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어찌나 상처가 깊은지 하얀 붕대 사이로 붉은색이 상당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이 근처는 머리지네의 서식지가 아닌데, 이상하다 했어. 원작에도 머리지네가 생명의 탑을 습격했다는 묘사는 없었는데.”
“궁지에 몰린 인간은 본성을 드러내는 법이거든. 네가 과연 자신을 위해 타인을 쳐 낼 수 있는 인간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어. 그 정도는 돼야 영입하는 의미가 있지. 결과는 기대 이하였지만.”
“네가 악마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이자프의 규칙에 따라 대상이 악으로 지정됩니다. 대상을 처단하기 전까지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시현은 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
언제 지쳐 골골댔냐고 외치기라도 하듯 격한 움직임이었다.
예리한 회칼이 이한울의 목을 노리며 크게 휘둘러졌다.
이한울은 간발의 차로 공격을 회피했다.
그의 목덜미에 자그마한 실선이 그어졌다.
푸확!
상처에서 대량의 피가 솟구쳤다.
“……어?”
당황한 이한울은 목덜미를 틀어막았다.
가벼운 상처인데 말도 안 되는 대미지를 입었다.
심지어 좀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당히 우수한 권능을 가진 모양이네. 역시 여기서 끝장을 봐야겠어.”
상당히 위험한 상처인데도 이한울은 물러서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도 없다.
자신이 패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강한 자신감만이 보였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윤시현.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다.”
[키아아아악!]
들려오는 악마의 포효가 더욱 사나워졌다.
시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가 가진 이자프의 권능은 강하다.
하지만 이한울의 신혈과 비교하면 상성이 좋지 않다.
자그마한 상처로 대량의 피를 쏟게 만드는 처형.
쏟아 낸 피로 악마를 불러들이는 신혈.
상처를 입히면 입힐수록 시현이 위험해지는 어이없는 구조다.
그렇다고 공격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결국 시현이 택할 수 있는 건 악마가 몰려오기 전에 이한울을 끝장내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뿐이다.
힘껏 휘두른 회칼이 이한울의 피부를 찢었다.
피가 흐르는 게 이상할 수준의 얕은 상처.
하지만 시현의 권능은 그 자그마한 상처에서도 피분수를 뿜게 만들었다.
당황해서 주춤할 법도 하건만, 이한울은 그저 분노에 눈이 뒤집힌 황소처럼 마구 돌진해 올 뿐이었다.
그의 신체에 하나둘 상처가 쌓였다.
입고 있던 의복이 붉은색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그러나 이한울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뭐지?’
불쾌했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겠다는 기세가 아닌가.
왼손으로 이한울의 멱살을 잡고 당기며 그의 콧잔등을 들이받았다.
코뼈가 내려앉은 건지 대량의 코피가 쏟아졌다.
그가 괴로워하는 틈을 타 역수로 쥔 회칼을 어깻죽지에 박아 넣으려 했다.
잘 하면 이번 공격이 이한울의 숨통을 끊어 놓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한울은 공격을 회피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죽 웃으며 멱살을 쥐고 있는 시현의 왼손에 주머니칼을 처박으려 했다.
“미친 새끼!”
결국 시현은 이한울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누군가를 죽이는 게 싫다거나 하는 나약한 이유가 아니다.
이런 세상이다.
병원을 찾아간다 해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사실상 자연 치유밖에 믿을 게 없는 지금, 승리의 정의에는 자신의 몸이 온전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뒤따른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 건 금기다.
이한울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이만한 계획을 세운 이한울이 악랄할지언정 모자라지는 않을 테니까.
‘도대체 왜…….’
[크아아아아!]
포효와 함께 골목길에서 빠져나온 검은 늑대가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회칼이 검은 늑대의 눈을 찢었다.
바닥을 구르는 검은 늑대의 목덜미에 칼을 꽂아 넣으니 대량의 피가 얼굴에 튀었다.
그제야 시현은 자신의 옷이 악마를 끌어당기는 신혈로 흠뻑 젖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름 신경 쓴다고 신경 썼지만 역시 전부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마 이걸 위해 일부러 제 몸에 상처를 낸 건가? 하지만 왜?’
여전히 이한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시현이 뒤집어쓴 신혈의 양 만큼 이한울 역시 제 몸에 난 상처에서 흘린 피로 옷을 적시고 있었다.
조금 전 검은 늑대도 가까이에 있던 자가 시현이었기에 시현을 공격했을 뿐, 만약 그 자리에 이한울이 있었다면 이한울을 공격했을 것이다.
