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1올스타브레이크 -- >
" 저 혼자 할 수 있다니까요? "
" 가만 있어봐. 해준다고 할 때, 그냥 받아들여. "
" 제... 젠. "
늦지도 그렇다고 이르지도 않은 오전 시간, 준혁과 젠은 실랑이중이다. 그렇다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단지 혼자서도 넥타이를 맬 수 있다는 준혁과, 끝까지 자신이 매어주겠다는 젠의 다툼...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젠의 우격다짐을 당할 수 없는 준혁이다보니, 결국은 얌전히 서서는 목을 내밀고 만다. 젠의 키는 예리엘과 비슷하다.
그런 그녀가 그에게 붙어서는 넥타이 매듭을 매어주다보니 자연스레 그의 눈높이에 그녀의 정수리가 보인다. ' 바람의 향기가 이럴까? '시원하고 상쾌한.... 그런 향기가 그녀의 머릿결에서 알갱이가 터지듯, 그의 콧속으로 들어왔다.
샴푸의 인공적인 향으로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꼭 숲속에 들어와 있는 듯 한 그런 향기이다보니 머릿속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요즘 들어 하는 짓이 영락없이 인간의 아가씨 같아 보이다보니, 종종 망각을 하게 되지만, 이럴 때면 다시금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 에잉. 삐뚤어졌잖아. 움직이지 말라니까? "
" 안 움직였어요. "
" 내가 움직였다면 움직인 거야. 이번에도 또 움직이면 그냥 삐뚤어진 채로 매고 나가라고 할 거니까 알아서 해. "
" 눼.... "
제.... 젠장... 넥타이 하나 매어주면서 눈에 살기마저 어리다니...' 내가 매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 '하지만, 시작이야 어땠든, 젠이 넥타이를 매어주는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준혁으로써는 재대로 매어지기만을 비는 수밖에는 없었다.
" 흠... 네가 또 움직여버리는 바람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삐뚤어지지는 않은 것 같네. "
이.. 이봐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난 안 움직였다고요!! .... 라고 항변도 해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차마 생기지 않는다.
그런 그를 넥타이를 매어주고는 조금 뒤로 떨어진 젠이 위아래로 살펴보고 있었다.
" 왜? 왜요? "
뭐가 또 잘못되었나 싶어서 준혁은 젠에게 물었다.
" 예리엘이 출근하면서 챙겨준거란 말이지? "
" 네. 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저번처럼 후줄근하게 입고 나가지 말라면서요. "
" 후줄근이라... 흐음... 지금 옷도 좀 그렇긴 한데... "
꽤나 고심하는 눈치다. 하지만, 스스로 납득을 한듯, 고개를 끄덕인다.
" 뭐... 그래도 애인이 챙겨준걸 입고 나가는 게 좋겠지.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말이야. "
준혁은 옷을 잘 못 입는다.
소위 말하는 패션 감각 0%까지는 아니지만, 절대로 잘 입는다고 말하고 다닐 처지는 아니다. 그래서 여자 친구가 옷을 챙겨준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젠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표정이 그랬다.
그런데 쀼루퉁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묘해진다. 그러고 보니 이건... 어디에서 본 듯하지 않은가?
" 젠. 혹시 또 드라마 흉내 낸 건가요? "
준혁의 말에 젠은 바로 '짝'하고 박수를 치고는 빙긋 웃는다.
" 호호, 맞아. 어떻게 알았지? 눈치가 빨라졌는데? "
모르는 게 이상한 거다.
동네슈퍼를 운영하다보면, 카운터에 앉아있을때가 많다. 그럴 때면 TV를 틀어놓고는 하는데, 저녁7시만 되면 각각의 방송사에서 일일드라마가 시작된다.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 젠이 드라마 흉내 낸 것이 몇 번째인데요. 모르는 게 이상하죠. "
" 그래? 그래도 좋았지? 신혼부부 놀이. 정수는 아침 출근 전 넥타이 매어주기 아니겠어? "
라며 어느 센가 코앞까지 와서는 고개를 살짝 들어 눈을 맞춘다.
눈까지 빤짝이면서. --두근 두근... -- 제.. 젠장 또 가슴이 콩닥거리고 말았다. 젠은 인간의 미모가 아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올려다보면서 눈동자를 반짝이니, 볼까지 뜨뜻해진 것 같았다. 설마 빨개진 것은 아니겠지? 그때, 젠이 오른손을 들고는 그의 어깨를 '탁' 하고 두드렸다.
그리고는,
" 약속 시간 늦겠다. 서둘러야지. 그럼 다녀와. "
라고 말하고는 몸을 돌려서는 쌩하니 2층으로 올려가 버린다.
