. 트롤에 이어 메탈 웜인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걸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마음에 들었다.
붉은 문자가 나타나더니 그토록 염원하던 99번째 댓글이 표시됐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100번째 댓글이 이어 달렸다.
—윤시현. 목표 달성을 축하한다.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몇 개의 댓글이 우르르 달렸다.
하나같이 100번째 댓글을 노리고 있던 독자들이다.
—크아악! 늦었어!
—내가 이 순간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기념비적인 100번째 댓글은 내가 달고 싶었는데!
—내 반응 속도를 뛰어넘었다고?
—그나저나 100번째는 누구임?
—아르하.
그 이름이 거론된 순간 댓글창이 요란해졌다.
—우아, 주인공 강림!
—뭐야, 관심 없는 척하고 있더니 사실 엄청 관심 있었구나!
그 아르하다.
난리가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
F부터 S까지.
권능에도 엄연히 등급이란 게 있다.
Re write의 등장인물이 작성한 등급인지라 아주 객관적인 정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 분명한 게 있다.
아르하의 권능이 유일무이의 S등급으로 책정되었으며, 거기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화악!
등 쪽의 문양에서 빛이 뿜어졌다.
문양을 확인하기 위해 시현은 상의를 벗었다.
겨울 날씨가 춥기는 했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 왜 갑자기 옷을 벗고 그래요! 변태예요? 아니, 춥지도 않나?”
갑작스러운 탈의에 놀란 이나연이 호들갑을 떨며 달아났다.
그러나 지금은 변명보다 낙인의 확인이 우선이었다.
선팅 시공이 완료된 차가 있었기에 등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분명 원작에서는 낙인을 이렇게 묘사했다.
간단하지만 묘한 아름다움이 담긴 것이라고.
그러나 아르하의 낙인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등을 덮을 만큼 복잡하고 휘황찬란했다.
마치 자신은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는 듯했다.
문양이 완전하게 완성된 후, 기다렸던 청색의 문자가 나열됐다.
<당신은 아르하의 축복을 받은 구원자입니다.>
<아르하의 축복을 받아 신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아르하의 권능인 ‘모방’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어 있는 공간은 두 개입니다.>
<보다 많은 악마를 처단해 인류를 구원하십시오. 그럴수록 축복의 빛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청색의 문자는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해 준다.
하지만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
새로 얻은 권능의 사용법, 효과 등등은 본인이 직접 경험을 쌓으며 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아르하의 권능인 모방은 이야기가 다르다.
원작의 주인공 정훈이 주로 사용하던 권능인 만큼 그 효능은 666명의 참가자 전원이 알고 있었다.
“나연아, 잠깐 손 좀 줘 봐.”
“네?”
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해하면서도 그녀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시현은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힘든 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부드러운 손이다.
“네 눈앞에 청색의 메시지 창이 뜰 거야. 당황하지 말고 수락 버튼을 눌러 줘.”
“대체 무슨…….”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시현은 설명보다 경험을 선택했다.
“모방.”
<권능의 사용에 실패했습니다.>
실패라는 단어에도 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메시지가 나타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현재 다룰 수 없는 위력의 권능입니다. 권능의 위력을 낮춥니다.>
<현재 다룰 수 없는 위력의 권능입니다. 권능의 위력을…….>
빠른 속도로 문자가 갱신되며 기존의 것들이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무려 다섯 번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권능의 사용이 가능합니다.>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드디어 모든 조정이 끝났다.
시현은 다시 한번 권능을 사용했다.
<아르하의 권능 ‘모방—5’가 발동됩니다.>
<낙인을 가진 대상이 지정되었습니다. 생존자 — 이나연.>
<대상이 생존자일 경우 허가를 기다립니다.>
“어? 어어어?”
당황하는 이나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어쩔 줄을 몰라 갈팡질팡하던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눈을 꼭 감은 채 외쳤다.
“수, 수락!”
