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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12화 (12/225)

[12화]

최악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고, 달빛 아래 드러난 치과에는 총 다섯의 하수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늙고 주름진 놈이 둘, 끈적이는 타액을 흘리며 눈알을 굴리는 중년이 하나, 팔이 기형적으로 꺾인 교복을 입은 놈이 하나, 팔을 이용해 기는 작은 놈이 하나.

이미 다섯 명 모두가 감염되어 있었다.

특징이라면 하나같이 신체 일부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3층에서 사냥을 끝내고 배가 덜 차서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거였군.”

[크아아아아!]

시현을 발견한 중년의 하수인이 달려들었다.

문을 닫고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다.

급하게 손을 뻗어 하수인의 양팔을 붙들었다.

하수인은 힘겨루기를 하면서도 시현을 물어뜯으려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저씨는 생전에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왜 죽어서까지 지랄이야!”

시현은 하수인을 강하게 걷어찼다.

구원자로 각성한 시현이니, 지금의 일격에 내장이 파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하수인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서 재차 손을 뻗어 왔다.

시현을 위협하는 건 중년의 하수인뿐만이 아니다.

[으아아아아!]

[캬아아악!]

다른 하수인들도 일제히 시현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인간으로서 응당 갖춰야 할 품격 따위는 내다던진 채 짐승처럼 눈앞의 먹이를 탐하려 든다.

“하다못해 무기만 있었어도!”

3층의 생존자들이 경계할까 싶어 두고 온 회칼이 절실하게 생각났다.

시현은 권능을 사용했다.

무기가 없었기에 권능은 두 주먹에 맺혔다.

퍼억!

내지른 주먹에 하수인의 머리가 크게 돌아갔다.

신체 능력이 증가한 덕에 하수인을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사사사삭!

근방에서 어슬렁거리던 머리지네가 소란을 듣고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리 비켜!”

앞에서 자신의 치열을 자랑하는 늙은 하수인의 목에 돌려차기를 선사한 시현이 앞으로 달렸다.

하수인들이 우악스럽게 잡아채는 손길에 외투가 찢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열린 창문으로 향했다.

턱.

상처 하나 없는 희고 고운 손 하나가 창틀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창문을 닫고 잠금까지 마친 시현이 창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주변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과 함께 배후로부터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키히히히히히!]

섬뜩한 웃음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시현은 범벅이 된 식은땀을 소매로 대충 훔쳤다.

“눈만 안 마주치면 되는데……. 쉽지가 않네.”

중형 이상의 악마는 두 개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무형의 보호막인 외피.

그리고 다른 하나는 트롤이 가지고 있던 재생 능력 같은 특수 능력이었다.

하지만 머리지네의 경우 특이하게도 외피가 존재하지 않는다.

외피에 돌려야 할 에너지까지 특수 능력 쪽에 투자한 극단적인 악마.

그게 바로 머리지네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 특수 능력은 정신 지배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발동되며, 심지어 머리지네는 제 이름에 어울리게 수많은 머리통이 연결되어 있다.

가지고 있는 눈의 수는 수십여 개에 육박한다.

바보도 아니고.

3층의 생존자들이 저런 괴물을 상대로 기꺼이 창문을 열어 줬을 리가 없다.

그들 역시 머리지네의 정신 지배에 당해 기꺼이 창문을 열고 제 목을 내줬을 것이다.

[캬아아아아!]

하수인들은 쉬지 않고 달라붙었다.

시현은 벽에서 등을 떼지 않은 채 그들을 상대하느라 부단히도 애써야 했다.

콰득!

결국 하수인의 이빨 하나가 시현의 종아리에 파고들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구원자가 되었기에 감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지만 그래도 상처를 입으면 아프고, 많은 피를 흘리면 생명이 위험하다.

그러니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을 놓고 싸웠을까.

퍽!

있는 힘껏 휘두른 주먹이 하수인의 안면에 꽂혔다.

바닥에 쓰러진 하수인의 머리를 밟았다.

끔찍한 감촉과 함께 수박 터지듯 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헉…….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시현은 소매로 땀을 훔치며 주변을 살폈다.