" 뭐... 뭐지? "
준혁은 또다시 기분이 묘해졌다. 그런데 이번엔 아까와 같은 두근거림은 없었다.
또다시 미묘한 시간이 흐르고 난후에야, 그제야 준혁은 알 수 있었다.
" 제~~엔!! "
그녀가 또 장난 쳤음을.... 오늘은 7월 11일 월요일이었다. 그리고 올스타 브레이크 첫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연히 경기가 없는 날이기도 하다. 준혁이 이렇게 정장을 입고는 집을 나선 이유는 베이스볼 아메리카(Baseball America)와의 인터뷰가 잡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컵스와의 경기에서 대기록을 세운 그날, 한국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오전시간대였지만, 월요일이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경기의 순간 시청률은 10%를 넘어섰다.
OBS가 전국구 방송이 아니고, 서울인천경기지역이 아닌곳은 OBSW란 별도의 케이블채널을 통해 방송을 시청해야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시청률이었다. 비록 박찬호의 전성기 때의 최고시청률이 17%가까이 된 것에 비하면 많이 모자란 수치였지만, 그때는 전국을 커버하는 공중파에서 중계를 해주었고, 띄염띄염 나오는 타자가 아니라 매 이닝 모습을 보여주는 선발투수이기에 시청률에서도 이득을 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했다.
더군다나 붙박이 메이저리거로 추신수만 남아있던 2009시즌 때의 메이저리그 중계 시청률이 0.3%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향상된 수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OBS의 이상렬 스포츠국장의 승부수도 재대로 먹혀들어갔다.
항상 해오던 재방송의 시청률도 상당했지만, 그의 지시로 급조된 '준혁의 특집방송'-특집이라고 해봐야 준혁의 진기명기 모음집+오전에 끝난 컵스와의 경기에서의 이준혁과 잠브라노의 드라마와 신기록 수록 장면 수준이었지만-도 10%를 찍어버렸다.
(반나절 만에 광고가 완판 되는 기염을 토했다고도 한다) 저녁에는 공중파 뉴스에도 준혁의 이름이 등장했고, 다음날은 스포츠 신문이 아닌 석간신문에서도 모두 1면에 이준혁의 신기록 달성 장면을 올렸다.
거짓만 조금 보태서 신문 1면만 봐서는 신문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본래도 유명한 편이었지만, 이 한번으로 한국에서는 준혁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으로 오인 받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관심은 미국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근 8~90여년 만에 깨어진 기록이었고, 그 기록의 달성 순간도 너무나 드라마틱하다보니 팬들이 받은 임팩트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정당하지 않은, 말 그대로의 빈볼을 하나도 모자라 2개난 던진 투수를 향해, 타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방법으로 복수를 하고, 그 마지막은 미국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베이브 루스를 재연하며 홈런으로 끝내버렸으니... 열광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고, 이한번의 장면은 이제껏 준혁이 쌓아왔던 기록들과 그것으로 조금씩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 하던 그의 노력이 무색하리 만큼, 단번에 그의 이름값을 올려버렸다. 이런 변화를 가장 빨리 눈치 챈 것은 언론사였다.
유에스 투데이나 뉴욕타임즈 는 말할 것도 없었고, 미국 내에서 이름께나 있다는 일간지에서는 모두 준혁의 기록 작성을 1면에 내세웠다. 워싱턴 지역지인 워싱턴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는 아예 특집기사로 많은 페이지를 할당하기 까지 했다.
당연히 인터뷰 요청도 쇄도를 했다. 곤란함을 느낀 준혁은 그의 매니지먼트사인 J&D코퍼레이션에다가 교통정리를 부탁했고, 매니지먼트사는 시즌중이란 논리를 내세우며 워싱턴 지역의 유력 일간지 와 스포츠전문지인 ESPN The Magazine 과 베이스볼 아메리카(Baseball America)와의 인터뷰에만 응하는 것으로 담판을 지었다.
물론 시합전이나 후로의 인터뷰시간에서의 짤막한 인터뷰는 가능한 한 여러 언론사의 것을 소화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당근과 함께.
" 해리스입니다. "
" 준혁입니다.
워싱턴 인근의 한 레스토랑에 들어선 준혁은 호스트의 안내로, 미리 와서 자리를 잡고 있던 베이스볼 아메리카의 해리스 기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 하하. 앉으시죠. 그런데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이는군요. 참 어깨는 괜찮습니까? "
기록을 세웠던 날 두 번이나 무리한 자세로 어깨부터 지면에 부딪히다보니, 준혁도 염좌가 생기고 말았다. 그리고, 의사로부터 심하지는 않지만, 2주정도는 치료를 요한다는 진단까지 받게 되었다.