<허가 완료. 에르의 권능 — 폭풍의 모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모방한 권능은 5배의 정신력을 소모해 발동이 가능합니다.>
강렬한 빛과 함께 낙인의 1시 방향에 자그마한 통증이 느껴졌다.
달칵.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시현의 오른쪽 손등에 새로운 낙인이 새겨졌다.
동시에 몸을 채우는 만능감.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시현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폭풍.”
손끝에 작은 바람이 느껴졌다.
민들레 씨앗 하나 흩날리지 못할 만큼 미약하던 바람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며 덩치를 부풀렸다.
콰드드드득!
잔잔하던 바람은 어느새 세상 만물을 찢어발길 듯 엄청난 기세를 품은 커다란 폭풍이 되었다.
하늘 위에 모여 있던 구름에 원형의 구멍을 뚫고 나서야 바람은 잦아들었다.
“으아아아! 이게 뭐야!”
그 경이로운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이나연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시현은.
“아하하하!”
웃었다.
위력만 놓고 보면 최강이라 불리던 에르의 권능을 자신의 손으로 펼쳤다.
주인공인 정훈조차 손에 넣지 못했던 폭풍을 말이다.
이 끓어 넘치는 희열을 폭소하는 것 외에는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하! 하, 하아아……. 죽을 거 같아.”
강한 권능은 그만큼 막대한 정신력의 소모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아도 최강의 위력을 가진 에르의 권능이건만 모방에 의한 페널티로 다섯 배에 달하는 정신력을 지불했다.
정신력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다 못해 땅을 뚫고 내려갔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지독한 두통과 함께 땅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오, 오빠?!”
당황한 이나연의 외침과 함께 포근한 무언가가 신체를 감싸는 것을 느끼며, 시현은 정신을 잃었다.
남은 시간 : 1개월 16일 11시간 35분.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시현은 숙취처럼 남아 있는 미세한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좋아. 폭풍은 한동안 봉인이다.”
제아무리 위력이 강하면 뭘 한단 말인가.
한 번 쓰고 나면 맥없이 정신을 잃고 마는데.
정신력의 총량이 늘어나거나 소모 값을 줄이지 않는 이상은 사용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나저나 여긴…….”
시현은 주변을 살폈다.
작은 침대와 하늘색을 중심으로 한 예쁘고 깔끔한 가구들.
익숙한 공간이다.
“이나연의 방인가.”
“이나연이 뭐예요. 정 떨어지게. 성 떼고 불러요.”
활짝 열린 방문 앞에 못마땅한 얼굴을 한 이나연이 서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 아래로 짙은 피로가 엿보였다.
밤을 새워 간호한 흔적이 역력하다.
“갑자기 그렇게 쓰러져서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요? 숨도 잘 못 쉬고 그래서 오빠 죽는 줄 알고 엄청 마음 졸였잖아요.”
“미안. 나도 모르게.”
정신력이 바닥을 드러내면 굉장히 고통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지.
“나 얼마나 뻗어 있었어?”
“꼬박 하루. 24시간이요.”
“이런…….”
이곳에서 너무 시간을 보냈다.
하루라도 빨리 LT마트로 향해야 하는데, 24시간이나 허투루 써 버리다니.
시현은 자신의 충동적인 어리석음을 가슴 깊이 반성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현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그래도 24시간을 편히 쉬어서 그런지 상태는 최상이었다.
“그러면 곧바로 이동……은 좀 힘들 거 같고. 6시간 정도만 쉬다 가자.”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출발하고 싶었다.
그러나 딱 봐도 자신을 간호하다 날밤을 꼬박 새운 이나연에게 지금 당장 출발 준비를 하라고 채찍질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침대 돌려 줘요.”
예상대로 한계 상태였는지 침대에 몸을 던진 이나연은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곯아떨어졌다.
이불을 덮어 준 시현은 거실로 나갔다.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저분한 거실의 구석에 두 개의 묘비가 있었다.
