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예의 참가자 남매.
그중 오빠 쪽에서 보내는 시선이 여간 날카롭지가 않다.
마치 한심한 것을 쳐다보는 듯했다.
“보아하니 이채연도 없는 거 같고. 모처럼 만난 참가자도 저 모양 저 꼴이니 더 있을 필요도 없겠어. 여기서 나가자, 이설아.”
“잠깐. 이채연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남자의 말엔 흘려들을 수 없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시현은 뒤도 안 돌아보고 소아과를 빠져나가려는 남자를 가로막았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길게 기른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원작에 나온 이채연의 특징은 단발에 안경을 쓴 30대 초반의 여성. 하지만 안에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없지?”
남자의 말대로다.
병원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소아과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내부에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유야 뻔했다.
“다른 참가자가 중간에 채갔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너는 다르게 생각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Re write의 구조상 참가자끼리의 협력은 어렵다.
666명의 참가자.
그 중 승리를 쟁취하고 원하는 삶을 손에 넣는 이는 고작 열 명뿐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티오가 열이라면 소수의 협력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게임을 개최한 존재는 참가자끼리 서로 신뢰를 주고받을 수 없게끔 악랄한 룰을 하나 끼워 넣었다.
4. 다른 참가자를 리타이어 시키면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협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보내라.
아주 못된 속셈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규칙이다.
그 보상이 무엇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수상쩍은 말에 혹할 만큼 궁지에 몰려 있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은 보상을 위해, 웃는 얼굴로 신뢰를 사고 뒤돌아서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이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민서라도 그렇다.
지금은 세상에 다시없을 선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가 어떨지는 겪어 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다.
그래도 협력자는 필요하다.
이 험난한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머리가 사라진 자신의 시신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게 흔한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가는 참가자라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같은 참가자를 신뢰할 수 없다면 원작에 등장한 주연급 등장인물들, 인성과 실력이 이미 검증된 자들을 동료로 삼으면 된다고.
이채연 또한 검증된 인재 중 한 사람이다.
무려 추격자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인물 아닌가.
그녀를 영입하기 위해 물밑에서 경쟁이 벌어지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민서라도, 눈앞의 남매도 그녀를 노리고 이곳으로 찾아왔을 거다.
정작 이채연은 다른 누가 채간 모양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니네. 어느 정도는 살아남겠어. 이름이 뭐야?”
“윤시현입니다.”
“난 이한울이야. 기억해 둬.”
스스로를 이한울이라 소개한 남자는 시현의 어깨를 툭 치고는 소아과를 나갔다.
굉장히 시건방진 태도로 일관했으나 알바를 하며 온갖 진상을 겪어 본 시현이 보기엔 그저 귀여운 수준이었다.
“죄송해요. 저희 오빠가 너무 오냐오냐 자라 가지고…….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동생 쪽은 상식이란 게 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몇 번이고 사과한 그녀는 이한울의 등짝에 손도장을 찍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가 버렸네요. 시현 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녀는 대답을 요구했다.
남매와 마찬가지로 이곳을 떠날 것인지, 아니면 남을 것인지.
사실상 이채연이 없는 생명의 탑은 거의 가치가 없다.
유일한 장점이라면 약품을 대량으로 구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참가자에게 의약품은 그리 좋은 메리트가 아니다.
‘생명의 탑에 가치가 없다면, 더 늦기 전에 LT마트로 가야 해.’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시현에게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이 위험천만한 세상을 싸돌아다니기에는 준비가 부족하다.
‘LT마트까지 안전하게 이동하려면 뭐라도 좋으니, 이동 수단을 확보해야 해야겠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각성까지……. 그러고 보니 참가자들은 전원 낙인을 가지고 있는 건가?’
낙인.
그것은 구원자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인류의 1차적 목표는 자신들을 사냥감으로 삼는 악마로부터 살아남는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숨 죽여 살며 구원의 손길이 뻗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
두 번째는, 힘을 가진 존재나 세력에게 비호를 요청하는 것.
마지막 방법은, 스스로가 힘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을 배웠다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이다.
맨손으로는 맹수조차 이기지 못하는 인류가 기상천외한 생체 무기로 무장한 악마를 상대로 어찌 승리를 취하겠는가.
그러나 인류가 악마를 사냥할 수 있는 방법이 원작에는 아주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원작의 주인공인 정훈은 수많은 악마를 처단하고 수많은 생존자를 구원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자였다.
그러나 정훈이라 해도 처음부터 악마를 손으로 찢어발길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시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을 쫓는 악마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데 급급했다.
우연히 악마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정훈은 그를 계기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정훈은 악마를 사냥하며 위기에 처한 생존자를 구출했다.
그 결과 구원자라 불리는, 인간을 초월한 힘을 사용하는 존재로 각성하게 됐다.
하지만 누구나가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격을 갖춘 이의 신체 어딘가에 낙인이 찍히며, 이 낙인이 없는 존재는 아무리 발악해도 구원자가 될 수 없다.
