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툴 플레이어-76화 (76/309)

< -- 4. 2010메이저리그 -- >

필리스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워싱턴의 선발투수는 존 래넌이었다.

그는 1984년생 좌완투수로 꼴찌 팀 워싱턴에서 홀로고분 분투하며 선발 투수 중 유일하게 3점대 방어율을 찍어주고 있었다. 이것만 봐도 왜 워싱턴이 꼴찌인가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가?

풀타임 첫해인 2008년 182이닝 9승 15패 방어율 3.91, 2009년도 역시 202이닝 9승 13패 방어율 3.88로 준수한 성적을 내었음에도 승수와는 인연이 없었는데, 올해도 역시 그는 승수와 친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의 상대투수는 할 교수 로이 할러데이. 그를 의식한 나머지 너무 잘 던져보려고 했던 건지 경기초반 제구가 안 잡히면서 포볼과 히트바이 피치 볼을 내주었고, 무사 1-2루의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워스를 파울플라이로 잡아내긴 했지만, 곧바로 하워드에게 적시 2루타를 맞으면서 먼저 2실점을 했다. 그래도 더 늦지 않고 정신을 차리면서 존 래넌은 프렌시스코와 브라운을 모두 내야땅볼로 처리하며 이닝을 마칠수 있었다. 하지만, 할러데이가 버티고 있는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1회부터 너무 쉽게 2실점을 내준 터라 오늘도 그의 승리는 쉽게 올듯 해 보이지는 않았다.1회 말 워싱턴의 공격.

이제는 부동의 1번 타자로 자리를 굳힌 준혁이 타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이준혁 선수 타석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로이 할러데이를 상대로는 올 시즌 처음이지요? ]

[ 네 그렇습니다. 첫 상대이긴 하지만, 뛰어난 투수들을 상대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에 오늘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솔직히 이준혁 선수는 1번 타순에 들어서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타자인데요. 워싱턴의 팀 사정상 마땅한 1번 타자 감이 없습니다. ]

해설자의 말대로 워싱턴에는 그를 대체할 1번 타자의 대안이 없다시피 했다. 아무래도 1번에게는 높은 출루율과 주루능력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준혁말고는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선수가 없었다. 로이 할러데이.2003년도 AL에서 이미 사이영상을 한차례 차지한 자타가 인정하는 리그 최고의 투수. 201cm 104kg의 건장한 체격에서 내리꽂는 95마일의 포심도 위력적 이였지만, 평균 92마일정도의 투심과 91마일의 커터 , 커브와 체인지업 모두 평균이상의 구위였고, 또한 그 공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던져 넣을 수 있는 투수였다. 부상에서 복귀해 풀 시즌을 뛴 2006년부터 줄 곳 15승 이상을 기록하였고, 매년 250이닝 가까이 소화 할 정도로 이닝이터 로써의 능력도 탁월했다. 게다가 올해에는 메이저리그 통산 20번째로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기도 했다. 할러데이는 과묵하면서 침착한 선수이다. 마인드도 건실하고 공부고 개을리 하지 않는다. 당연히 리그 최하위의 팀이라고는 하지만, 워싱턴의 타자들에 대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준비를 해서 온 상태였다.

NL홈런 3위 타점 13위 OPS 1.31... 도저히 1번 타자라고 보기엔 과할정도의 공격력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가 눈여겨보았던 것은 준혁이 스트라이크아웃-볼넷 비율이 0.2도 채 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전성기 때의 배리 본즈보다 더 깐깐한 선구안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 초구는 지켜보는 스타일이지만, 편하게 잡으려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지? '

할러데이는 경기 전 코칭스태프들과 나누었던 미팅이 생각났다.

경기 전 상대팀의 타자들의 연구에서도 워싱턴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은 준혁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 중 한 가지가 초구는 보통 흘려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타자라는 것이었다.

" 흘려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요? "

코치의 어감이 이상했다.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싶었다.

" 그래. 그렇게 보이길 바란다고 해야 할까? 기록만 봐서는 초구를 좋아하는 타자로는 안보여. 분명. 그런데 말이야. 여기 기록을 한번 봐. "

그의 눈에도 분명 준혁은 초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타자로 보였다. 그런데, 코치의 말도 있고 해서 곰곰이 앞뒤를 맞추어보니 뭔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아! "

" 어때? 표정을 보니 알아챈 것 같은데 말이야. "

" 초구라도 쉬운 코스에서는 어김없이 방망이가 나왔네요. "

" 그래. 그런데 한 가지 특이점은 구질에 상관없이 나왔다는 거야."

" 그렇... 군요. "

대답하는 할러데이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타자들에게는 초구에 대한 성향이란 것이 있다. 초구를 좋아해서 쉽게 방망이가 나온다던가, 아니면 거의 초구는 건드리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투수들은 이런 타자의 성향을 파악해서 초구를 어떻게 던질지 결정한다. 타자와의 상대에서 초구승부가 어떻게 되느냐가 그 타자를 잡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에 투수에게는 초구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상대할 준혁은 초구를 던지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아 보이는 타자였다. 확실하게 코너워크를 하지 않고 쉽게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는 의도의 공이라면 구질에 상관없이 스윙이 나온다고 했다. 심지어 타자들이 거의 노리지 않는다는 초구의 커브까지 말이다.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와 로이 할러데이는 미팅때의 내용을 상기하며, 초구를 바깥쪽 투심으로 찔러 넣었다.

