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2년 -- >
" 다행히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큰 부상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무릎인대쪽이다보니 한동안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MRI를 찍고, 그 화면을 모니터로 보면서 의사가 준혁에게 해준 말이었다.
한마디로 운동선수에게는 미묘한 부위이니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하며 혹시라도 뒤늦게 발견될지도 모를 부상부위가 없는지 살펴보자는 말이었다.
' 회귀하고 두 번짼가? '
마이너리그에 있을때도 손가락골절과 인대부상으로 깁스를 했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지금도 전체깁스가 아닌 반깁스이긴 하지만, 환자복을 입고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반깁스와 철망에 부딪히며 찢어진... 그래서 11바늘을 꿰매고는 붕대를 감고 있는 오른팔을 하고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보니 절로 한숨부터 나온다. 물론, 입원 4일만인 내일이면 퇴원을 할 예정이긴 했다.
처음부터 무릎십자인대 파열과 같은 큰 부상은 아니어서 의사의 말도 입원 기간 중 추후 이상만 발견되지 않는다면 길어야 일주일 정도만 입원을 하고 목발생활도 1-2주일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하긴 했었다. 하지만, 준혁에겐 그정도의 시간도 필요 없었다. 페널티가 사라지고 나자, 본래의 빠른 회복력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병문안을 온 친한 동료들과 팀의 트레이너 모두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챔피언십 7차전 패배가 그것이었다.
' 패널티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어. '
하지만, 그렇게 강한 페널티가 자신에게 주어질 줄은 솔직히 몰랐다.
시즌과는 다른 플레이오프 한정 가중 패널티라도 있는 것일까? 시즌중의 한게임과 플레이오프에서의 한게임의 무게감은 다를 수밖에 없기에 정말 그렇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6차전에서의 자신의 플레이-패널티를 감수한 - 자체를 후회하진 않았다. 끝장승부였으니까, 지면 곧바로 탈락이었으니까, 6차전을 이긴 덕분에 마지막 7차전까지 끌고 갈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 더군다나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 본들... '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조금 저리긴 하지만, 올 한해만 야구하고 말 것도 아니고... 그런데... 뭐하는 거지? 병원침대의 윗부분의 각도를 조금은 올려놓은 덕분에 상채를 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시선만 그쪽으로 주면 되었는데, 병원침대 아래쪽, 정확히는 그의 다리 깁스에다가 젠이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모습이었다.
" 뭐하는 거예요? "
준혁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한 것은 유성매직을 손에 든 젠이었다.
" 퇴원하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 "
" 네? 낙서하는 건 아니구요? "
" 어떻게 알았어? "
" 척이면 착이지요. "
도와주겠다며 입원실에 며칠 전부터 와서는 정작 간병은 예리엘에게 모두 맡겨버리고 만화책만 탑을 쌓아놓고 있는 젠이었다. 그런 그녀가 예리엘은 심부름을 보내놓고는 매직을 들고 깁스에다가 한참이나 적고 있다면 뻔 한 거였다. 어디 만화책에서 보고 따라하는 것 말이다. 드라마를 보고도 곧잘 따라하던 그녀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뭐라 적어놓은거야? 퇴원을 하고 난 이후의 일상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매년 하던 것처럼 구단주최 지역행사에 얼굴 좀 내밀어주고, 틈틈이 시즌중 못 다한 데이트도 했다. 오늘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물론 예리엘과 단둘만의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제안으로 준혁의 식구들(?)은 함께 플로리다로 향했다. 밤에 출발하는 비행기 편을 이용하다보니 그들이 마이애미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녘이었는데, 이것은 여행지로 잡은 목적지 때문이었다.
키웨스트(keywest).
바로 이곳이 가려는 곳이었다.
미국의 10대 여행지이자 사시사철 피한의 휴양지. 그리고 그들이 비행기나 배편이 아닌 장장 4시간이 걸리는 자동차를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인 '오버시즈 하이웨이 (Overseas Highway)'로 42개의 섬들이 42개의 다리로 육지와 연결된 곳들 중 가장 끝자락의 섬이었다.
우선은 공항에서 랜트카를 빌렸다.
" 키 줘바. 내가 운전 할게. "
그런데, 의외로 테드가 운전수를 자처하고 나섰다.
" 정말요? 저야 좋지만 서두... "
" 와본 적이 있거든. "
" 그래요? 언제...? "
준혁은 반문했다. 뻑하면 싸돌아다니는(?) 젠과 달리 테드는 그리 멀리까지는 잘 다니지 않는 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
그런데, 테드는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공항 주차장 한편에 세워져있는 광고판이었는데, 거기에는 글래머러스한 여성의 햄버거 광고 사진이 걸려 있었다.
