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언제나 그랬듯 붉은 문자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놀랍지도 않았다.
시현은 태연하게 랭킹을 불러왔다.
<윤시현의 Re write>
연재 분량 : 5화.
현재까지 총 조회 수 : 178회.
구독자 : 34명.
종합 순위 : 10위.
“뭐야, 이거 왜 이래. 버근가?”
어찌 된 영문인지 윤시현의 Re write가 무려 10위에 기록되어 있었다.
자신의 눈을 믿기 힘들 정도의 변화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밑바닥이었음을 감안하면 기함할 수준의 발전이다.
댓글의 수도 늘었다.
—13. 사도인 한소현을 제외하면 윤시현이 첫 번째 구원자 맞지?
—14. 목숨 걸고 중형에다가 대량의 기생거미를 잡은 덕을 봤군.
—14. 최초의 각성자는 이한울이나 이설아, 아니면 김영운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16. 위에 은근슬쩍 번호 사기 치지 마시죠.
모르고 있었을 뿐, 참가자와 더불어 전 인류 중 최초로 각성을 마쳤다는 건 어마어마한 업적이다.
심지어 시현은 666명의 참가자 중 유일하게 두 개의 낙인을 가진 참가자다.
무려 두 개의 최초, 하나의 유일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순간부터 빠르게 구독자가 늘어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핫!”
멋대로 떠들어 대는 댓글을 가만히 지켜보던 시현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비록 순위의 가파른 상승은 10위에서 그쳤지만, 적어도 구원자로서의 스텝은 자신이 가장 앞서 있었다.
삼 일이나 출발이 늦었음에도 결국 앞선 경쟁자들을 따라잡고, 일발에 역전해 버린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한 보람이 있었다.
희열이 온몸을 지배하는 듯했다.
* * *
“소현 씨! 저 드디어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축하해.”
날아갈 듯 들뜬 김영운과 달리 돌아오는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한소현.
그녀는 언제 봐도 김영운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길게 흘러내리며 물결치는 감색의 머리카락.
반쯤 감긴 깊이 있는 눈동자와 윤기가 흐르는 붉은 입술.
하얗고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에 남녀 구분 없이 찬사를 자아내게 하는 몸매까지.
단언컨대, 그녀는 신이 불철주야를 불사하고 빚어 낸 최고의 작품이었다.
단점이라면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다는 걸까.
처음 만난 후 지금까지 김영운은 그녀가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한소현이 희미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가슴이 설렌다.
‘왜 웃으시는 거지? 설마 나 때문에?’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청색의 문자를 확인하고 계신 건가?’
그저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일 뿐인 김영운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모든 구원자에게 허락된 청색의 메시지가 아니라, 오로지 참가자에게만 허락된 적색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한참이나 랭킹을 열람하던 한소현의 입가에 다시 한번 미소가 번졌다.
보통 랭킹을 확인한다고 하면 최상위권의 몇 명만 확인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한소현은 달랐다.
그녀는 1위부터 666위까지.
모든 참가자의 랭킹을 외우고 있었다.
그 덕에 발견할 수 있었다.
수 시간 전과 비교해 말도 안 될 정도로 순위가 폭등한 이름을.
‘그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지불하고 매진된 아르하의 권능. 그리고 밑바닥에서 갑자기 10위권에 진입한 참가자.’
그렇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윤시현.”
그 이름을 뇌리에 각인이라도 하듯 한소현은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흥미, 초승달을 닮은 옅은 미소에 담긴 욕심.
두 감정을 읽어 낸 김영운의 눈동자가 타올랐다.
‘윤시현…….’
Re write에서도 유일무이한 예언자 김영운.
그 역시 윤시현이라는 석 자의 이름을 뇌리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자신이 받았어야 할 관심을 빼앗아 간 그 이름을 말이다.
* * *
시현이 생명의 탑으로 복귀했을 때는 이미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밤을 새운 까닭에 하품과 눈물이 쉬지 않고 쏟아졌다.
“졸려 죽겠네.”
앓는 소리를 하며 소아과 문을 열고 들어선 시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안에 사람이라고는 이서윤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이서윤이 그를 발견하고 웃으며 달려왔다.
기세로 보아 와락 끌어안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친해진 건 아니었는지 손뼉을 마주치는 데서 그쳤다.
앙증맞은 손을 꽉 쥐고 웃는 게 퍽이나 귀여웠기에 저도 모르게 이서윤의 머리로 손이 갔다.
“어때. 약속 잘 지켰지?”
“네, 아저씨 약속 잘 지키네. 장하다.”
“내가 좀 장하기는 하지. 그런데 스물넷에 아저씨라 불리는 건 좀 슬픈데. 나 아직 대학생인데. 복학생이긴 하지만 그게 죄는 아니잖아.”
