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툴 플레이어-177화 (177/309)

< -- 9. 2012시즌 -- >

새벽 4시가 갓 넘어가는 시각. MBS방송국의 메이저리그 방송 부스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미국 워싱턴 현지시간으로는 오후 3시, 곧 시합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방송에 사용할 자료 등을 책상에 펼쳐놓은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바라봤다. 곧 카메라에는 빨간 불이 들어왔다.

[ 메이저리그를 사랑하시는 시청자여러분. 이민성입니다.]

[ 안녕하세요. 송재익입니다. ]

[ 송재익 위원님, 이준혁 선수가 어제는 엄청난 대기록을 달성했지요? ]

[ 맞습니다. 중계를 한 저희들도 믿을 수 없는 대기록이 나왔는데요. 5번 타석에 들어서서 5번 모두 홈런을 기록한 퍼펙트한 5연타석 홈런이었습니다. 한경기에서 5번 타석에 들어서서 모두 안타를 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기록이지요. 게다가 마지막 홈런은 끝내기였지 않습니까? 어제는 완전히 이준혁 선수의 날이라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답을 하던 송재익 해설위원의 목소리가 조금은 상기된 듯 들려왔다. 아마도 어제의 감동이 다시 떠오른 것이 아닐까 싶다.

[ 이쯤에서 조금 더 욕심이 날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이준혁선수가 1회선두타자로 나서서 때려낸 홈런도 상당하지 않습니까? ]

이민성 아나운서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연타석홈런 때문이었다. 한경기 최다연타석 홈런은 어제의 경기로 끝이 났지만, 한 번의 경기가 아닌 연속타석의 기록으로 범위를 확대를 해보면 아직 기록이 중단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약 첫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낸다면 또 다른 대기록이기도 했다.

[ 하하하. 이민성 아나운서, 연타석 홈런의 기록 연결을 생각하고 하는 말인 듯 한데요? ][ 네. 쉽게 올수 있는 기회는 아니니까 말이죠. 한 시즌 최다홈런 73개를 쏘아올린 배리본즈도 4연타석홈런은 때려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준혁 선수는 어제시합에서만 무려 5개를 쏘아 올렸지요. 여기에 오늘 첫타석에서 까지 홈런이 나온다면 6연타석 홈런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의 작성자가 되니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네요. ] [ 저도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데요. 충분히 가능은 하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작년 기록을 살펴보면, 1회 선두타자로 나서 때려낸 홈런이 7개입니다. 이준혁선수의 전체홈런에서 17%정도를 차지하는데요. 첫타석에서는 공을 좀 많이 보는 스타일이란 점을 감안하면 적은 숫자는 아니거든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밤잠을 설치고 준혁의 모습을 보기위해 TV를 켠 야구팬들의 관심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성급한 팬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명예의 전당 후보로 거론되는 준혁이었다. 앞으로 20여년은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야지만 기자단의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국내 무대는 좁다라며 커다란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간 야구유망주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 중 메이저리그 그라운드를 단 한번이라도 밟아본 선수는 박찬호 이후 몇 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남미국적의 선수들이나, 미국태생의 선수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메이저리거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혹독한 마이너리그의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야만 빅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수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이 만이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바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였다.

명예의 전당 입상자는 미국 야구 기자협회의 투표로 결정이 된다. 메이저리그에서 10년 이상 활약한 선수들이 은퇴 후 5년이 지나면 후보자격이 주어지는데, 이 투표에서 75%이상의 표를 얻어야지만 현액이 된다.

일단 후보가 되면 15년 동안 자격이 유지되지만, 한번이라도 득표율이 5% 미만이 되면 바로 후보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는 첫째 빼어난 성적을 올려야한다.

그런 점에서 준혁은 이미 충분한 기록들을 쌓아가고 있었다. 어제의 기록만 봐도 그랬다.

118년이란 긴 시간동안 아무도 깨뜨리지 못했던 5연타석이란 대기록을 달성하기 까지 했다. 더군다나 그는 깜짝 스타가 아니었다.

올해로 3년차를 맞이하는 동안 꾸준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물론, 빼어난 성적을 올리고도 명예의 전당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선수들도 있었다.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안타 기록을 세웠음에도 도박파문에 연루되며 영구 제명된 피트 로즈는 입후보자격 조차 박탈당했다. 홈런왕 마크 맥과이어 등도 약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인 문제에만 발목이 잡히지 않는다면, 한국인 메이저리거로써 가장 확실한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인 것이 또 준혁이라고 팬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 자, 수비위치와 라인업이 나오고 있군요. ] 화면이 현지화면으로 바뀌었다. 이미 모든 식전행사는 끝난 듯, 오늘의 워싱턴 선발인 에드윈 잭슨이 마운드에 올라 있었다.

워싱턴 라인업&수비위치1. 이준혁(CF)2. 대니 에스피노사(2B)3. 라이언 짐머맨(3B)4. 마이클 모스(1B)5. 이안 데스몬드(SS)6. 윌슨 라모스(C)

7. 브라이스 하퍼(LF)8. 마크 데로사 (RF)9. 에드윈 잭슨(P)샌프란치스코 라인업&수비위치1. 앙헬 파간(CF)2. 멜키 카브레라(LF)3. 파블로 산도발(3B)4. 버스터 포지(C)5. 브랜든 밸트(1B)6. 라이언 테리엇(2B)7. 브랜든 크로퍼드(SS)8. 저스틴 크리스티안(RF)9. 매디슨 범가너(P)[ 양 팀 모두 라인업에 변경이 있지요? ][ 네, 워싱턴은 애덤 라로시와 제이슨 워스가 빠지고 마이클 모스, 마크 데로사 가 들어왔는데요. 라로시는 상대투수가 좌완이기도 하고, 휴식일 을 챙겨준다고 빠졌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제이슨 워스는 현지이야기로는 갑작스런 편두통으로 빠졌다고 합니다. ]송재익 해설위원은 살짝 텀을 두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어제시합에서 졌다고는 하지만, 나름 공격 쪽에서는 나쁘지 않았던 자이언츠였다. 더군다나 오늘의 선발은 오른손 투수인 에드윈 잭슨, 그런데 왼손타자인 슈어홀츠가 빠지고 오른손인 크리스티안이 들어와있었다.