더 이상 멀쩡하게 서 있는 하수인은 없었다.

잘려 나갔는데도 꿈틀거리는 손가락이 하수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증명할 뿐이었다.

물론 시현이라 해서 멀쩡하지는 않았다.

“아으……. 엄청 아프네. 축복 효과로 고통을 없애 주는, 그런 건 없나?”

신체 이곳저곳에 생겨난 상처들이 욱신거렸다.

살면서 주사보다 아픈 건 맞아 본 적 없는 시현에게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게 안전이 확보된 건 아니다.

머리지네.

싸우는 도중에 어디론가 가 버렸지만 분명 이 근처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번 정한 사냥감을 쉬이 놓치지 않는다.

“서윤이한테 가야 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소아과의 문고리를 잡았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소아과 내부가 굉장히 어둡다는 것을 파악한 순간, 시현은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달빛을 등진 머리지네의 그림자가 보였다.

‘괜찮아. 당황할 거 없어. 창문은 잠가 두었고, 머리지네는 창문을 깨지 않을 테니까…….’

철컥.

창문의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드르륵.

사사삭.

창문이 열리며 머리지네가 병원 내부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지? 외출했던 민서라 씨가 돌아왔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정신 지배에 당한 건가? 그게 아니라면…….’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시현은 문 옆에 놓아두었던 회칼을 손에 들었다.

[키히히히!]

온몸의 털이 곤두서게 만드는 머리지네의 웃음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왔다.

이를 악문 시현은 있는 힘껏 회칼을 휘둘렀다.

서걱.

손에 느낌이 왔다.

[꺄아아아아!]

[끼아아아악!]

여러 개의 머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됐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머리지네에게 상처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자신감이 붙은 시현이 다음 공격을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웬걸.

악에 받쳐 덤벼들 거라 생각한 머리지네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뭔가 싶어 그림자를 확인한 시현은 경악했다.

“이 개새끼가!”

머리지네의 그림자가 창문 옆에 서 있던 작은 여자아이의 그림자를 잡아채는 게 보였다.

당황해 붙잡으려 했으나 늦었다.

[키히히히히!]

머리지네는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창문을 빠져나간 후였으니까.

시현은 몇 번이고 구를 뻔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 때문이야. 서윤이를 혼자 뒀으면 안 됐는데…….’

민서라가 복귀한 낌새는 없었다.

그런데도 소아과의 창문은 열려 있었다.

분명 철저하게 문단속을 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머리지네는 어떻게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걸까.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다.

시현이 하수인들과 싸우며 만든 소음은 한 번 잠든 아이가 깨어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가까스로 1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바리케이드는 파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저 멀리 벽을 타며 달아나는 머리지네의 뒷모습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따라가면 늦지 않는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

강한 현기증에 시현은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떨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수인과 싸우느라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한 까닭이다.

거기에 권능을 과도하게 사용했다.

정신력의 저하로 인해 발생한 두통에 시야가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머리지네의 뒤를 쫓아야 하는데, 몸은 강하게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망할……!”

시현은 자신의 허벅지를 때렸다.

어떻게든 움직이려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그때였다.

“어……. 시현 씨, 여기서 뭐 하고 계셔요?”

타이밍 좋게 들려온 민서라의 음성이 천사의 구원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본 민서라의 상태는 그리 양호해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오른쪽 팔은 피투성이 상태였다.

그런데도 민서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현을 걱정했다.

“게다가 상처는 또 어떻게 된 거예요? 으아, 엄청 아프겠다.”

“민서라 씨!”

“넵?”

“…….”

순간적으로 시현은 망설였다.

상태가 정상이 아닌 민서라에게 의지해도 될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을 사람이 민서라뿐이다.

“각성은 끝났습니까?”

“그럼요. 조금 무리해서 다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공했어요. 어때요, 저도 제법이죠?”

그녀는 승리의 시그널을 보낸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은 그녀가 무슨 반응을 기대하는지는 뻔했다.

하지만 시현은 그녀가 원하는 반응을 줄 수 없었다.

“저놈을 쫓아 주셨으면 합니다.”

“……네?”

민서라는 당황하며 시현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줬다.

