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 2012시즌 -- >
8회 말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타일러 클리파드였다.
작년 88.1이닝을 던지며 3승에 방어율 1.82로 워싱턴의 허리를 책임져주었고 생애 첫 올스타까지 뽑혔던 그는 올해도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늦긴 했지만, 그래도 귀중한 동점이 8회 초에서 나왔다.
동점 상황에서 클라파드는 내기는 아까웠지만, 오늘은 162경기를 치르는 시즌의 첫 시합 개막전이었다. 이렇다보니, 데이비 존슨 감독은 끝까지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가 바로 워싱턴의 계투진중 가장 믿고 있는 클리파드의 등판이었다.
컵스의 데일 스웨임 감독도 대타를 기용했다. 9번 투수의 타순이 첫 타자였기에 충분히 가능한 기용이었다.
오른손 투수인 클라파드를 겨냥해서 왼손인 블레이크 드윗이 대타로 나섰다.
클리파드는 그를 2구만에 좌익수 뜬공으로 잡아냈다. 그리고 맞이한 1번 타자 데이비드 데헤수스. 클리파드는 그도 6구만에 체인지업으로 내야땅볼을 유도해냈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의 타구였다. 하지만, 공은 2루수 에스피노사의 글러브를 맞고 옆으로 튕겨져 나가버렸다. 급히 달아나는 공을 쫓아가 잡았지만, 이미 데헤수스를 1루에서 잡기에는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원채 타격에서 좋지 않다보니-팀이 기록한 병살타 2개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 어이없는 실수가 나오고 만 것이었고, 더군다나 상위타선의 앞이다 보니 에스피노사의 인상은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흔들릴 클리파드가 아니었다.
다윈 바니를 공 단 2개만으로 유격수 뜬공으로 잡아내며 투아웃을 만들어냈고, 스탈린 카스트로도 땅볼을 유도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완벽하게 빗맞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3루수 라이언 짐머맨이 급히 앞으로 뛰어나왔지만, 해 20개의 도루는 너끈히 해내는 카스트로의 빠른 발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끝낼 수 있는 타이밍에서 수비의 에러와 빗맞은 미묘한 타구로 끝내지 못한 클리파드는 결국 4번 알폰소 소리아노를 상대하게 되었다.
아무리 불펜에서 경험이 많고, 노련한 피칭을 한다지만, 한 이닝 중에 방금과 같은 경우가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연속으로 일어나 이닝을 마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런 미묘함이 클리파드의 제구에 영향을 미쳤고, 공은 살짝 뜨고 말았다.
역대 5명만이 가입한, 40-40클럽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소리아노(2006)였다. 더군다나 호세 칸세코(1988), 베리 본즈(1996), 알렉스 로드리게스(1998)와 달리 이준혁(2010,2011)과 함께 약물의 도움을 받지 않은 청정한 기록이었기에 그 가치는 더했다.
나이가 들어 도루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한해 30개 가까운 홈런은 때려낼 수 있는 파워는 그대로였다. 그런 그에게 높은 페스트 볼은 너무나도 위험한 공이었다.
--따악!!
-- [ 소리아노. 쳤습니다. ][ 센터! 센터로 날아가는 공. 중견수! 중견수!! ]높게 뜬 타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빠른 라인드라이브의 타구가 외야로 날아가고 있었다.
'딱'소리와 함께 준혁은 뒤로 스타트를 끊었다. 그는 메이저리그 외야수들을 모두 통틀어 타구판단과 수비시의 반응속도가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하지만, 소리아노의 타구가 워낙 빠른 라인드라이브 이다보니 쉽지 않아보였다.
더군다나 타구의 방향도 중견수의 바로 정면방향, 가장 까다롭다는 위치였다. ' 어떻게 해서든 잡아야 해. '다행히 타구의 높이가 높지 않았다.
날아오는 방향이 문제였지만, 그것은 보통의 선수들의 경우이고, 타구의 궤적이 보이는 준혁에게는 별반 다를 것 없는 난이도였다. 다만 문제는 준혁의 발이 공이 그를 넘어가기전 잡아낼 수 있는 범위까지 움직여줄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다다다다!