‘같이 죽자는 건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곳에서 이한울과 같이 죽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신혈에 이끌린 악마는 지금 순간에도 이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악마들이 도달하기 전에 이한울을 처리하고 이 장소를 벗어나면 되는 일이다.
그 순간.
“죄송합니다!”
배후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설아!’
그녀의 존재를 떠올린 시현은 급하게 팔을 들었다.
퍽!
부러질 듯 팔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설마 공격이 막힐 줄은 예상치 못했던 걸까.
눈가에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설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상식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시현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녀의 복부에 칼을 찔러 넣었다.
“아아아악!”
지척에서 터진 비명 소리가 고막을 먹먹하게 했다.
때문에 배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이야, 이거 거물이네.”
“……!”
급하게 몸을 돌렸으나 늦었다.
퍽!
관자놀이에서 아찔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머리가 핑 돌았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시현은 바닥을 굴렀다.
만져 보니 끈적이는 피가 흘렀다.
만약 각성을 통해 신체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머리가 깨져 즉사했을 위력이다.
시야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시현은 정면을 노려봤다.
비니를 쓴 거구의 남자가 복부에서 피를 흘리는 이설아를 부축하고 있었다.
반대쪽 손에는 피 묻은 야구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하나가 더 있었던 건가…….’
이한울도 다 죽어 가는 몰골로 두 사람과 합류했다.
“남지후, 설아는 괜찮냐?”
“그냥 살짝 찔린 거야.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오히려 문제는 너야. 얌마, 이설아. 네 오빠 죽게 둘 거냐?”
“비켜 봐요.”
눈살을 찌푸린 이설아가 남자를 밀어내고 이한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한울이 입은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찢어진 의복이 수복되고 흘린 피조차 사라졌다.
‘회복이 아니야. 저 미친년, 시간 조작 계열 권능을 가지고 있어.’
이제야 이한울이 왜 제 상처를 돌보지 않고 달려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권능의 위력이 경이로운 만큼 정신력의 소모가 많았는지 이설아는 두통을 호소하며 주저앉았다.
무너지는 이설아를 남자가 부축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 다 죽여 놓은 이한울의 상태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졌다.
반대로 시현은 여러모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저쪽은 멀쩡한데 반해 나는 넝마쪼가리나 다름없어. 게다가 남지후라니……. 내가 감염 의심을 받던 사흘 동안 영입한 건가?’
시현은 남지후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Re write의 명품 조연 중 한 사람이다.
추후 권왕이라는 호칭까지 얻게 되는, 근접전에 관해서는 항상 상위권에 언급되는 인물이다.
가능하면 아군으로 두고 싶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최악이다.
“처음에 말했지.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라고.”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한울이 마무리를 짓기 위해 접근해 왔다.
몸을 가누기조차 버거웠으나 가만히 앉아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시현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한울은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악과 깡으로 버티고 서 있지만 시현은 툭 치면 쓰러질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태였으니까.
반대로 전투 전까지 신체의 시간을 돌린 이한울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우으아아!]
돌연 측면의 바닥과 벽이 무너지며 거대한 거북이가 등장했다.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은 신종이다.
문제는 덩치로 유추하건대 저 거북이는 최소 중형 악마라는 것과, 놈이 정확하게 시현과 이한울의 중간 부분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한울에게는 불행이었고, 시현에게는 행운이었다.
중형 악마를 무시하고 시현을 공격할 만큼의 능력이 이한울에게는 없었다.
“젠장! 하필이면…….”
현재 거북은 시현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그의 옷은 신혈로 젖어 있고, 이한울의 몸에 묻었던 피는 이설아의 권능으로 사라졌다.
즉, 저 거북을 포함해 이곳에 모여든 모든 악마는 시현을 노릴 것이다.
‘내가 손을 대지 않아도 알아서 죽겠지.’
시현이 거북의 배 속에 들어가고 나면 신혈의 향기가 사라지고 악마들은 이성을 찾게 된다.
그때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냥감인 이씨 남매와 협력자인 남지후가 노려질 것이다.
멀쩡한 상태의 이한울이라면 몰라도 과도한 정신력을 소모해 괴로워하는 이설아는 도망칠 수 없다.
작게 혀를 찬 이한울이 시현에게 눈길을 줬다.
“잘 가라.”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눈빛만큼은 살아 있다 생각하며, 이한울은 동생을 짊어지고 이 장소를 벗어났다.
감정 없는 눈에 시현의 모습을 담은 남지후도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남겨진 시현은 엄청난 덩치의 거북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머리는 냉정했다.
“싸우는 건 미친 짓이고. 달아나야겠지.”
시현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외투를 벗었다.