묘비라 해 봤자 시신이 안치된 것도 아니고, 이름이 새겨진 십자가 옆에 사진을 걸어 두기만 한 어설픈 것이다.
“에휴.”
이나연의 신세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그녀와 같은 비극을 맞이한 생존자는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다.
익숙해져야 한다.
살인에 익숙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동정심이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래도 묘비 정도는 만들어 줄까.”
어차피 시간도 남겠다, 시현은 현관을 나섰다.
목적지에 도착한 시현은 문을 열었다.
공기가 순환됨에 따라 안에 갇혀 있던 불쾌한 냄새가 얼굴을 확 덮쳐 왔다.
얼굴을 한껏 찡그린 시현은 내부로 들어갔다.
하수인이 된 중년 여성과 그녀에게 잡아먹힌 중년 남성.
그리고 목이 부러져 죽은 군복 차림의 젊은 남성.
나란히 죽어 있는 일가족의 시신이었다.
죽은 자를 향한 예우를 갖추는 것 자체가 사치라 여겨지는 세상이기에 적당히 눕혀만 두고 방치해 뒀건만, 민서라가 부모를 위해 만든 무덤을 봤더니 양심이 찔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현은 세 구의 시체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단지 중심에 있는 놀이터.
원래는 각종 놀이 기구들이 있는 장소였지만 메탈 웜의 거구에 짓눌려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메탈 웜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대량의 검은 가루가 모래에 섞인 채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이다.
“딱 좋네.”
그 안에 시체를 묻고 주변에서 판자를 구해와 원시적인 묘비를 만들었다.
먼저 정해수의 양친을 위한 묘비를 만들고, 구덩이를 파서 정해수의 시신을 묻었다.
영원한 잠에 빠져 있는 정해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현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혐오였다.
“미안.”
나지막한 사과와 함께 정해수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르하의 권능 ‘권위—5’가 발동됩니다.>
<낙인을 가진 대상이 지정되었습니다. 사망자 — 정해수.>
<대상이 사망자일 경우 허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허가 완료. 라이지아의 권능 — 연기자를 모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모방한 권능은 5배의 정신력을 소모해 발동이 가능합니다.>
죽은 자.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죽인 자의 것을 건드리다니, 용서받지 못할 죄다.
스스로의 악랄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나 이대로 사장시키기에는 정해수의 권능이 너무 아쉽다.
그의 권능을 모방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죄악감을 억지로 삼킨 시현은 정수혁의 무덤을 마저 완성시켰다.
세 개의 무덤을 모두 완성시킨 시현은 간만에 허리를 펴고 주변을 살폈다.
메탈 웜이 사망하며 놈이 만들어 두었던 철 십자가는 모두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철 십자가에 꿰뚫려 있던 머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고생하지, 뭐.”
그렇게 몇 번째 무덤을 만들었을 때, 102동 건물에서 노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노인은 시현이 만든 무덤 앞에 무릎 꿇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시현은 무언으로 다음 무덤을 만들었다.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토큰 스물한 개가 지급되었습니다.>
* * *
“우아아아!”
이나연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크아아아!]
그녀의 비명에 화답이라도 하듯 괴성을 지른 좀비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생사를 건 술래잡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시현은 뒤집힌 차 위에 팔자 좋게 앉아 육포를 씹고 있었다.
“눈 감지 마. 이 악물고 휘둘러. 공격보다는 회피에 집중해. 물리면 감염된다. 손톱에 스쳐도 감염돼.”
“뭐든지 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바로 실전 투입은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 엄청 곱게 자랐는데!”
그녀는 투정을 부리면서도 시현의 지시에 따라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힘껏 쥔 야구 방망이가 반월의 궤적을 그렸다.
빠악!
깔끔한 일격에 좀비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시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힘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건 각성을 마치면 해결될 문제고, 기술이 예사롭지가 않아.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는데, 이 정도라니…….’
이 재능에 노력까지 더해진다면 어느 정도의 괴물이 탄생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해병대 출신의 시현은 간단하게나마 무술이나 호신술 등을 배웠다.