--한참을 뛰었지만(준혁이 느끼기에) 아직도 타구의 궤적은 빨간색의 실선이었다.
이대로는 결코 잡을 수 없었다. 키를 넘어버리면 2점 실점은 확정이었다. 그렇다고 잡는 것을 포기하고 펜스플레이를 준비하더라도 별반 달라질 것은 없었다.
1루 주자인 카스트로의 빠른 발을 생각하면 2점까지도 내어줄 가능성이 컸다. ' 어차피 못 잡으면 2점이잖아?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었다.
빠른 타구이나 생각보다 낮은 타구의 높이가 바로 그 단 하나의 가능성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기에 준혁의 결단은 빨랐다.
" 타앗! "
그의 의지가 담긴 오른발이 강하게 그라운드를 박차는 순간, 높이 치켜든 글러브와 함께 그의 몸은 하늘을 날았다.
순간 준혁의 눈에 이제껏 붉은색으로만 표시되었던 소리아노의 타구궤적이 하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얀색의 궤적을 글러브가 가로막았다.
' 됐어! '이제는 타이밍 싸움이다. 확률은 반반! 최고점에 다다른 그의 글러브와 몸이 하강하기 전에 공이 와준다면 잡을 수 있는 것이고, 오지 않는다면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점프 타이밍이 조금 빠른듯했다.
소리아노가 쳐낸 공이 미쳐 글러브에 다다르기 전 몸이 아래로 떨어지려하고 있었다.' 제발!!!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으로 외쳤다. 그리고, 마치 그런 그의 외침을 어디론가 다다르기라도 한 듯이, 떨어지던 몸이 '털컥'거리며 제동이 걸렸다.
물론 0.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엇갈렸던 타이밍을 흩트려 버렸고, 본래는 빠져나갔어야할 공이 그러지를 못하고 준혁의 글러브 끝에 걸렸다. --촤라라락!!
--힘 있게 잘 맞은 빠른 타구답게 공은 요동치며 금방이라도 그의 글러브를 튕겨져 나갈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공이 걸린 위치도 글러브 끝으로 좋지 못했다.' 안 돼! '어떻게 잡은 공인데 놓칠 수는 없었다.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가 도망치려는 것을 막아서는 낚시꾼의 심정으로 준혁은 온몸의 신경을 글러브 끝에 집중했다.
--턱!
----터터터턱... --덕분에 준혁은 땅에 착지를 하고 나서야 펜스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푸르른 담쟁이 넝쿨들이 들어오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달리던 속도와 점프,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관성으로 그의 몸은 계속해서 앞으로 밀려나가고 있었다.
" 우왁!! "
준혁은 담쟁이덩굴 품안에 그대로 안겨버렸다. 상당히 격하게.
--쿵!
--' 이래서 담쟁이 넝쿨은 싫다니까! '순간적으로 하늘이 노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준혁은 공부터 찾았다.
다행히 글러브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준혁은 몸을 일으키기기 무섭게 글러브부터 들어올렸다.
" 와아아아~~~. "
비록 원정팀 선수의 플레이였지만, 리글리필드를 찾은 컵스의 팬들까지 모두들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그런 플레이였다.
심판으로부터 아웃 판정이 내려지고 난 이후에야, 준혁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어느새 다가온 데로사도 괜찮냐는 말을 먼저 물어왔다.
"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
준혁은 공을 던져주고는 일어섰다.
생각보다 통증도 없었고,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있지 않았다. 공을 잡고 설 만 한 거리가 나오지 않아 그대로 부딪쳤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결과였다.
이번의 플레이는 자칫 잘못하면 부상도 당할 수 있는 그런 위험한 허슬 플레이였다. 준혁은 자신의 몸을 파아란 빛이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빛이 거의 사그라졌지만, 처음 보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기엔 충분했다. ' 이번 것은 또 뭐지? '의아했다.