“아저씨. 이쪽으로 와 봐요.”
시현의 하소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이서윤이 그의 손을 잡고 주사실로 향했다.
검지를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할 것을 요구한 이서윤이 침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모포를 덮은 채 곤히 자고 있는 민서라가 있었다.
“언니가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야 해요.”
안타깝게도 시현에게 주의를 주는 이서윤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결국 민서라가 눈을 떴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는 시현을 보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놀란 토끼 같았다.
“살아 계셨네요?”
“제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계셨나 보군요.”
“1:1이라면 3레벨은 돼야 상대해 볼 만한 트롤을, 미각성자가 사냥하겠다고 허세를 부렸으니까요.”
매정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시현이라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살아 돌아오신 모양이네요. 다행이에요.”
아무래도 그녀는 시현이 도중에 생각을 고쳐먹고 트롤에게서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거죠?”
시현은 응당 있어야 할 사람들을 찾았다.
노부부, 아버지와 아들, 고등학생.
그들의 모습이 소아과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그게 말이죠…….”
멋쩍게 웃은 그녀는 교묘하게 시선을 회피했다.
알려 주고 싶지 않은 진실을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해야 할 때 보일 법한 모습이다.
갈 곳을 잃고 갈팡질팡하던 민서라의 손가락이 슬그머니 아래쪽을 가리킨다.
“3층에 있어요.”
“그렇군요.”
시현은 바보가 아니다.
다른 생존자들이 어째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거주지를 옮겼는지.
민서라가 시선을 회피하며 말끝을 흐렸는지.
옮길 거면 전부 옮길 것이지 왜 민서라와 이서윤만 4층에 남았는지.
조금만 머리를 굴려 보면 금방 답이 나올 문제였다.
“하긴, 살인자와 같은 장소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없겠죠.”
“네, 뭐. 그런 거죠. 다들 신중하다고 해야 할까, 겁이 많다고 해야 할까.”
수긍한 민서라가 땀을 뻘뻘 흘리며 슬쩍 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본인의 잘못도 아니건만, 왜 눈치를 보는 건지.
그녀가 여러모로 손해 보는 성격이라 생각한 시현은 웃고 말았다.
“그 사람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시현은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이서윤의 귀를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막았다.
“그들은 저희와 같은 참가자가 아니니까요. 저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사람들한테는 당연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괜찮겠어요? 그 애 딸린 아저씨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던데. 분명 야밤을 틈타 해코지하려 할걸요?”
“별로 상관없습니다.”
그녀의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 회칼을 꺼내 든 시현은 권능을 사용했다.
“그런 짓을 해 오면 배로 돌려주면 될 뿐이니까요.”
“……어?”
칼날에 깃든 검은 기류를 확인한 민서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가뜩이나 큰 눈은 더욱 커졌으며, 불신을 가득 담은 동공이 격하게 떨렸다.
“말도 안 돼. 진짜 성공한 거예요? 내가 잠이 덜 깼나? 저는 소형 악마 하나만 상대하는데도 생사를 오가는데.”
민서라의 반응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인간이 생태계의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을 통해 강한 무기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무기가 없는 인간이 곰이나 호랑이 같은 맹수를 때려잡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맹수조차 꼬리를 말게 하는 악마.
그것도 사이즈부터가 비현실적인 중형 악마를 한낱 인간의 몸으로 쓰러뜨렸다?
믿는 게 더 어려웠다.
“원작의 주인공인 정훈조차 미각성 상태로 중형은 못 잡았는데…….”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제가 싸우는데 있어 한 재능 합니다. 사실 조금 편법과 운이 따라 주기는 했지만요. 도박에 성공한 셈이죠.”
너스레에도 민서라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시현이 회칼에 담긴 권능을 회수할 때까지 그녀의 시선은 못 박힌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쭈그리고 앉아 손톱을 씹던 그녀가 무언가를 결정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나갔다 올게요. 저도 얼마 안 남았거든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가 버렸다.
심각한 얼굴을 한 민서라가 무엇을 위해 외출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은근 지는 거 싫어하는구나.”
청순한 인상과 달리 그녀의 성격은 꽤나 호전적이었다.
“언니, 나가 버렸네.”
이서윤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서윤아, 왜 나는 아저씨고 민서라 씨는 언니야? 조금 서운하다.”
“아줌마라 불렀다가 살해당할 뻔했어요. 아빠가 바람피운 걸 목격했을 때 엄마 얼굴보다 더 무서웠어.”
“……그래.”
웃지 못 할 이유였기에 시현은 말없이 이서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시현은 비어 있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머리가 베개에 닿으니 잊고 있던 피로와 수마가 파도처럼 덮쳐 왔다.