그 경험을 이나연에게 전수해 준다면 언젠가 원작의 주인공 정훈을 뛰어넘는 구원자가 탄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나연은 지금의 시현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이라 할 수 있겠다.
아파트에서 제법 많은 시간을 소요했으나 그만큼 얻은 게 많았으므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정말 이 괴물들……. 악마라고 했나? 이것들을 죽이기만 해도 오빠처럼 괴물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는 거죠?”
“괴물이라니, 나 상처 받아. 괴물은 오히려 너겠지.”
“저처럼 예쁜 괴물 보셨어요?”
“적어도 그런 꾀죄죄한 몰골로 예쁘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못 봤네.”
“…….”
그녀는 이를 갈았다.
아포칼립스 이후 수도가 끊겨 제대로 씻지 못해 그녀의 몰골은 참혹한 수준이었다.
겉으로 크게 티가 나는 정도는 아니지만 땀 냄새나 떡 진 머리는 이나연의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청결은 미를 평함에 있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지금이라면 한강에라도 뛰어들어서 머리를 감을 수 있을 거 같아요.”
“한강에도 괴물 있어.”
“이런 씨……. 그런데 오빠는 왜 그렇게 깨끗해요? 아까 그렇게 땀을 흘렸으면서 땀 냄새도 안 나는 거 같아. 뒤집어썼던 피는 다 어디로 갔담?”
“구원자잖아. 정화의 축복이라는 게 있어. 늘 청결함을 유지할 수 있고 감염과 질병 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
“좋아. 다음 적은 어디냐!”
각성을 통해 반영구적인 청결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자 이나연이 의욕으로 타올랐다.
그러나 이미 주변에 있는 악마는 전부 처리한 후다.
“경험치 벌이는 나중에 하자. 이제 목적지까지 바로 이동할 거야.”
“너무해. 간만에 의욕 좀 내봤는데.”
이나연이 아쉬운 소리를 냈으나 별수 없었다.
연대 아파트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잡아먹어 일정이 촉박해졌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정도는 아니지만, 굳이 찾아다니며 악마를 토벌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다.
시현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기다렸다는 듯 이나연이 잽싸게 뒷좌석을 차지했다.
“그런데 오빠.”
“왜?”
“제가 물어보는 걸 깜빡했는데 우리 어디에 가는 거예요?”
“LT마트.”
간략하게 대꾸한 시현은 현재 향하고 있는 마트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초기.
생존자들 중 재난 영화 따위를 통해 지식을 갖춘 이들은 식료품이 잔뜩 있는 장소로 몰려들었다.
특히, LT마트는 주변에서 멀쩡한 축에 속하는 건물이었기에 많은 생존자가 모여들었다.
처음에 생존자들은 한정된 식량을 두고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나 생존자의 목숨을 옥죄는 것은 비단 부족한 식료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트에 구비된 식량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악마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생존자들은 힘을 합쳐 바리케이드 등을 쌓아 악마의 침입을 막는 한편, 농사를 시도하거나 수색 팀을 구성하는 등 어떻게든 생존을 위한 방향성을 모색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마트는 힘은 약해도 제법 안정적인 세력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마트의 가장 큰 가치는 누가 뭐라 해도 원작의 주인공인 정훈.
그리고 소설의 초반부터 후반까지 그의 곁에서 활약하는 두 주연급 인물 한씨 남매에게 있다.
시현의 계획은 초기 단계인 마트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이었다.
그를 통해 한씨 남매를 포함한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사고 구원자로서 명성도 높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가장 중요한 건 정훈을 포함해 세 사람을 영입하는 거지만, 다른 부가적인 이득도 챙겨 둬서 나쁠 건 없으리라.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며 속도를 높인 시현은 얼마 안 가 목적지인 마트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마트의 상황을 살피던 시현의 표정이 벌레라도 씹은 듯 흉해졌다.
어찌된 영문일까.
마트 주변에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져 있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