‘낙인은? 설마 없는 건 아니지?’
시현은 급하게 소매를 걷어 양팔을 살폈다.
없다. 어디에도 낙인이라 부를 만한 것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낙인이 신체 어디에 각인될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 낙인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 전에 일단 대답을 바라며 눈을 빛내고 있는 민서라에게 답을 줘야 한다.
“일단 한동안은 여기에 머무르려 합니다. 각성도 못 한 인간이 밖으로 돌아다녀 봐야 자살 행위밖에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러면 한동안은 같이 지내겠네요. 잘 부탁해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민서라의 손등에서 기이한 문양이 확인됐다.
시현이 눈을 빛내자 시선을 느낀 민서라가 소매를 걷었다.
“그러고 보니 시현 씨는 확인하셨나요? 낙인.”
왼쪽 손등부터 손목까지.
기이한 금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보통의 문신 따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낙인은 희미하게나마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낙인이 아주 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것도 아니다.
같은 참가자인 민서라가 낙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직 확인은 못 했네요. 지금부터 확인해 보려고요.”
양해를 구한 시현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안에서 마주친 자신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시현은 상의를 탈의했다.
보기 좋게 근육이 자리한 몸이 보인다.
그런 근육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좌측의 어깨부터 가슴까지 이어지는 기이한 형태의 문신이었다.
기억에 없는 이 문신의 정체는 당연히 낙인이다.
“있다.”
그제야 시현은 안도했다.
낙인이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구원자로 각성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낙인을 가진 자가 구원자로 각성할 수 있는 방법은 악마를 사냥하는 거야. 하지만…….”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자신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역한 냄새를 풍기던 그림자 악마의 모습이 뇌리에서 플래시백 되었다.
쩍 벌어진 이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했다.
대개의 악마들은 기상천외한 생체 병기로 무장하고 있다.
그런 악마를 나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사냥해야 하다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괜찮아. 악마는 대부분 치명적인 약점을 한두 개씩 가지고 있어. 그걸 잘 이용하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독여도 걱정밖에 들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옷을 챙겨 입던 시현은 옷에 묻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림자 악마의 피가 튀었나 싶었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자 악마의 피는 검은색이다.
무엇보다 옷에 찢긴 흔적이 존재한다.
“설마…….”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초조함에 입안의 침이 마르고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가 묻은 장소는 오른쪽 어깨 뒤쪽이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확인해 보니 얕고 긴 상처가 보였다.
시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과다 분비된 아드레날린 탓에 망각하고 있던 고통이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다.
‘도대체 언제? 왜? 설마 아까 악마의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던 건가?’
호흡이 가빠지고 비처럼 쏟아진 땀에 셔츠가 젖어 들었다.
‘만약 이게 악마 때문에 생긴 상처라면…….’
좀비 영화를 보면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가 있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 역시 좀비가 되는 정형화된 규칙 말이다.
문제는 그 클리셰가 이 세상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악마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되면 그 사람은 하수인이라 불리는 악마가 되어 인간을 사냥하고, 잡아먹는다.
이미 감염된 상태에서 하수인으로 변하는 걸 피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아니야. 이게 꼭 악마에 의한 상처란 보장도 없잖아. 그냥 어디에 긁힌 상처일 수도 있어.’
그게 아니라면 희망은 없다.
“시현 씨, 오래 걸려요? 혹시 낙인이 없는 건가요?”
화장실 밖에서 들려오는 민서라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시현은 반사적으로 상처를 가렸다.
“아니요. 방금 찾았습니다. 곧 나갈게요.”
만약 이 상처를 그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민서라가 가지고 있던 회칼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했다.
주먹이 쥐어졌다. 설사 덤벼 온다 해도 조금의 상처를 각오하면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호신술은 특기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시현의 팔은 힘없이 늘어졌다.
“아무래도 감추면 안 되겠지?”
이 또한 흔한 클리셰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힘을 합쳐 쌓아 올린 천혜의 요새는 대개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아니라 감염 사실을 속이고 숨어든 내부의 생존자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만약 이 상처가 긁힌 상처가 아니라 악마에 의한 것이라면.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결국 하수인이 되어 버린다면.
그때 벌어질 참극은 쉬이 예측할 수 있었다.
저 안에서 살아남는 자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구한 이서윤의 목을 물어뜯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혐오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옷을 챙겨 입은 시현은 각오를 다졌다.
“민서라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시현은 자신의 감염 가능성을 모두에게 전했다.
그에 따른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민서라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고, 이서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좀비 영화처럼 좀비가 돼서 우리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당장 나가!”
자신의 아이를 끌어안은 아버지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노부부는 이렇다 할 말은 하지 않았으나 구석진 자리에서 남자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대개의 반응은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이도 존재했다.
“아까 저 사람 말 못 들었어요? 괴물한테 당한 건지, 어디 긁힌 건지 본인도 모른다잖아요.”
가운 주머니에 오른손을 꽂아 넣은 의사가 적극적으로 시현을 변호했다.