그곳에서 머리지네를, 그 수많은 손에 붙들린 이서윤을 본 순간, 민서라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땅을 박찼다.

멀어지는 그녀의 자그마한 뒷모습이 그리 듬직할 수 없었다.

시현은 호흡을 골랐다.

모든 것을 민서라에게 맡겨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르니 조금씩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현은 파괴된 바리케이드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건 뭐야?”

손에 미끄러운 무언가가 묻어 나왔다.

시현은 달빛 아래에서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피였다.

천천히 고개를 든 시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파괴된 바리케이드에 붉은색이 가득했다.

* * *

‘이제 와서 뒤를 쫓아 봤자 따라잡기 어려워. 머리지네의 움직임을 읽고 다른 길을 통해 앞질러 가야 해.’

머리지네는 바닥보다 벽을 타고 다니는 것을 선호한다.

바닥에는 섬세한 손을 다치게 하는 파편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 일대의 건물은 아포칼립스가 닥쳐왔을 때의 여파로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남아 있는 건물과 현재 머리지네의 방향을 살피니, 앞으로의 경로를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현은 좌측의 좁은 골목으로 진입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전력으로 달려 골목길 끝에 도달한 시현은 자의와 무관하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좁디좁은 골목길을 온몸으로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웃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이한울 씨?”

“지금 뭘 하는 거지?”

싸늘한 표정을 한 이한울이 물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아랫것이라도 대하는 양 서슴없는 말투였다.

“비켜 주시죠. 죄송하지만 지금 굉장히 바쁩니다.”

간만에 만나는 거지만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한울의 첫인상이 좋지 않기도 했고, 지금 시현의 머릿속은 이서윤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한울은 그저 귀찮은 장애물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한울은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가 없군. 너는 왜 손해를 자처하려는 거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그쪽과 말장난하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좀처럼 자리를 비켜 주지 않는 이한울을 밀어내려고 접근한 순간이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은빛의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해 왔다.

시현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젖혔다.

몇 가닥의 앞머리가 뿌리와 결별한 채 눈앞에서 나풀거렸다.

‘……칼?’

자신의 눈앞을 스친 게 칼날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반응이 조금만 늦어졌어도 두 눈을 잃었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아드레날린이 분출됐다.

“역시……. 트롤과 싸울 때 알아봤지만 센스가 엄청나.”

“그냥 못 배워먹은 놈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단단히 미친놈이었네.”

그나마 차리던 예의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손에는 트롤을 찔렀던 회칼을 들었다.

상황은 긴박했다.

1초라도 빨리 달리지 않으면 머리지네를 놓쳐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한울은 주머니칼을 장난감처럼 손 위에서 굴리고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다가는 등을 찔릴 것이다.

“너무 그러지 마. 그냥 소소하게 테스트하고 싶었을 뿐이야.”

“테스트?”

“참가자인 네가 게임의 승리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그걸 알아보고 싶었어. 너도 알다시피 이 험난한 세계에서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유능한 동료는 반드시 필요하거든. 그런데 마침 네 전투 능력이 제법 우수하더라고. 아, 혹시 몰라 말해 두는데 지금 내 랭킹은 3위이고…….”

“야, 이한울.”

시현의 목소리가 오뉴월에 서리가 일 만큼 차가워졌다.

이한울을 노려보는 눈빛 또한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분명 이런 눈일 것이다.

“나 지금 바쁘다. 나랑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내일 병원으로 찾아와. 예의라는 것도 갖추고.”

“……거절인가. 너도, 그 여자도.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머리지네는 중형 악마다. 너희 둘이 힘을 합쳐 봤자 상대할 수 없어. 그런데 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그것도 NPC 따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가 뭐지?”

“NPC라니……. 설마 서윤이를 말하는 거냐?”

분명 원작에서 이서윤은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였다.

그러나 시현이 봤을 때 이서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살아 숨 쉬고 감정을 느끼며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자신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람.

이서윤을 한낱 NPC로 취급하는 게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시현의 속내를 모르는지, 알려 하지 않는 건지 이한울은 계속해서 시현을 자극했다.