그는 한때 양키스의 유망주였다. 하지만, 여태껏 잠재력이 터지지 않았고, 이제는 대수비 대주자 정도로 취급받는, 로스터의 갑작스런 땜방용으로 보험으로 AAA에 박아 넣어둘 정도의 선수였다.

[ 자이언츠에서는 슈어홀츠가 빠지고 저스틴 크리스티안이 들어왔네요. 아마도 배려차원에서 슈어홀츠를 한두게임정도 쉬게 할 모양인 듯 합니다. ][ 하긴요. 아무래도 영향이 없다라고는 할 수 없겠죠? ]점프 캐치를 시도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의 글러브를 맞고는 펜스에 맞고 2루타가 될 타구가 홈런으로 둔갑해버렸다.

더군다나 끝내기 홈런이었다. 단 하루 만에 기억에서 지우기는 힘들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디비전이나 월드시리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정도랄까? 그래도 한두게임정도는 차분하게 경기장 밖에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MBS의 중계 진은 생각했다.

준혁의 고민은 수비에 들어가서도 계속되었다.

" 여덟 번째 공을 노려라니... "

속구를 노려라. 슬라이더를 노려라 라는 특정구질을 정해준다던가, 아니면 1스트라이크가 되기 전까지 공을 기다려라라는 웨이팅 사인 등은 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8구째를 노리라는 말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1~2구라면 그 투수의 성향 등을 파악해서 어떤 구질을 많이 던지더라 이런 예측이라도 가능하겠지만, 8구까지 간다면 신이 아닌 다음에는 예측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딱!

--그때, 앙헬 파간이 친 초구가 외야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꽤나 뻗어나가는 타구였다. 하지만, 준혁에게는 그리 어려운 타구는 아니었다. --턱--센터 펜스 방향으로 뛰어간 준혁은 자신의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타구였지만,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2번 타자 멜키 카브레라도 에드윈 잭슨의 2구째를 건드리며 내야땅볼로 물러났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파블로 산도발이 건드린 타구도 역시나 2구였다.

이번엔 몇 발자국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준혁은 거의 제자리에서 높게만 뜬 타구를 잡아낼 수 있었다.

" 되게 빨리 끝났네? "

나쁠 것은 없었다.

오랜 수비가 공격에서도 집중력을 저하시킨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은 것이었다. 그리고, 선발투수의 입장에서도 투구 수가 적으면 오랜 이닝을 끌고 나갈 수 있으니 중간계투의 체력비축이란 점에서도 좋았다.

하지만, 이것은 자이언츠의 입장으로 바꾸어보면 좋지 않은 전개였다.

어제경기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일까? 첫 회임에도 공격들이 성급했다. ' 나라면 공도 좀 지켜보고, 원하지 않은 공은 커트도 해내면서 투구 수를 어느 정도까지는 늘려놓았을 텐데 말이야. .. 아!!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릭 엑스타인 코치의 의도가 이것이었나 싶었다. 덕아웃에 들어와 방망이와 헬멧을 챙기러가는 중간에 릭 엑스타인 타격코치가 서있었다.

" 코치님 말씀대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

" 내 말대로? 아, 그래. 그렇게 해봐. "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준혁은 개의치 않았다.

' 내가 팬들과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분명해. 홈런 약속을 해놔서 크게 노리고 나오다가 폼이 흐트러질까봐, 주의를 환기시켜준거야. '그동안 준혁도 자신의 타격에 답답함을 느꼈었다. 무언가 자꾸 뒤에서 방망이를 잡아당기는 듯한... 그런 거북함으로 말이다. 그런데, 어제를 기점으로 자신의 타격이 살아났다.

타격코치의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혹시나 자신이 큰 욕심을 부리다가 또다시 폼이 흐트러지는 것은 아닐까 경계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 하하, 그런데, 그렇게 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니 릭 엑스타인 코치의 걱정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볼 계기는 되었다.

' 평소처럼 하는 거야. 오늘이라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몰리는 공은 휘두르고 , 아니면 거기에 맞추어서 대응하는 거지. 하던 데로 하면 돼. '포인트만 확실히 모으면, 경기후반에 슈퍼모드를 기대해볼만 했다. 컨디션이 좋았다.

올 시즌 들어 어제에 이어 참으로 좋았다. 직접 좋아진 것을 눈으로 확인도 했다.

포인트를 깎아먹는 도루는 절대 금지, 그리고 억지로 담장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2루타 이상을 노린다. 완전히 욕심을 배제하기위해서는 장타를 노리고 들어가는 것도 곤란할 수 있었지만, 포인트를 생각하면 2루타이상은 필요했다.

수비에서 특기라도 터져주던가, 하다못해 파인플레이라도 해내면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은 타격보다도 더 자신의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정말 노말 하게 게임을 플레이하면 슈퍼모드는 절대로 발동 안 되는구나.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게임의 옵션이 생활화 된지 벌써 3년째였다. 그냥 다시 한 번 상기를 해본 것이었다.

' 하지만, 조급하지는 말자. 어차피 확률은 반반. 특기가 하나도 안 터지더라도 자력으로 포인트를 모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차분해진다. 그제야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팬들과 약속한 홈런에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을 건네준 릭 엑스타인 코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