갑작스런 파아란 빛이라니... 게임의 특기가 발동되었을 때 시야의 외곽에 나타나는 빛과는 그 색깔부터 달랐고, 그리고 특기발동의 빛은 그 특기가 사용되어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대로 유지가 되는데 반해 방금은 빛은 그냥 한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결정적으로 특기가 발동될 때 나타나는 빛은 실제 게임플레이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었고, 방금 전의 파란 빛은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파란 빛이 자신의 몸을 보호해준 것은 분명해보였다.
' 젠! 온 거에요? 젠!! 어디 있어요?! '' 왔으면 대답 좀 해봐요! '준혁은 마음속으로 젠을 불렀다. 방금 전의 빛은 젠이 그의 몸에 부려준 요술이라 생각 들었다.
준혁은 텔레파시를 할 줄 몰랐지만, 이렇게 마음속으로 부르면 항상 알아듣고 이야기를 전해왔던 젠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나.... 잠시 잠깐이라도 희망을 가져서 일까? 그 허탈감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준혁은 이런 마이너스한 기분에 휩싸일 시간도 가질 수 없었다.
" 야!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돼 "
" 인간이 가능한 플레이냐? 그거?! 하하하하 "
어느새 다가온 데로사와 워스는 그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다.
기쁨의, 환호의 몸짓 치고는 그 행동이 꽤나 격했다. 물론 너무나도 기쁘다보니 그랬겠지만, 덕아웃에 들어가서도 이대로라면 오히려 맞아서 다칠 지도 몰랐다.
준혁은 덕아웃에 들어가기가 무서워졌다.
[ 이준혁! 점프! ][ 잡았나요? 앗! 위험합니다.
]이민성 아나운서와 송재익 해설위원은 준혁이 담쟁이 넝쿨로 덥힌 펜스에 부딪치는 것을 보고는 소리쳤다. 공을 잡으려다 가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펜스에 부딪쳐 시즌을 마감하는 선수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염려가 무색하지 만큼 준혁은 벌떡 일어나며 글러브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이준혁 잡아냅니다.
파인플레이! ][ 하지만, 이번 플레이는 위험했어요. 공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도 아껴야합니다. 이준혁 선수는 혼자만의 몸이 아니에요. ]이민성 아나운서는 침이라도 튀길 기세였다.
그만큼 준혁은 관심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선수였다. [ 그래도, 워싱턴을 살리고 클리파드를 살리는 멋진 플레이가 나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 리플레이 화면이 곧바로 나왔다. 엄청난 , 그리고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였다.
이런 것은 재빨리 재생시켜줘야한다. 세 번, 네 번... 몇 번을 틀어도 시청자들의 눈은 TV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 이야. 저걸 잡아내는군요. 키를 완전히 넘어갈 줄 알았는데 말이죠. 점프만 보면 농구해도 되겠어요. ]이민성 아나운서는 리플레이화면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중견수 수비를 볼 때 가장 어려운 타구가 바로 지금과 같은 타구였다.
수비수의 정면 머리위로 넘어가는 타구는 타이밍을 가늠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 맞습니다.
정말 수비 잘하네요. 사실 맞는 순간, 타구를 봤을 때는 저는 센타 오버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점프까지 하며 잡아내는 것 보십시오. 이준혁 선수의 수비는 .... 정말 참... 멋있다는 말밖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송재익 해설위원 마저 목소리가 조금은 격앙되어있었다.
이준혁의 플레이는 수비에서도 그 격이 달랐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3번째 아웃카운트가 올라갔고, 8회 말 컵스의 공격권도 끝이 났다. 그라운드에 나가있던 워싱턴의 선수들도 속속 덕아웃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준혁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 경기후반, 승부의 무게추가 넘어갈 뻔 한 상황을 이준혁 선수가 잘 막아내면서 위기를 넘깁니다. 양 팀 스코어는 1대1 그대로입니다.
워싱턴의 9회 초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이 준비될 동안 잠시 쉬고 오겠습니다. ]경기를 보고 있던, 워싱턴을 응원하던 팬들은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만큼 준혁의 플레이는 강렬했다. 그와 함께 9회 초, 준혁의 타석을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