“너도 자신의 인생을 다시 쓰고 싶어서 이 게임에 참가한 거 아니었나? 666명의 참가자 중 기회를 쟁취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열 명뿐이야. 그렇다면 더욱 절실해야 하는 거잖아. 자신 외의 타인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을 정도로.”

이한울의 말은 시현이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내고 있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너는 절실하지 않지? 인간성, 정의감. 그런 불필요한 것들을 왜 아직도 달고 있는 거야? 나약함은 언젠가 발목을 붙잡을 거다. 그래서는 다른 경쟁자들을 밟고 올라갈 수 없어. 언젠가 다른 참가자들에게 짓밟히고 악마들에게 잡아먹힐 거다.”

그래, 절실해야 한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이 악물고 달려야 다른 경쟁자들을 제칠 수 있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

살아남기 위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 울고 있는 이서윤과 다시 만난다면, 그때도 시현은 자신이 이서윤을 구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게 세상이 붕괴했어도 달라지지 않는 윤시현이란 인간이다.

“마지막 경고야. 비켜.”

“그렇게 나약해서, 너를 적대하는 참가자를 만났을 때. 제대로 된 저항이나 할 수 있겠어?”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겪어 보지 그래.”

상대가 같은 참가자이기에.

같은 세계에서 온 같은 입장의 인간이기에.

그렇기에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인내가 폭발했다.

터진 댐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감정이 쏟아졌다.

시현은 땅을 박찼다.

이한울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서 가지고 놀던 주머니칼을 강하게 쥐었다.

“아무래도 생각을 바꿀 것 같지는 않네. 너만 있어 준다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시현을 영입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한울도 전투태세에 나섰다.

놀랍게도 이한울이 가진 주머니칼의 끝은 시현이 아닌 이한울의 손목으로 향했다.

피부와 혈관이 베이며 피가 흘러나왔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라는 말이 있지. 그게 유능한 경쟁자라면 반드시 부숴 둬야겠지.”

무표정한 이한울이 손을 휘둘렀다.

몇 방울의 피가 허공으로 날았다.

문득 얼마 전에 봤던 댓글 하나가 떠올랐다.

—최초의 각성자는 이한울이나 이설아, 아니면 김영운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즉, 당시에 이한울은 각성에 가장 가까운 참가자였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한울이 구원자로 각성을 끝마쳤다 생각해도 하등 이상할 건 없다. 오히려 그쪽이 신빙성이 높다.

상대를 과소평가해서 허를 찔리느니, 과대평가해서 신중을 기하는 편이 낫다.

‘피를 이용하는 권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시현은 황급히 몸을 피했다.

대부분은 바닥에 흩뿌려졌지만 몇 방울이 옷자락에 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달콤함이 섞인 듯한 철분의 냄새가 났다.

시현은 반사적으로 피가 묻은 외투를 벗으려 했다.

‘권능의 효과가 뭐지? 폭발? 불꽃?’

[카아아아아!]

멀지 않은 곳에서 악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언가에 잔뜩 흥분한 것 같은 음성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심지어 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 이 장소를 향해 악마들이 몰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외투의 지퍼를 내리던 손이 멈췄다.

얼추 짐작되는 게 있었다.

“설마 신혈?”

“맞아. 권능이 깃든 내 피는 악마를 흥분하게 만들지. 직접적인 전투력은 미비하지만 꽤 마음에 들어.”

이한울은 미리 준비한 붕대로 상처를 감싸면서 말했다.

“본래는 악마를 한 곳에 모아 소탕할 때 쓰이는 거지만…….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지.”

악마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피의 양이 소량이기도 하지만 이제 막 각성을 마친 이한울은 구원자로서 격이 낮다.

때문에 몰려오는 놈은 기껏해야 소형 악마 몇 마리가 전부일 터.

대처하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다.

몸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말이다.

정신력은 상당히 소모했고, 체력도 이제 겨우 개미 눈물만큼 회복되었을 뿐이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바리케이드에 대량의 피가 발라져 있더군. 그건 네 피야?”

“…….”

이한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매를 걷어 붕대가 둘둘 감긴 왼쪽 팔을 보여 줄 뿐이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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