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도망가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는 시현을 본 트롤은 발목의 통증조차 잊고 미소 지었다.
사냥감이 코앞에 있다.
손만 뻗으면 달콤한 피와 부드러운 고기를 탐할 수 있다.
극도로 흥분한 트롤은 주변에 자리한 거미줄이 전신에 휘감기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미줄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었으나 트롤의 힘에도 끊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처음 만난 중형 악마가 너 같은 멍청이라 다행이야.”
시현은 조롱의 뜻을 담아 얼굴 가득 미소를 그렸다.
[크아?]
궁지에 몰린 사냥감이 미소를 짓는다?
있을 수 없는 일에 트롤이 벙찐 얼굴을 했다.
자신이 농락당했다고 판단한 트롤이 분노의 고성을 내지르며 시현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의지대로 나아가지를 않는다.
이유가 뭘까.
덩치에 비해 자그마한 뇌를 총동원해 고민하던 트롤은 그제야 전신이 거미줄에 옥죄어 있음을 깨달았다.
“일대는 기생거미의 영역이다. 그리고 기생거미의 거미줄은 힘으로 끊을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태운다면 모를까.”
바꿔 말하면 기생거미의 줄에 포박된 트롤은 그저 덩치 큰 샌드백에 불과하다.
시현은 먼저 트롤의 발목에 박혀 있는 회칼을 공들여 회수했다.
제대로 박혀 있어 회수에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어차피 시간은 많다.
“지금부터 도축해 주마. 어디 이 악물고 버텨 봐. 재생은 네 특기잖아.”
활짝 웃은 시현이 회칼을 휘둘렀다.
마구잡이로 휘두른다고 상처를 깊게 낼 수는 없다.
칼을 역수로 잡고 온 힘을 다해 내리꽂은 후 체중까지 실어 내리긋는다.
그 과정을 몇 번이고 질리도록 반복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체력이 빠르게 소진됐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고통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시현은 멈추지 않았다.
트롤의 다리에 상처가 늘어나며 대량의 혈액이 바닥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리 효과는 없어 보였다.
중형 악마부터는 고유의 능력이 있다.
이 악마는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빠른 재생력 덕분에 판타지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와 트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애써 만든 트롤의 상처는 빠르게 회복됐다.
폭포처럼 쏟아지던 피가 멎고 갈라졌던 살과 가죽이 달라붙으며 시현의 노고를 비웃기라도 하듯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
‘재생 능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하네.’
벌어졌던 상처가 다시 붙는 게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다.
진이 빠질 법도 하건만, 시현은 포기하지 않고 일련의 과정을 되풀이했다.
[크아아아아!]
상처가 회복된다고 해서 고통마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쉼 없는 고통의 연속에 트롤은 비명을 질렀고,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발버둥만으로도 시현은 밀려 넘어지거나 타박상을 입어야 했다.
역시 중형 악마답게 경시하지 못할 힘이다.
그러나 트롤이 몸부림을 칠수록 이미 단단히 엉킨 거미줄은 더욱 강하게 신체를 옭아맸다.
그로 인해 발생한 진동은 거미줄을 타고 고스란히 기생거미의 둥지로 전해졌다.
[키릭.]
[키릭. 키릭.]
둥지로부터 기생거미들이 하나둘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쳐 둔 함정에 빠진 사냥감이 생각보다 크고 강한 까닭에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슬슬 나올 놈은 다 나왔겠지.”
중얼거린 시현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피부과에 굴러다니던 간호사복 주머니에서 확보한 지포라이터였다.
칙.
부싯돌을 굴리자 작은 불꽃이 만들어졌다.
“트롤의 피는 성질이 특이해서 불이 잘 붙는다지?”
트롤의 상처는 재생되지만, 흘린 피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찰박.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붉은색의 깊고 넓은 웅덩이에 파문이 생겼다.
웅덩이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현은 지포라이터를 살며시 던졌다.
화륵!
불길은 순식간에 피 웅덩이를 덮는 것으로 모자라 트롤의 전신을 휘감았다.
[크아아악!]
트롤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불길이 휘어감은 것은 트롤뿐만이 아니다.
트롤의 근력에도 끊어지지 않던 거미줄이 기름 먹은 휴지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키익?]
[키이이익!]
거미줄 위에서 발을 구르던 기생거미들도 덮쳐 오는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빠르게 번진 불길은 이윽고 기생거미의 둥지를 덮쳤다.
어두운 밤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삽시간에 올라가는 기온에 시현은 흡족해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중형 악마인 트롤에 대량의 기생거미와 그 둥지까지. 이 정도면 조건은 채우고도 남겠지.”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기에 시현은 반응이 오기까지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시현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멀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시현을 응시하던 남성은 건물 사이로 모습을 숨겼다.
‘내가 싸우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사실 남자의 정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세상이 멸망했다지만 생존자들은 도시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
그들 중 하나가 우연히 시현의 전투를 목격하게 된 것이리라.
앞으로 흔하게 겪게 될 일이다.
낙인으로부터 반응이 나타났기에 시현은 남자로부터 완전히 흥미를 거뒀다.
왼쪽 어깨부터 가슴까지.
낙인이 새겨진 부위가 불에 닿은 듯 화끈거렸다.
* * *
사람은 누구나 실패를 하기 마련이다.
그 실패를 양분 삼아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실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재도전을 위한 코인이 잔뜩 준비되어 있다는 전제 조건이 따라붙지만.
그렇다면 태생, 나이, 가난, 건강 등을 이유로 코인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패.
그것은 곧 수십 년간 쌓아 온 인생이라는 이름의 공든 탑을 단번에 무너뜨리게 된다.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실패를 만회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이라면 찾아오지 않는 이 기회를.
신적 존재들이 벌인 유희를.
