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2013시즌 -- >
벌써 4년째를 맞이하는 스프링캠프이다 보니 이맘때면 몸이 먼저 알아서 반응을 한다.
비시즌 기간에 열렸던 WBC대회와 장시간에 걸친 비행, 그리고 시차... 게다가 미국에 돌아온 지도 이제 겨우 삼일 째. 피곤할 법도 하지만 준혁은 여느 때처럼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떠졌다.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해보니 정확히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회탈락이 확정되고 난 후, 그 다음날 대표 팀 선수들은 한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시범경기가 막 시작되었기에 공항에서 간단히 해단 식을 한 후 다들 소속팀으로 복귀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준혁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목적지는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다. 스프링캠프 기간이 한창인 것은 그가 소속된 워싱턴 내셔널스도 마찬가지였기에 해단 식에 참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돌아온 날 하루를 푹 쉬고는 짐을 챙겨 곧장 워싱턴 내셔널스의 스프링캠프지가 있는 플로리다로 향했다.
물론 정상적인 스케줄 소화는 오늘부터였다.
" 하암~. "
하품이 나왔다.
알아서 눈이 떠졌다고는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플레이오프까지 끝난 후, 해를 넘기고 이 시간에 일어나기는 처음이었다.
혁은 서둘러 자신의 입을 막는다.
옆자리에는 휴가를 내어 함께 플로리다까지 내려온 예리엘이 누워있었다. 행여나 자신의 소리에 잠에서 깰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허락해주셔서 다행이야. '솔직히 파란 눈의 며느리 감이라서 아버지가 당황하시지 않을까 싶었다.
그동안 매체를 통해 그와 그녀의 관계를 아버지도 모르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예와 결혼이라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아버지는 아버지랄까? 허락하지는 말씀 또한 덤덤하셨다. 물론 결혼식은 이번 시즌이 끝나고 나서야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좋아하는 이와의 공통된 목적지를 바라본다는 것은 가슴을 설레게 하고 따뜻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어난 준혁은 소리가 나는 것을 조심하며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서랍장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자그마한 수첩크기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집을 나서며 그가 남긴 메모에는 ' 훈련 끝나고 전화할게. ' 라고 적혀있었다.
플로리다의 그의 집에서 워싱턴 내셔널스의 훈련장까지는 20분 거리다.
씻는 것을 생략한 채 차를 몰아 구장으로 향하면 대충 6시 30분쯤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
" 오우 리. 오랜만이에요. 잘 갔다 왔어요? "
역시나 청소직원들이 가장먼저 훈련장의 아침을 열고 있었는데, 준혁 또한 메이저리그만 4년차이다 보니 그들 중에 낯익은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이렇게 인사를 건네며 도착한 라커룸은 조용했다.
준혁은 옷을 벗어 그의 라커 안에 넣고는 수건 한 장만 든 채 샤워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와 유니폼으로 갈아입을 때쯤 되자 하나 둘 선수들이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다. 역시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플로리다로 내려오기야 어제 내려왔지만 조금은 늦은 시간이었고, 시범경기까지 시작되었기에 팀동료들의 얼굴은 준혁도 오늘 처음 보는 것이었다.
" 아이쿠야! 이게 누구야? 너도 벌써 온 거야? "
물론 개중엔 보자마자 너스레를 떠는 이들도 있다.
" 벌써 라니? 그래도 너보단 오래 있었다. 하하하. "
팀 내에서 가장 친한 이라면 스트라스버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래를 약속한 예리엘과 스티브 그리고 그의 부인 이렇게 3명이 고교 때부터 친한 친구이다 보니 커플끼리의 만남은 자연스레 빈번하게 되었고, 자주보다 보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기장내에서 동료들과의 관계라면 지금 자신의 앞의 대니 에스피노사도 그에 못지않았다. 과묵한 스티브에 비해 조금은 시끄러운 에스피노사가 어떨 때는 좀 더 친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 크으. 젠장, 틀린 말은 아니군. "
준혁처럼 WBC대회에 참가한 이들이 워싱턴 팀에도 몇 명 있었는데, 멕시코 대표로 참가한 대니 에스피노사도 그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2라운드까지 진출한 한국대표팀과 달리 그의 멕시코팀은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물론 시일 상으로 동일한 일정은 아니다보니 그가 속한 D조는 3월 10일이 되어서야 예선1라운드 일정이 끝났고 12일 마지막 경기를 가진 준혁과 불과 이틀의 차이밖에는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빨리 끝난 것은 끝났것이었다.
" 얼른 씻고 나와. 운동장에서 보자. "
몸을 데우기에는 러닝이 최고다. 그리고 달리기는 대표적 유산소 운동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 하체만큼 그 중요도가 대두되는 것은 없기도 했고,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연계되는 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워밍업은 필수였다.
스트레칭을 마친 후, 준혁은 천천히 운동장 외곽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금씩 속도를 높이려고 할 즈음 대니 에스피노사가 옆으로 다가와 보폭을 맞춘다. 슬쩍 그를 한번 쳐다본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달린다.
서로간의 말은 없다. 하지만 혼자 뛸 때 보단 확실히 즐겁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팀에 복귀했구나 하는 마음이 된다.8시가 되면 코칭스태프의 회의가 시작된다. 그리고 선수들에겐 이시간이 아침식사 시간이었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운동장으로 출근을 하는 시간이었다.