“만약 후자라면 당신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저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겁니다.”
머릿수가 한참 부족한데도 의사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르는 이가 보면 부자지간 아니냐 싶을 만큼 열성적이었다.
“시현 씨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결국 민서라는 결정권을 시현에게 넘겼다.
사실 이곳 사람들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면 어떤 대답을 할지 미리 정해 두었다.
“층 하나를 삼 일만 빌리겠습니다.”
총 여섯 층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탑에서 생존자들이 이용하고 있는 층은 소아과가 있는 4층뿐이다.
만약 이채연이 있었다면 그녀가 홀로 떨고 있는 생존자들을 하나둘 구출해 오며 빈자리를 채웠겠지만, 그럴 일이 없으니 나머지 층들은 언제까지나 텅 비어 있을 것이다.
“민서라 씨도 아시겠지만, 이빌 보아처럼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감염은 빠르면 수 초. 늦어도 삼 일 이내에 뇌까지 도달합니다. 그러니 그동안만 여러분과 떨어져 있으려 합니다.”
원작을 대충 넘기지 않고 꼼꼼하게 읽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게 두 번째로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물론 첫 번째는 죽여 없애는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만일 삼 일이 지났는데도 제가 스스로 걸어 나오지 않는다면 그 방은 영구적으로 봉쇄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두 사람이 결정한 내용은 참가자가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각색되어 모두에게 전달됐다.
민서라가 가장 먼저 시현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앞장서서 시현을 변호하던 의사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도 감염 의심자와 같은 건물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불안을 감추지 못했으나 차마 무력행사로 연결시키지 못한 채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냘파 보이는 여성이지만 민서라가 가진 회칼은 충분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시현은 꼭대기 층의 피부과에 스스로를 감금했다.
“……하아.”
혼자가 되니 더욱 우울해졌다.
자연히 상처로 시선이 갔다.
“진짜 감염된 거면 어떻게 하지?”
전기가 나가 방 안도 어둡고 조용하니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기실 의자에 몸을 뉘이니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가 떨어졌다.
60억짜리 복권이다.
손을 뻗어 봤지만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쥐지 못한 손이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래도 1등에 당첨된 순간, 내 인생에서 사용됐어야 할 운과 복을 모두 써 버린 모양이네.”
온갖 궁상을 떨고 있으려니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의사가 양손에 맥주 캔을 들고 흔들었다.
“시현 씨, 시간 되세요? 서라 씨에게 부탁드려 맥주를 받아왔습니다. 시원하지는 않지만 마실 만할 겁니다.”
“시간이야 썩어 넘치도록 많지만, 저번에 금주하기로 마음먹었는데요. 두 번 다시 술을 입에 대면 사람이 아니라 개라고.”
“그런가요? 이거 강요할 수도 없고, 아쉽네요.”
“에이, 까짓것 제가 개 한 번 되고 말죠. 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하수인으로 변해서 덮칠지도 모르는데.”
“하하하. 그때는 열심히 도망가 보죠, 뭐.”
의사는 시현의 경고를 웃음으로 흘려 넘겼다.
두 사람은 맥주를 나눠 들고 창가에 섰다.
망가진 건물과 그것을 휘감는 고깃덩이와 미지의 식물들.
그야말로 세기말에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아포칼립스가 시작되고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거리는 굉장히 한산했다.
악마에게 쫓기던 사람들이 각자의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악마들은 그들을 쫓아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뿐이다.
저곳은 지옥이다.
발을 내딛는 순간 생존자의 냄새를 맡은 악마들이 이를 들이밀 것이다.
“사람들도 참 너무하죠? 좀비에게 물린 건지, 그냥 다친 상처인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몰아가다니.”
의사가 먼저 운을 뗐다.
굉장히 이성적인 의견이지만 어디까지나 원작을, 미래를 모르기에 낼 수 있는 의견이기도 하다.
시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캔을 땄다.
술은 좋아하지 않지만 탄산 소리를 들으니 강한 갈증이 느껴졌다.
“솔직히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너무한 건 너무한 거죠. 좀비에게 물렸다고 꼭 감염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어지간히도 불쾌했는지 의사의 미간이 골짜기만큼이나 깊어졌다.
목소리도 격양되어 있었다.
분노가 느껴졌기에, 왼손에 쥐고 있는 캔이 조금 찌그러지며 맥주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자신의 일도 아닌데.
‘의사라서 그런가?’
시현은 의사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사 감염이 되었다 해도. 어떻게든 도와서 치료 방법을 찾아낼 생각을 해야지, 저 위험한 곳으로 쫓아내려 하다니…….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내 캔이 완전히 찌그러졌다.
내용물이 흘러넘쳐 손과 소매를 흠뻑 적시고 있는데도 의사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의사는 마치 자신과 시현을 겹쳐 보고 있는 듯했다.
뚝. 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의사의 오른쪽 발등 위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제야 시현은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런 거였나…….’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