“대부분의 피는 외투에 묻었으니, 넌 이거나 쫓아라.”
있는 힘껏 던진 외투가 멀리 날았다.
거북의 목이 크게 꺾이며 외투를 따라간다.
[우으으으!]
거북은 마치 전차와도 같은 기세로 외투를 쫓았다.
그 틈을 노려 시현은 셔츠를 벗었다.
얼굴이나 손 따위에 묻은 신혈을 닦아 내기 위해서였다.
반팔만 입고 있으려니 얼어 죽을 것 같았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으나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굳어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자신의 피를 섞어 닦아 냈다.
피로 범벅이 된 셔츠를 허공에 던진 시현은 달아났다.
골목을 벗어나 최대한 먼 곳으로 향할 심산이었다.
어지럼증과 통증이 쉼 없이 그를 주저앉히려 했으나 어떻게든 견뎌 냈다.
[크르르르!]
[캬아아아!]
수많은 악마들이 시현을 스쳐 지나갔다.
보통이라면 주저 없이 시현을 향해 이를 꽂아 넣었을 테지만, 지금 놈들의 목적은 오로지 신혈이었다.
때문에 시현은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위험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앞이 잘 안 보여…….’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텼으나 슬슬 한계다.
눈앞이 흔들리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의식의 끈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다.
사사사삭.
“……?”
왠지 익숙한 소리에 놀란 시현이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아파트 단지의 지상 주차장에 있는 차량들 위를 기어 다니며 무언가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키히히히히!]
불쾌하면서도 섬뜩한 웃음소리.
시현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설마 머리지네가 신혈에 이끌려 온 건가?”
불행 중 다행이요, 기쁜 오산이었다.
주차장을 통과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상대로 이서윤을 끌어안고 있는 머리지네였다.
보통은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 머리지네를 끌어내릴 만큼 신혈의 향기는 강렬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상대의 정신을 지배하는 악랄한 능력을 지닌 중형 악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시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달이 밝네.”
발밑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른손으로 회칼을 강하게 쥐었다.
부상 때문인지 조금 힘을 준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 돌았다.
권능을 사용하자 회칼에 검은 기류가 맺혔다.
상대는 악마.
이자프의 권능은 머리지네를 반드시 처단해야 할 악으로 지목했다.
‘제길…….’
문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신체를 걸레 비틀듯 억지로 쥐어짜려니 몸이 엄청난 고통으로 위험을 호소했다.
‘버텨. 딱 한 번이면 되니까.’
스스로를 채찍질한 시현이 자세를 잡았다.
칼을 잡은 오른손을 좌측 하단으로 당기고 미끄러질 것을 방지해 왼손으로 손잡이 아래를 받쳤다.
머리지네와 시현의 그림자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키익?]
무언가를 느낀 건지, 아니면 머리지네를 유혹하던 신혈이 죄다 다른 악마들의 배 속에 들어가 버린 건지, 한순간 정신을 차린 머리지네의 수많은 머리가 일제히 시현에게 시선을 줬다.
수십여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붉은빛을 뿌렸다.
그러나 바닥을 보고 있는 시현은 정신 지배에 걸리지 않았다.
푸욱!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 내 내지른 회칼이 머리지네의 수많은 머리 중 하나를 꿰뚫었다.
이를 악문 시현은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상처를 벌렸다.
찢겨진 단면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캬아아아!]
머리지네를 구성하는 모든 머리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침묵하고 있는 머리는 오로지 하나.
시현의 일격에 꿰뚫린 놈뿐이다.
손에 힘이 풀린 건지 머리지네는 끌어안고 있던 이서윤을 떨어뜨렸다.
받아 내야 하는데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저 정도 높이면 다치지는 않겠지.’
미소 지은 시현이 허물어졌다.
그런 시현의 곁으로 눈을 감은 이서윤이 떨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꺄아아아아!]
분노에 찬 머리지네가 시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머리지네의 배후에는 쉬지 않고 그 뒤를 쫓던 민서라가 있었다.
“이게……!”
거칠게 숨을 토한 그녀의 주먹이 머리지네의 배후를 가격했다.
민서라의 주먹에 희미한 황금색의 반짝임이 실려 있었다.
콰앙!
거대한 해머로 내리친 듯한 충격에 머리지네는 끈적이는 액체를 뿜으며 반으로 끊어졌다.
[키에에엑…….]
머리지네가 애처로운 소리를 흘렸다.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한동안은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시현 씨!”
달려온 민서라가 시현을 부축했다.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부상당한 민서라의 팔이 보였다.
저 팔로는 두 사람 모두를 옮길 수 없을 것이다.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