오른쪽 투수가 던지는 투심은 왼손타자가 봤을때는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면서 살짝 가라앉는다. 한마디로 살짝 스트라이크존에 걸쳐주면 좋고, 그렇지 않고 살짝 빠지더라도 상관없는 공, 혹시라도 스트라이크라 생각하고 방망이가 따라 나와 준다면 더 좋은 공. 그런 공으로 할러데이는 초구를 결정하고 코스를 정해서 던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상급의 투수라고 하더라도 경기가 처음 시작되는 1회의 그것도 초구라면 원치 않은 곳으로 날아가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의 할러데이가 그랬다. 준혁은 곧바로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다. 목을 두어 번 돌려보고는 방망이도 역시 휘둘러봤다. 짐머맨에게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이 시대 최고의 투수를 상대한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연 긴장이 될 수도 있었고, 그래서 몸을 이완시키기 위해 평소보다 준비 자세를 좀 더 길게 잡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흥분도 되었다. 최고의 투수가 던지는 공은 과연 어떨까?

' 초구는 원 없이 돌려보자. '

그렇다고 볼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스트라이크라면 평소와 달리 조금 까다롭더라도 스윙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마음먹은 준혁은 할러데이의 와인드업에 맞추어 준비동작에 들어갔다. 가상의 스트라이크존에 코스가 찍혔다.

' 실툰가? '

바깥쪽을 선택한 듯 한데, 조금 안쪽으로 몰린 공이었다. 전혀 할러데이 답잖은 공이다 싶었지만, 투수의 실투를 놓쳐서는 좋은 타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슈우우욱--

마음껏 방망이를 돌렸다. 맞는 순간 공의 움직임도 완만했다. 홈런더비가 있고 난후, 한동안 해바라기씨 과다복용의 후유증을 알았던 준혁이었다. 하지만, 홈런더비가 후유증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얻은 것도 있었다. 잡아당기는 타구는 게임옵션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힘을 실어줄수 있게 된 것이었다.

--따악! --

[ 쳤습니다! ]

[ 넘어가나요? 넘어가나요? 아~~~. 넘어~ 갔 습니다. ]

[ 이준혁! 선두타자 홈런! 나오자마자 홈런으로 응수를 합니다. ]

[ 이로써 이준혁선수 25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준혁이나 할러데이나 생각지도 않았던 홈런이었다.

할러데이는 던지고 난 순간, 실투란 것을 알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공이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미팅 때 들었던 대로 준혁의 방망이가 여지없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초구에 방망이가 나오는 확률이 5%대의 타자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스윙이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의 결과처럼 홈런이었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피홈런 허용수가 많아진 할러데이였다. 그렇다고 성적이 못한 것은 아니었다. 벌써부터 조심스레 사이영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조심해야한다는 것을 알고도 맞은 홈런이라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순간 필라델피아 원정 팬들이 조용해졌다. 할러데이가 등판한 경기였고, 1회 초 시작하자마자 2점을 선취하는 필리스였다. 당연히 오늘도 역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1회 말 상대팀의 선두타자가 들어서자마자 벼락같이 홈런을 날려버리자, 놀라기 까지 하는 이들도 있었다.

워싱턴이란 만년 꼴찌 팀에서 조심해야할 타자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들의 할러데이가 초구부터 홈런을 맞을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망하는 이들이 있으면 좋아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 워싱턴의 팬들은 곧바로 응수하는 홈런이 터져 나오자 목청이 터져라 준혁을 연호했다.

[ 리! 리!! 리!! ]

아직 1회도 다 끝나지 않았지만, 분위기만큼은 9회 말인 내셔널스파크였다. 하지만, 워싱턴을 응원하는 팬들의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할러데이는 마음을 다잡고 다음 타자를 상대했다.

건실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그답게 준혁의 홈런에 대한 충격은 없었다.

자신의 실투였고, 상대타자가 잘 친 것이었다. 그리고, 준혁의 5%의 확률이 다른5%의 타자들보다 확실히 위험하다는 것도 알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할러데이는 2번 데스몬드를 4구만에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냈다. 3번 애덤 던은 2구째에 플라이로 잡아냈고, 4번 짐머맨은 초구에 내야땅볼을 유도해 냈다. 1점 홈런을 맞기는 했지만, 나머지 3타자는 간단히 잡아내었고, 투구 수도 10개를 넘기지 않았다.

' 컨디션은 괜찮군. '

오늘도 자신의 공은 나쁘지 않았다. 마운드를 내려오던 할러데이는 왠지 모르게 고개가 상대측 덕아웃으로 향했다. 수비를 위해 그라운드로 나서는 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평소답지 않은 행동 때문이었을까? 우연찮게 뛰어나오던 준혁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할러데이는 역시 명불허전이구나라고 준혁은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에게 홈런을 허용하긴 했지만, 그것은 몸이 미쳐 풀리기 전이란 것이 느껴질 정도의 실투였다.

그 뒤 아무렇지 않게 3타자를 연속 간단하게 처리하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닝이 바뀌었고, 준혁은 수비를 하기위해 글러브를 챙겨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외야로 달려갔을 터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길이 어디론가 향했고, 거기에는 마운드를 내려오는 할러데이가 있었다. 준혁도 그의 시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서로에게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준혁에게나 할러데이에게나... 우연이라면 우연이수도 있는... 하지만... 그 순간의 느낌은 같으면서도 다른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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