‘너무 졸려. 하긴, 격하게 움직이기는 했지. 잠을 좀 자기는 해야겠는데……. 별일 없겠지.’
시현은 저항하지 않고 쏟아지는 졸음을 받아들였다.
의식이 어둠 속으로 깊이 잠기려는 순간.
사사사삭.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수마에서 헤어 나오기에는 너무 늦었다.
시현은 완전히 잠에 떨어졌다.
꿈에서 시현은 한 남자를 만났다.
정장 차림에 단정하게 머리를 자른 남자의 얼굴을 어째서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어깨의 낙인이 희미하게 열을 토했다.
* * *
“아저씨.”
시현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이서윤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을 보니 둥근 보름달이 걸려 있다.
아직 한밤중이다.
“……무슨 일이야?”
졸린 눈을 비비며 비몽사몽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않았기에 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어째서일까, 이서윤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밖에서 소리 나요. 이상한 게 막. 자꾸.”
“소리?”
그제야 시현은 청각에 집중했다.
사사사사삭.
확실히 소리가 나기는 했다.
벌레가 기는 소리다.
하지만 벌레가 아무리 커 봐야 이만한 소리를 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악마다!
‘벌레 형 악마라면 벽을 타는 것도 가능하지.’
시현은 손을 뻗어 회칼을 쥐었다.
창가로 다가간 시현은 살짝 고개를 내밀어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커다란 무언가가 병원의 벽을 타고 있었다.
빛이 없어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는 건 어려웠다.
기껏해야 벌레 형의 소형 악마라 생각했는데, 어둠 속에 내비치는 형상이 제법 커다랗다.
‘중형과 소형의 중간 정도 크기인가?’
자세히 대상을 살피기 위해 머리를 조금 더 내밀려는 찰나였다.
그것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그것들이라 해야 할까.
수많은 눈동자가 동시에 시현에게 향했다.
‘미친!’
기겁하며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사사사사삭!
섬뜩한 소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까워졌다.
시현은 이서윤을 끌어안은 채 벽에 밀착했다.
혹시라도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이서윤의 입을 틀어막고, 그것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렸다.
진료 대기실이 어두워졌다.
무언가가 창을 통해 들어오던 달빛을 온몸으로 차단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굉장히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사람의 머리에 초승달처럼 휘어진 붉은 눈.
그리고 보통의 사람보다 배 이상은 찢어져 있는 입.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돋아난 가늘고 긴 팔이었으며, 머리 아래로 존재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또 다른 머리였다.
그 머리 아래 또 다른 머리가 있고, 그 아래 또 머리가 있다.
수많은 머리가 줄에 꿰인 구슬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시현은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머리지네.
중형 악마다.
‘미쳐 버리겠네. 이 주변에 뭐라도 있나? 중형 악마가 뭐 이리 자주 등장해?’
시현은 중형 악마인 트롤을 쓰러뜨리고 구원자로 각성을 끝마쳤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힘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기생거미의 특징과 아둔한 머리를 가진 트롤의 약점을 찔러 만들어 낸 역작이었을 뿐, 정면 승부를 벌이면 깨지는 쪽은 무조건 시현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야밤에 기습을 당한 상황.
피하는 게 상책이다.
똑. 똑.
희고 가는 손이 창문을 두드린다.
‘공포 영화라도 찍을 셈인가?’
여러 개의 얼굴이 창문에 밀착해서 붉은 눈동자를 굴린다.
“우으으으…….”
손을 타고 이서윤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손등에 뜨거운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괜찮아. 조용히만 있으면 넘어갈 수 있어. 그리고 눈만 안 마주치면 돼. 저놈은 제 섬세한 손이 다칠까 봐 창문을 깨부수지 않거든.”
시현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금은 이서윤의 떨림이 줄었다.
한참이나 병원 내부를 살피던 머리지네는 흥미를 잃은 것인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후우……. 뭐가 저렇게 무섭게 생겼냐.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겨우 한시름 놓은 시현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뱉었다.
시현의 옷자락을 꽉 잡은 이서윤이 얼굴을 파묻었다.
“으어어어어어. 히끅! 우으어어우.”
“아, 응. 알겠어. 많이 무서웠구나. 나도 엄청 무서웠어.”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이서윤을 달래는 건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겉옷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나저나 왜 머리지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이 근방은 머리지네의 서식지가 아니다.
원작에서도 머리지네가 생명의 탑을 습격했다는 묘사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은 조심해야겠어. 그리고 밑에 녀석들에게도 경고를 해 줘야겠지?’
얄미운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같은 생존자끼리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이서윤이 침대에 누워 잠드는 것까지 확인한 시현은 3층의 치과로 향했다.
“밤늦게 실례합니다.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어어어…….]
[으으?]
“찾아왔……는…… 이런 미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