Re write라는 이름의 게임을.
그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노리는 것은 승리.
나락에 떨어진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적해야 할 악마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악마와 비교하면 인간은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약한 존재다.
뾰족한 이빨, 날카로운 발톱, 두껍고 단단한 가죽.
모든 면에서 앞서는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지혜를 짜내고 독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야 한다.
승리의 조건은 TOP 10 안에 들어가는 것.
바꿔 말하자면 열 명까지는 서로 협력 관계를 체결할 수 있다.
그 열 명을 누구로 채워 넣을까.
물론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건 어렵겠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한울은 고민했다.
고민하던 이한울의 앞에 시현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놈이라 생각했다.
생명의 탑을 첫 번째 목적지로 삼은 건 칭찬할 만했으나 그뿐이다.
특별한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한울은 자신의 눈이 옹이 구멍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현은 기교와 재치를 이용해 미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중형 악마를 토벌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각오와 용기를 증명했다.
아군으로 둔다면 그보다 든든할 수 없을 것이다.
“전투력은 우수해. 센스도 뛰어나고. 그렇다면 그것만 확인해 보면 되겠어.”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이한울은 웃었다.
“승리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인간성을 어디까지 버릴 수 있는지.
그것을 확인할 차례다.
“병원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한 번 이용해 볼까? 제법 친한 거 같던데.”
* * *
<이자프의 각인. 1차 해금 완료.>
<각성을 시작합니다.>
“이자프?”
처음 듣는 이름에 미간이 좁혀졌다.
이 세계에는 신이 존재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지만, 인류에게 힘을 하사함으로써 그들의 종말을 방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하사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고, 그것은 나누면 나눌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낙인이라는 이름으로 사전 선별을 하는 것이다.
낙인을 가진 자는 악마를 사냥함으로써 자신이 힘을 가질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증명해야 한다.
증명을 마치면 비로소 힘을 가질 수 있다.
간단한 이야기다.
다만 이 시스템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인간이 신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현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굴레였다.
문제는 이자프라는 이름이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 된 건가?”
괜히 발에 치이는 돌멩이에 화풀이를 하고 있으려니 본격적으로 신체에 변화가 찾아왔다.
뜨거운 열기가 체내를 가득 채우고 낙인이 의복 위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빛을 발했다.
주변의 공기가 시현을 중심으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을 멋대로 흐트러뜨렸다.
“크윽……!”
낙인을 중심으로 화상이라도 입은 듯한 열기와 통증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허공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구원자여, 네게 힘을 하사하니 인류를 구원하라.]
그 직후 허공에 익숙한 청색의 문자들이 여럿 나타났다.
<당신은 이자프의 축복을 받은 구원자입니다.>
<이자프의 축복을 받아 신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처형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강한 축복이 육신을 정화합니다. 구원자는 감염되지 않습니다.>
<보다 많은 악마를 처단해 인류를 구원하십시오. 그럴수록 축복의 빛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끝났나…….”
시현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전신을 태울 듯하던 통증은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신체 능력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특별이 느껴지는 뭔가는 없었다.
“뭐라도 하나 잘라 보면 느껴지겠지.”
새로 얻은 힘을 위해 적당한 사냥감을 물색하려던 찰나, 모든 메시지가 사라진 후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나타난 메시지는 청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구원자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메시지다.
반면, 이번에 나타난 메시지는 적색이다.
오로지 666명의 참가자에게만 허락되는 메시지였다.
<각성에 성공했습니다! 지금부터 참가자 특전인 블랙마켓의 이용이 가능합니다.>
“……참가자 특전? 그런 것도 있었나?”
시현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 결과 나온 대답은 ‘있었다’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특전이 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그 특전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블랙마켓이라니.
그 이름을 보고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시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특전을 확인했다.
촤라라락!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방대한 양의 카탈로그가 나타났다.
내용을 확인한 시현은 무심코 억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런 미친……. 이런 것들을 판다고?”
턱선을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 한 방울이 옷깃을 적셨다.
<카라스갈의 눈동자>
<군주의 깃창>
<메이하 루의 차가운 심장>
<연옥으로의 초대장>
방대한 양의 물품들 전부가 본 적 있는 이름들이었다.
비단 시현뿐 아니라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것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카탈로그에 실려 있는 물건들은 재앙을 불러오거나 불리하던 전황을 단번에 뒤집는 등 말도 안 되는 위력을 선보였다.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큰 힘이 되겠지만, 반대로 적대하는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잔뜩 흥분한 시현은 가격을 확인했다.
<카라스갈의 눈동자 — 250,000,000원>
<소지 재화 — 0원>
“……원? 토큰이 아니라?”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낸 시현은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이거?”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기존의 화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껏해야 효율 낮은 땔감일 뿐이다.
물론 이런 세상에서도 화폐는 필요하다.
그렇다고 무가치한 지폐를 계속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
따라서 사람들은 자연히 가치가 지닌 동전을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동전이 아니다.
구원자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각종 장비를 수급하기 위해 필요한 토큰.
그게 바로 이 세계의 재화다.
그런데 뜬금없이 원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2억 5천이라니. 단위 한 번 엄청나네. 야금야금 모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니고. 은행이라도 털어야 하나?”
그런 바보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 때, 시현의 생각을 조롱이라도 하듯 새로운 문자가 표시됐다.
<블랙마켓에서 이 세상의 화폐는 사용할 수 없으며, 오로지 저쪽 세상에서 가지고 온 화폐만이 사용 가능합니다.>
<매월 조회 수에 따라 급여가 지급됩니다.>
<의복, 통신 기기를 제외하고 참가자가 소지하고 있는 물품의 가치를 환산해 소지합니다.>
<계산 완료.>
<참가자 윤시현의 소지 금액 : 6,000,032,500>
“……?”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