반가운 얼굴들과 새로운 얼굴들이 함께 보인다. 하지만 시즌에 임박하게 되면 많은 이들이 마이너리그캠프로 내려가야 하리라. 어차피 주어진 자리는 25자리 이상이 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 그러고 보면 용 됐다. 용 됐어. '준혁 그 자신의 이야기였다.
한때는 메이저리그 캠프 참가만으로도 감지덕지하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WBC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외도도 가능하고, 또 외도를 하다왔다고 하더라도 전혀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다. 스프링캠프는 확고한 주전에게는 컨디션을 점검하는 자리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이너리거나, 새로운 신인들, 저니맨 신세의 초청선수들에겐 코칭스태프에게 눈도장을 받아내야만 하는 자리였다.
당연히 임하는 자세부터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준혁에겐 회귀전 단 한번 메이저리그캠프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눈도장을 받기위해 몸을 불살랐던 때가 떠올랐다.
벌써 20여년 가까이 흐른 시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얼마 지나지 않은 듯 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의 전체미팅은 9시부터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 사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을 준혁이었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스프링캠프 참가 첫날이었고, 그래서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미팅 시간을 기다렸는데, 가끔씩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구나 싶었다. 미팅은 20여분 만에 끝났다.
시범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각자의 차량을 이용하거나(시즌과 달리 시범경기에서는 자리가 확실한 주전선수들은 교체가 되면 바로 퇴근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대부분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서 경기장까지 이동한다.) 구단버스를 통해 경기장으로 향했고, 시합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은 그라운드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출근인 준혁은 당연히 남게 되었다.
하루의 공식훈련의 첫 시작은 워밍업 훈련이었다. 이른 아침 이미 한차례 훈련을 마친 준혁이었지만, 식사를 하고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어버린 몸이었기에 빠져서는 안 되는 훈련이었다.
남아 있던 인원들은 투수 조와 야수조로 나뉜다. 그렇게 부위별 스트레칭이 진행되었다. 가만히 한자리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뛰어넘는 훈련도 포함되었다.
물론 스트레칭의 일환이었기에 그 높이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 아이쿠! "
하지만, 꼭 그런 장애물에도 걸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지도 않은 몸개그는 동료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기 마련이었다.
몸이 조금 풀렸다 싶자 전신을 풀어주는 훈련이 뒤를 따른다. 손을 머리위에 올리고 허들을 넘는다.
메이저리그의 스프링캠프 훈련은 오랜시간동안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트레칭 훈련 또한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짧은 시간동안 각 부위별로 몸을 풀 수 있도록 로테이션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당연히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집중하기 위해선 훈련을 이끄는 트레이닝파트 인원 또한 많을 수밖에는 없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면 준혁은 자진해서 베팅 케이지로 먼저 나가서 타격코치와 대화를 나누고는 훈련의 시간을 갖는다.
맨 처음 나서면 짧은 시간이나마 단독으로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남들이 가지지 못한 가상스트라이크존을 가지고 있는 준혁이었지만, 그가 서있는 곳은 게임속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100이면 100 모든 공을 맞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현실은 더 하면 더하다고 봐야했다. 그러했기에 투수가 던진 공을 이겨낼 수 있는 파워와 스피드는 그 스스로 훈련으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 리,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가야한다는 거 알지? "
베팅 케이지에 처음으로 들어온 준혁을 보며 시합에 따라가지 않고 연습장에 남은 릭 엑스타인 타격코치가 전체 미팅에서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준혁은 어제 한차례 치료실에서 몸 상태를 점검 받았다.
WBC기간 동안 동행했던 트레이너로부터 중간 중간 보고를 받았지만, 팀 내에서 준혁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전체적인 확인은 필수였다. 더군다나 집단장염이 한국대표팀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기 까지 했으니 말이다.
준혁과 함께 자리를 했던 수석 트레이너에게서 이상 없음을 확인받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WBC대회에 참가한 선수는 예년보다 빠른 몸만들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시즌 중 나쁜 결과로 이어질 개연성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준혁이 남다른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부상을 당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번 모두다 충돌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그 기간도 길지 않았다.
이제껏 부상후유증도 없었다. 하지만 빠른 몸만들기는 시즌 중후반 체력의 하락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부상은 이럴 때 가장 많이 발생한다.
" 네. 알겠습니다.
준혁은 대답했다. 전체 미팅에서도 이미 나온 이야기였고, 코칭스태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그도 모르지는 않았다.
솔직히 기우였다. 마이너스패널티를 받지 않는다면 절대로 부상을 입을 일은 그에게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당사자와 2명의 정령들을 제외하고는 알길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걱정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타격연습을 마친 뒤 준혁은 글러브를 들고는 외야, 자신의 포지션인 중견수 자리로 나갔다. 수비훈련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이것을 마치면 하루 중 팀의 공식 훈련도 끝이었다.
코치의 펑고가 날아왔다. WBC기간 동안 대표 팀에서 우익수만 보다보니 다시금 서게 된 중견수자리가 반갑기 까지 했다.
' 그래. 이거야. '타구를 향해 달려가는 준혁의 입가에 어느새 기분 좋은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