" 케이트 이튼이네요? "
대답을 한 것은 예리엘이었다.
" 그러... 네. "
준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광고판의 여자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테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 그러고 보니 테드하고 케이트 이튼하고 이미지가 많이 닮지 않았어요? "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어린아이 마냥 손뼉을 치며 예리엘은 주위의 준혁들을 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 그래? 그런가? "
" 네. 꽤나 닮았어요. 정말. ... 그런데 지금껏 왜 몰랐지? "
테드의 말에 예리엘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썰미를 탓하며 고개를 꺄웃한다.
그 모습에 준혁은 피식하고 가벼운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사실 그도 그녀의 말에 공감이 갔다.
오늘따라... 아직은 어두운 거리와 그 사이로 조명을 받고 있는 광고판의 케이트 이튼의 얼굴이 테드의 얼굴과 꽤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싶긴 했기 때문이었다.
" 자자. 아침부터 햄버거 먹을 게 아니라면 어서 차에 타자고. "
그리고 역시나 잠시 찾아온 새벽녘의 적막을 깨는 마무리는 젠의 한마디다.
렌터카를 빌려 공항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이퍼를 요란스럽게 돌려도 조수석에 앉은 준혁은 앞이 잘 안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차는 거침없이 쌩쌩 나간다.
' 역시나 요정이라서 날씨의 구애를 받지 않는 걸까? '테드에게 운전대를 맡기길 잘했구나 싶었다. 초행길인 그가 앞이 잘 안보일정도의 장대비까지 내리는 와중에 네비와 이정표까지 확인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 웬 비람. "
하지만, 조금은 불만족스러웠다. 여행시작과 함께 장대비라니 말이다.
" 그러게요. 그래도, 조금 내리다 그칠 거예요. "
예리엘이 대답했다. 장소를 정한 것도 오늘로 날짜를 잡은 것도 그녀였다.
일기예보도 확인해보는 것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출발과 함께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살짝 당황한 것도 사실이었다.
" 걱정 마. 10~20분 정도면 그칠 비니까. "
이런 예리엘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운전대를 잡고 있던 테드가 입을 열었다.
" 정말요? "
" 그럼. 믿어봐. "
은근히 신뢰가 된다라고 할까? 예리엘은 테드의 말이 신기하게도 믿음이 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정말로 거짓말처럼 하늘은 테드의 말처럼 밝아오는 햇살과 함께 환하게 열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바다를 넘는 길"
이었다.
늪지대를 지나 한 시간 남짓 달리자, 드디어 고속도로 양 옆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푸른 하늘과 파아란 바다가 절로 탄성이 나올 듯 한 모습이었다.
왜 예리엘이 비행기를 두고 굳이 차를 타고 키웨스트로 가자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 키웨스트 가는 길. 넌 못 보겠네. 아~싸~. "
젠이 뒷좌석에서 테드를 놀렸다.
" 우습지도 않군. 다 보이거든. "
하지만, 역시나 테드. 뒤도 돌아볼 것 없이 가볍게 받아넘긴다. 그리고는 예리엘에게 말은 걸었다.
" 카리브 해하고 바다색깔이 비슷하지 않아? "
" 그런가요? 가보질 못해서... "
" 테드. 그건 나한테 물어봐야지. "
그리고는 또 다시 탄성이다.
" 와 하늘봐. 구름 지대로다. "
우습게도 제일 신난 건 젠인것 같았다.
그때 준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 여보세요? "
[ J&D코퍼레이션입니다.
미스터 리. ]
" 아. 네 안녕하세요. "
[ 혹시 오늘 시간 되시는가 싶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
" 오늘요? 그건 좀 곤란한데요. 지금 마이애미라서 말이죠. "
[ 아. 그러세요? ]
" 무슨 일인데 그러죠? "
[ 한국 야구위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CF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해서요. ]한국야구위원회라.... 대충 짐작은 갔다.
얼마 안 있으면 열리는 W B C 3회 대회 때문이지 않을 까 싶었다.
" 그래요? 오래 있을 건 아니니까, 올라가는 데로 연락드리죠. "
" 무슨 전화에요? "
전화를 끊기 무섭게 예리엘이 묻는다. 젠도 시선을 그에게 돌리고 있었고, 아마 운전 중이라 뒷머리만 보이는 테드도 궁금해 하지 않을까 싶었다.
" 아, 에이전트사 전화. 한국야구위원회에서 전화가 왔다네. CF건도 있다고 하고. "
준혁은 테드를 슬쩍 보고는 뒤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