" 덕분에... 계속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만, 경과는 괜찮습니다. "
물론, 말과 달리 준혁은 이미 다 나은 상태였다.
오래전 공원의 주차장에서 젠이 그의 몸에 부려놓은 술수 덕분에 몸 자체도 튼튼해졌지만(다치는 것을 보면 완벽한 것 같지는 않지만), 회복력은 확실히-조금은 비정상적으로- 좋아져 있었다. 하지만 구지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이상한 취급을 당하기도 싫었고, 그리고 그 덕분에 곤란한 이벤트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해리스 기자는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었다.
" 다행이군요. 저는 안색이 좋지 안길래. "
" 하하하. 안색이요? 그건 집에 누나가 말썽이라 서요. "
" 누나라면... 아 미모가 상당하시던데, 성격은 안그러신가보지요? "
해리스 기자는 금방 젠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준혁과도 닮은 얼굴인데다가, 상당한 미인이었다.
거기에 묘한 매력까지 가지고 있다 보니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말도 마세요. 오늘도 완전 놀림감 되다가 나왔습니다.
어휴... "
" 하하하하. 야구라면 무서울 것이 없는 준혁 리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있군요. 하하하. 이거 뜻밖입니다. "
본의 아니게 서두를 장식한 젠의 이야기로 두 사람의 인터뷰는 시작부터 화기애애해 졌다.
언론과 친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불편한 관계를 만들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런 점에서 준혁은 이제껏 큰 실수는 없었고, 오늘의 인터뷰도 분위기 좋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꽤나 길었던 인터뷰시간도 끝이 나고 있었다.
" 긴 시간을 내어주어서 고맙습니다. "
해리스 가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고, 준혁은 답례를 했다.
거기에다가 립서비스도 살짝 뿌려준다.
" 뭘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 하하하. 꽤나 긴 시간이라 지루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이군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시는 겁니까? "
올스타 브레이크는 오늘부터였다. 그리고 홈런더비는 내일에 예정되어있었고, 그 다음날은 말 그대로 올스타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 네. 그럴 생각입니다.
올해는 홈런더비에 참가를 하지 않으니까요. "
준혁의 말에 해리스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비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내일가도 무방했다. 그리고, 홈런더비 참가를 부상으로 고사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 그건 아쉽군요. 올해도 장외로 날려버리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
" 하하하. 죄송합니다. 좀 봐주세요. 안 그래도 나가볼까라고 이야기를 꺼냈다가 욕 엄청 얻어먹었습니다.
작년에 워낙 대단한 일을 해놔버렸기에 준혁은 솔직히 다시 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부상이 생겼고, 구단에서는 큰 부상이 아니었음에도 부상을 무릅쓰고 홈런더비에 나섰다가 후반기 시즌을 말아먹은 선수들의 예를 들먹이며 그의 출전을 막아버렸던 것이었다.
"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저라도 그 상황이면 욕하지 싶은데요? 하하하 "
해리스 기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준혁이 워싱턴의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자신이 감독, 단장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못나가게 막았을 것이 분명했다.
" 그래도, 올스타전은 출전하지요? "
오늘까지 명단에 올라있으면 출전한다고 봐야한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물어본 것이었다.
" 네. 지명타자로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분하게도 팬 분들이 직접 뽑아주셔서 말이죠. "
작년에 이어 올해도 올스타에 뽑힌 준혁이었다.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올해는 추천 선수로써가 아니라 팬 투표로 뽑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팬 투표로 뽑히게 되면 무조건 스타팅멤버에 이름을 올려야만 하는데, 그의 부상을 고려해, NL올스타팀의 감독을 맞게 된 자이언츠의 브루스 보치 감독은 그를 지명타자로 기용하겠다고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었다.
" 그나마 다행이군요. 올스타전에서도 못 보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말이죠. 이런 인터뷰를 끝내놓고도 또 시간을 뺏고 있었네요. "
" 아뇨. 아닙니다. 덕분에 지금도 즐겁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만 하죠. 집에서 누나가 기다려서요. 하하하 "
" 아~. 들어가시면 또 곤란한 일이 있는 겁니까? 하하하. "
" 글쎄요. 이 질문만큼은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하하하 . "
그렇게 서로 악수를 마지막으로 준혁과 해리스 기자는 헤어졌다.
이날의 인터뷰 이야기는 2주 뒤에 실렸다. 그리고, 해리스 기자는 자신의 인터뷰 기사 말미에 너무나도 즐겁고, 재미난 시간이었다. 라며 준혁에 대해 좋은 말로 글의 말미를 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